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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8)화 (89/121)

88화. 엘디카의 유산 (4)

세 사람은 중앙 궁에 들러서 당나귀를 빌려 소티스를 태웠다.

소티스 일행이 왔다는 소리에 허겁지겁 달려온 애나는 저를 이렇게 두고 갈 거라면 진작 말해 줬어야 하지 않느냐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소티스가 탄 당나귀의 고삐를 쥐여 주자 다시 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즐겁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눈치 빠른 아이는 어디서든 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며 잘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중간에 약이 뚝 떨어져 고생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치유 마법에 통달한 마법사들이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새하얀 포석이 동쪽으로 이어지자 어느새 연붉은색으로 변했다. 페리윙클 마탑으로 이어질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내 잡초가 듬성듬성 자란 길이 이어지고, 바위 몇 개를 지나자 잿빛으로 우뚝 솟은 알베스 마탑이 드러났다.

“삭막하지.”

알베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야에 마탑이 들어온 이후로 알베스와 레먼은 묘하게 조용해졌다. 발걸음도 조금씩 느려졌는데, 아마도 목전까지 다가온 슬픔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저항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소티스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나귀에 올라탈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이 한 줌씩 휘발되어 시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테스타멘은 알베스 탑의 가장 높은 곳, 그리고 좁은 침실에 있었다. 더께처럼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가느다란 호흡을 이어 가는 그는 무척이나 고되고 고통스러워 보았다.

그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테스타멘 님과 인사를 나눠도 될까요?”

레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까이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듯, 정확히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소티스는 머뭇거리며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고목처럼 바짝 마른 남자의 머리맡에 앉아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죽은 사람의 유언이 무어길래 당신은 죽지도 못하고 이 긴 시간을 형벌처럼 견뎠을까요.

차라리 내가 당신의 운명에 닿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그 고통스러운 무게를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요.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안식을 바라는 저 사람들과, 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 저를 위해서.

“제 이름은 소티스예요.”

소티스가 테스타멘의 차가운 손을 쥐고, 그의 앙상한 손등에 제 손바닥을 대어 온기를 전해 주었다.

“제가…… 이번 대의 규율이에요. 엘디카 님의 뒤를 잇게 되었어요. 사실 제게는 너무 과한 자리지만요.”

저, 엘디카 님의 목소리도 들었어요. 소티스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덧붙였다.

“엘디카 님께서도 무심하세요. 테스타멘 님에 대해 알려 주셨다면, 다른 일을 제치고 달려왔을 텐데…….”

그녀가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닌가? 어쩌면 저와는 비교도 못 할 만큼 현명한 분이셔서, 더 많은 것을 내다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소티스는 남자의 손목에 손끝을 조심스레 대어 보았다. 아주 작고 느린 맥박이 이어지고 있었다. 귀를 기울일수록 맥박은 점점 흐려지고 희미해지는 듯했다.

“약속해요. 이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

“숱한 분들이 남긴 이 귀한 기회를, 절대로 허투루 쓰지 않겠노라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기적처럼 발현한 이 마법에도 뜻이 있다면. 베아툼에서 믿는다던 가장 지고한 신의 은총이 여기까지 닿아서 규율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 거라면.

그렇다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 운명으로부터 등 돌리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위로하고, 그리하여 모두 이겨 내겠노라고.

소티스는 그렇게 깊이 다짐하며 테스타멘에게 말했다.

“당신이 편히 쉬었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그녀가 처음으로 작은 아이의 영혼이 건넨 목소리를 들었던 때처럼 테스타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작고 불완전한 규율이여.]

“……테스타멘 님.”

[나의 뜻은 지고했던 마법사의 입을 빌려 전해질 테니, 그대에게 전하는 것은 떠나는 이의 유언이자 신의 전언이라.]

영혼의 목소리를 들은 레먼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한달음에 다가와 소티스의 손을 잡고, 반대편 손으로는 테스타멘의 손을 쥐었다.

“테스타멘 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알베스가 애나에게 말했다.

“아가야, 여기서 한 층을 내려가면 횃대에 흰 부엉이가 앉아 있을 거란다. 그 녀석의 다리에 이 쪽지를 묶어서 날려 보내 다오.”

“쪽지요? 무슨 뜻인데요?”

“테스타멘의 부고를 전하는 쪽지란다. 퀘렐라에게 곧장 갈 거야.”

애나가 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사이에도 테스타멘의 유언은 이어졌다.

[신은 가장 바른 것을 빚고, 가장 가여운 것을 빚었다. 이내 가장 바른 것으로 하여금 가장 가여운 것을 늪에서 뭍으로 끌어 올리고, 가장 가여운 것으로 하여금 가장 바른 것의 광채를 의미 있게 만들리라.]

테스타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퀘렐라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듯한 검은 눈동자가 기이할 정도로 빛나고 있어서, 소티스는 두려움을 느끼며 레먼의 손을 꽉 쥐었다.

[그대에게 이 오래된 싸움을 끝낼 자격이 있다면, 애써 찾지 않아도 가장 가여운 것이 가장 바른 것을 찾아갈 것이다.]

“하지만, 제게 ‘가장 바른 것’의 자격이 없으면 어쩌죠? 옳게 살아오려고 했지만, 돌이켜 보면 저는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서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요.”

테스타멘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곧 그의 목소리가 영혼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오직 신이시되, 그의 피조물들은 완벽을 물려받지 못하였다.]

“…….”

[그리하여 신께서 바른 것과 가여운 것에게 이르시되, 서로의 삶에 손을 내밀어 맞잡으면 불행이 씻기리라 하셨으니.]

“손을 내밀어서…….”

[때때로 바른 것은 가여워지고, 가여운 것은 바르게 될지니. 스스로 모든 것이 되려 하지 말고 부족한 것을 맞들어 메우라.]

테스타멘이 이어 말했다.

[작고 서글픈 규율이여, 고결한 삶과 완전한 죽음을 위하여 가여운 것에게 손을 내밀라. 완전한 삶과 고결한 죽음을 위하여 혼돈에게 네 것을 내어 주도록 하라.]

“테스타멘 님.”

소티스는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말하고 있었다.

“저는…… 불행한 사람을 만났어요. 제가 아는 이 중 가장 가여운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의 눈은 이미 죽어 있었고, 손발은 죽은 사람보다 더 차가웠어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린 것처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는데도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옳은 것이라면, 그 사람은 가여운 것일까요? 혼돈과 규율은 서로 대적하는…… 아니.”

대적이 아니다. 대적해서는 이 오래된 싸움을 끝낼 수 없다.

대적해서 승리하는 것이 종전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엘디카가 실패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저희가 서로 짝이 될 운명이라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여인은 상처투성이였다. 붉은 머리카락과 시든 녹색 눈, 상처투성이의 여인은 알몸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멍과 상처를 가지고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티스가 핀에게 손을 뻗었다.

“제가 이 여자를 사겠습니다.”

그녀가 가여웠다. 누굴 동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마치 어떤 운명에 이끌린 것처럼 핀을 끌어당겼던 것 같았다.

“모든 걸 가져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저는 무엇을 주어야 하나요?”

예감은 의심이 되었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자신이 규율이 되었다면, 어쩌면…… 핀이 이번 대의 혼돈일지도 모른다.

아직 자신이 첫 번째 각성만을 거친 불완전한 규율이라면, 그녀 또한 혼돈이 되기에는 다 자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행이 자라서 혼돈이 된다면, 다 자라지 않은 혼돈은 불행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직 피니에 로즈우드가 ‘불행’에 불과하다면.

그녀가 혼돈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면 혼돈을 막을 수 있게 될까? 악령술사들이 핀을 찾지 못하고, 그녀가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혼돈이 사람의 마음을 유혹해서 영혼을 파괴하는 일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 사람에게 줄 게 없어요.”

하지만 소티스는 줄 것이 없었다. 제 남편도, 제가 평생 지키던 지위도 주었다. 명예는 주지 못했으나, 애당초 핀이 바라는 것이 타인의 인정이나 감탄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어야 할까.

“……테스타멘 님?”

레먼이 앙상하게 마른 남자의 어깨를 쥐고 간절하게 소리쳤다.

“테스타멘 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하고 울린 소리가 큰 것을 보니 발로 차서 연 것 같았다.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오른 퀘렐라가 숨을 헉헉거리며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눈물이 한가득 맺혀 있었다.

“아버지!”

소티스는 테스타멘에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해답이 아닌 유언을 전해 주는 이였다. 테스타멘은 살짝 벌렸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해야 할 말은 끝났다는 뜻이겠지.

“…….”

퀘렐라가 급히 달려와 소티스의 손에 쥐어져 있던 테스타멘의 손을 받아 갔다. 깍지를 끼고 손등에 이마를 댄 그녀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 가지 마세요, 아버지……. 제 이름을 한 번만, 네? 한 번만 불러 주세요. 저는 줄곧 아버지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삶은 언제나 죽음을 향해 느리게, 때때로 빠르게 흘러갔다.

테스타멘 에니드는 편안한 미소를 띤 채 잠들듯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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