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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9)화 (90/121)

89화. 규율의 송시 (1)

테스타멘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검은 정장을 입은 퀘렐라는 생전 테스타멘이 가장 좋아했다던 새하얀 백합을 한 아름 가져와 묘비 앞에 내려 두었다. 그녀는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으며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자주 뵈러 오셨나 봐요.”

퀘렐라는 소티스 대신 애꿎은 묘비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본 적도 없으면서.”

“테스타멘 님께 백합 향기가 났거든요.”

테스타멘의 머리맡에 처음 앉았을 때, 그에게서 은은한 백합 향이 났다. 곁의 화병에는 먼지 한 톨 내려앉아 있지 않았다.

그건, 바쁜 와중에도 항상 아버지를 생각하며 꽃을 가져왔던 퀘렐라 덕분이겠지.

“…….”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 하나가 불그스름해진 눈두덩에 툭 떨어지며 서늘한 감각과 함께 스며들었다.

“별로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제가 스카우터가 되겠다는 뜻을 밝힌 뒤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죠. 엘디카 숙모님의 도움으로 스카우터 자격을 얻기는 했지만…… 그때의 저는 억척스러운 아버지를 조금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도 같아요.”

소티스는 검은 치맛자락 앞에 두 손을 포개어 잡은 채 침묵했다.

“제가 견습 스카우터가 되어 국경 지대를 한 바퀴 돌고 왔을 때 사건이 일어났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절반이 죽었고, 나머지 절반은 슬픔으로 미쳐 있었죠.”

“…….”

“제가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되었더라면, 적어도 함께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소티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뇨. 그럴 수 없었을 거예요. 아마 지금처럼 남겨지셨겠지요.”

“왜요?”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게 설령 홀로 남은 아이를 영원히 쓸쓸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해도, 테스타멘과 엘디카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려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이를 지키려는 아비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소티스는 퀘렐라가 자신의 친부에게 느끼는 애틋함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부모를 기다리고, 부모에게 보호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까닭이었다.

다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감정이다. 그저 퀘렐라의 슬픔에 공감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죄송해요.”

소티스가 사과했다.

“당신이 저를 싫어할 수밖에 없을 것을 알아요. 저는 당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역할인 것만 같아요.”

“…….”

“그래서 제가 뭘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답을 찾았나요?”

“혼돈과의 전쟁을 끝내는 것.”

참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이 같은 가르침만을 주고 있었다. 어디에서 펼쳐 보아도 나침반의 붉은 바늘은 북쪽을 향해 돌아가는 것처럼.

“누구의 슬픔도 헛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퀘렐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저를 동정하시기라도 하는 건가요?”

소티스가 잠시 고민하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당신은 제가 아는 어떤 분을 닮았거든요.”

“그분에게도 이렇게 뭐든 해 주겠다고 하셨나요?”

그녀가 평온하게 말했다.

“네, 뭐…… 남편도 양보했는걸요.”

퀘렐라가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멘데즈의 황제가 요부에게 홀려 현명한 황후를 내쳤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요.”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만한 일은 아니에요. 저는 아마 언제든 쫓겨났을 테니까요.”

“…….”

어느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소티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는. 그 황성에서의 모든 일이 제게 사소해져 버렸거든요.”

퀘렐라의 검은 눈동자가 소티스의 침착한 모습을 담았다.

새삼 신기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왜 원망하지도, 앙갚음하려 하지도 않나?

자신의 삶은 원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저를 기다리지 않고 기어이 떠나 버린 아버지, 그 과업을 제게 물려주지 않은 숙모, 중요한 순간 외면하다가 떠나 버린 첫사랑, 저를 늘 가엾다는 시선으로 보는 대부.

그리고 무력하게 남겨진 자신.

퀘렐라는 그 모든 것을 원망했다. 마치 자신의 이름이 제시한 운명을 따라가는 것처럼.

그러나 소티스는 달랐다. 그녀는 홀가분해 보였다. 그 자학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였다.

“당신이라면 뭔가 다를 수도 있겠어요.”

“그래 보여요?”

“착각하지는 마세요. 당신을 좋아한다거나, 당신이 규율이 되기에 마땅한 인재라고 인정한 건 아닙니다. 다만, 베아툼의 마법사들이 가지 못했던 길을 당신을 통해서는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소티스는 조금 의외라는 듯한 시선으로 퀘렐라를 응시했다.

“퀘렐라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어요.”

퀘렐라가 코웃음 쳤다.

“난 스카우터예요. 내 눈은 정확하죠. 그 안목을 무시하는 건 바보들이나 저지르는 실수고요.”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움이 넘쳐흐르는 시선이 묘비에 가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소티스는 퀘렐라의 고민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 먹먹한 공백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곧, 퀘렐라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수첩을 꺼냈다.

“엘디카 님의 일기예요. 존경하는 숙모님을 추억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어 가지고 있었던 건데…… 이제는 양보해도 될 것 같네요.”

소티스는 수첩이 젖을세라 얼른 그것을 받아 들고 품에 소중히 넣었다. 어떤 말로 감사해야 이 마음이 전해질까. 고민하다 보니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퀘렐라는 그 침묵이 오히려 마음에 든 듯했다. 어떤 가식도 없는 담백한 적막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려 마지않던 것이었다.

그녀는 찡그리듯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지긋지긋한 원망도 언젠가 끝날 날이 올까?

투둑, 툭, 투둑…….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누군가의 눈물 같은 것이 두 여인의 이마에, 뺨에, 그리고 어깨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소티스는 퀘렐라를, 그리고 퀘렐라는 소티스를 보았다.

우리가, 서로를 좋아할 수 없는 입장으로부터 자유로웠다면…… 언젠가는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까.

“아무리 여름이라도 빗줄기는 차가워요.”

소티스의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레먼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퀘렐라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서슴없이 웃는 레먼의 표정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엘디카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아니, 자신이 그를 좋아한 이후로는 레먼은 제 앞에서 지금처럼 웃어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마법의 힘을 빌려 전해졌다. 따스하고 포근한, 초여름의 한낮 햇살처럼 느껴지는 마음이었다.

부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밉지 않았다. 소티스에 대한 원망이 비에 천천히 녹아 씻겨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소티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이라면, 제 해묵은 원한이나 배배 꼬인 마음조차도 이해해 줄 것만 같아서.

“…….”

선망과 슬픔, 부러움으로 얼룩진 퀘렐라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조금 놀라 고개를 들었다.

톡, 토독, 톡.

우산 위로 물방울이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찰나였다.

“베아툼에서 가장 바쁜 스카우터인데, 괜히 비를 맞아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지.”

알베스였다. 그는 찡그리듯이 웃으며 퀘렐라에게 우산을 기울여 주고 있었다.

“……이제 와 대부 노릇 하는 게 싫으냐?”

먹먹하게 치미는 감정을 삼키며 그녀가 대답했다.

“아뇨.”

“일단 알베스 마탑에서 비를 좀 피하자꾸나. 어디 보자, 네가 코코아를 좋아했던가. 멘데즈 동부에서 나는 화이트 초콜릿을 좋아했다고 테스타멘이 말했던 게 기억이 난다만…….”

그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테스타멘과 엘디카가 처음으로 멘데즈에 다녀왔던 날, 페리윙클 탑에 콕 박혀 기다리고 있던 어린 퀘렐라를 위해 곰 인형과 화이트 초콜릿을 사 왔더란다.

혼돈과의 싸움이 있고 난 뒤, 이따금 정신을 차린 테스타멘은 종종 헛소리하듯이 그런 말을 늘어놓곤 했다.

“퀘렐라에게 선물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 아이가 뭘 좋아하더라?”

그녀는 알베스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모두 퇴색되어, 이내 제 머릿속에만 케케묵은 추억으로 남은 줄로만 알았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제는 먹지 않느냐?”

사실은 이제 먹지 않는다. 국경 부근을 오가며 술집에서 정보를 얻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단것보다는 기름진 것을 먹을 일이 잦았다. 육포나 마른 빵으로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아 그런 포근하고 달콤한 음식은 영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뇨, 먹어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무심결에 나온 대답이었다. 퀘렐라는 얼른 알베스의 곁에 가서 우산을 나누어 썼다.

“여전히 좋아해요.”

알베스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은 여전히 따뜻했다. 외면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다정해서, 퀘렐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티스가 베아툼에 오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라는 것을 알았다.

“빚을 진 것 같아요.”

“소티스 말이냐?”

퀘렐라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알베스가 앞서 나아가는 소티스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소티스 메리골드를 아는 이 중에서, 저 여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있을까.”

“…….”

“더 놀라운 건, 본인이 그것을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돌려받기를 바라고 베푸는 진심이 아니거든.”

“그렇군요.”

“어떠냐. 스카우터의 눈으로 보기에, 소티스가 규율이 되기에 괜찮아 보이더냐?”

“글쎄요…….”

잠시 고민하던 퀘렐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의 볕이 내려와, 그녀의 이마에 가만히 내려앉고 있었다.

“혼돈을 굴복시킬 사람인지, 완벽한 규율이 될 만한 인재인지는 모르겠어요. 대신…….”

“대신?”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깜빡, 눈물을 참듯이 빠르게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가 볕 아래에 드러났다.

“숙모님께서 하지 못한 일을 해낼 사람으로 보여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도 소티스 메리골드를 기다리셨던 거겠죠.”

“무슨 소리냐.”

알베스가 웃으며 퀘렐라의 어깨를 감쌌다. 어린 새의 깃털을 정리해 주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테스타멘은 언제나 너를 기다렸단다. 유언은 그저 죽을 때 남기는 한 번의 말에 불과하지만, 매일 꽃이 마르지 않게 가져다준 건 너였잖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랜 원망과 슬픔을 씻어 낼 수 있을 만큼, 오래도록 이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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