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7)화 (88/121)

87화. 엘디카의 유산 (3)

“알베스 마탑에는 엘디카 님의 ‘유언’이 잠들어 있습니다.”

소티스는 그 말에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유언이라는 건 말일 텐데, 혹시 엘디카의 마지막 말을 적어 둔 물건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물건에 잠든다는 표현을 쓰는 건 영 어색하다. 그럼 사람이 잠들어 있다는 것일까? 엘디카는 오래전 죽은 사람인데?

무슨 뜻일까. 조금 더 기다리면 설명해 줄까? 레먼은 친절하니까.

레먼은 고민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 포근한 수건을 얹어 주었다. 물에 젖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꼼꼼히 털어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분의 이름은 테스타멘입니다. 베아툼의 고대어로 ‘유언’을 의미하지요. 혼돈과의 마지막 싸움에 참여했던 마법사로, 엘디카 님의 남동생이십니다.”

“…….”

“그 사고로 테스타멘 님께서는 내내 병상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따금 눈을 뜨셨지만, 그 시간은 무척 짧지요.”

작은 물방울 하나가 앞머리 끝에 맺혀 있다가 톡 떨어졌다. 뿌옇게 보이는 그것을 바라보던 소티스가 작게 물었다.

“유언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던 걸까요? 왜 레먼 님과 알베스 님께는 전해 주지 않으신 걸까요?”

“어쩌면 엘디카 님의 뒤를 이을 규율을 기다리셨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를 기다리셨다고요…….”

“저도 아니고, 알베스 님도 아니며 그분을 사랑했던 하나뿐인 딸도 아니었으니 남은 선택지는 소티스 님뿐이에요.”

잠시 멎어 있던 레먼의 손이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그가 발라 주었던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향유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테스타멘 님께는 안식이 필요해요. 그분의 상태는…… 농담으로라도 살아 있다고 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지만 만일 그분이 소티스 님께 유언을 건네고 나면 정말로 돌아가시게 되는 것일 테니…….”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가 소티스의 이마에 입 맞추며 위로하듯이 말했다.

“퀘렐라가 당신을 미워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갑자기 퀘렐라 님의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건가요?”

“퀘렐라가 그분의 딸이에요.”

“아.”

소티스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던 검은 눈동자와, 그 앞을 어른거리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던 숙모의 실패를 증명하면서도 그 숙명을 빼앗고, 첫사랑의 연인이 되었으며, 이제는 오래도록 시들어 가던 아버지에게 죽음마저 선사할 이.

자신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다지도 많으니, 어찌 좋아할 수 있을까.

“가엾네요. 미안하기도 하고. 제가 뭔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 녀석은 약하지 않아요.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겁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만요.”

소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벌의 옷을 왕성에 두고 온 탓에 엘디카의 옷을 입었는데, 조금 헐렁해도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레먼은 그 옷을 입은 소티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머리를 감겨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손발에 부드러운 크림을 발라 주고, 옷 입는 일까지 도와주는 등 잔시중을 들어주는데도 레먼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그녀의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 내렸을 때는 콧노래마저 흥얼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정작 그녀를 돕느라 레먼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셔츠에는 군데군데 물이 튀어 있었다.

“당신도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레먼.”

소티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럴게요. 소티스 님만 응접실에 모셔다드리고요.”

“아이도 아니고, 그 정도는 혼자서 갈 수 있거든요.”

그는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을 가져다 손가락에 낱낱이 입을 맞추었다.

“제가 해 주고 싶은데, 안 될까요?”

“…….”

“네?”

살짝 처진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간절하게 응시했다.

이렇게 보니까 꼭 강아지 같기도 하고…….

“알겠어요.”

결국 못 이긴 척 그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레먼은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소티스는 복잡한 생각 같은 건 내려 두고 다시 그의 손을 잡은 채 발을 옮겼다.

“아주 그냥…….”

물론, 두 사람이 그렇게 들어오는 모습을 본 알베스는 혀를 쯧쯧 찼다. 알베스의 갈색 눈동자가 레먼의 셔츠에 묻은 물 자국을 향했다.

“팔불출 같으니.”

“자료는 좀 보셨습니까?”

“그래. 쓸 만한 내용을 읽어 두었다.”

레먼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소티스에게 속삭였다.

“스승님의 속독은 베아툼 제일이거든요. 아마 지금쯤 저 자료를 거의 다 읽으셨을 겁니다.”

“늙은이를 부려 먹는 방법도 가지각색이구나. 못난 제자 놈 같으니라고.”

알베스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와라. 그 꼴로 내 탑에 갈 테냐?”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10분 주마.”

“……스승님!”

원망하듯 외치면서도 레먼은 재빨리 사라졌다. 거의 달리는 듯 걸음이 바빴다.

소티스는 작게 웃으며 알베스의 건너편에 앉았다.

“테스타멘 님을 뵈러 간다고 들었어요.”

“그래, 들었구나. 테스타멘…… 나와 의형제의 연을 맺었던 녀석이었지. 그는 내가 엘디카와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을 알고, 퀘렐라의 대부가 되어 달라 부탁하기도 했다.”

알베스는 책으로 얼굴을 덮은 채 이어 말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테스타멘이 바싹바싹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도 그를 도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때쯤의 나는 운명을 저주했단다. 신이 정말로 있다면, 왜 테스타멘과 퀘렐라 부녀에게 이렇게 가혹한 운명을 내려 주었을까. 미워서 견딜 수 없었지.”

아버지인 테스타멘의 이름은 ‘유언’, 그리고 딸은 ‘원망’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소티스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스 님과 레먼 님의 이름에도 뜻이 있나요?”

“아니, 없다. 고대어로 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

“…….”

“퀘렐라, 그 녀석은 또 너를 원망하겠지. 그래도…… 테스타멘은 고통스러운 세월을 너무 오래 견뎠어. 나는 이제 그가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

모든 삶이 단지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은 거겠지.

소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읽은 자료들 말이다. 네게 주기는 하겠지만, 엘디카의 수기를 빼고는 다 읽어 보았다. 그건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으니 네가 읽어 주려무나.”

이 비극으로부터 네가 가장 멀리 서 있지 않냐며 묻는 목소리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티스는 알베스의 얼굴을 덮고 있던 책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그렇게 할게요. 다른 책들도 다 읽어 보겠지만, 저는 알베스 님처럼 속독하는 데는 재주가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중요한 내용을 알려 주시겠어요?”

“혼돈은…….”

알베스가 몸을 고쳐 앉았다. 그는 잿빛 머리카락을 벅벅 긁듯이 헝클어뜨렸다가 정리하고,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대대로 세계의 경계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 엘디카와 싸웠던 혼돈은 붉은 머리의 여자였어. 젊고, 가난했고, 악에 받쳐 있었지. 그 여자는 아비를 모르는 아이를 품고 있었어.”

“…….”

“사람들은 혼돈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혼돈은 그녀의 세계에 찾아든 모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지. 그래서 스스로 가장 악독한 악령술사가 되었어. 혼돈의 재림을 꿈꾸던 악령술사들이 어떻게 혼돈과 접촉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금지된 마법을 익혀 나갔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더구나.”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 사람이 혼돈이 아니라, 그냥 불행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네요?”

“그래.”

알베스가 근처에 있던 두꺼운 책 한 권을 들어 보였다. 그 책은 어찌나 펼쳐 보았는지 모서리가 뭉툭하게 닳아 있었고, 군데군데 해진 나머지 잘못 펼치면 그대로 쪼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엘디카가 마지막까지 연구하던 마법 기록이다. 기억 마법을 연구했었더구나. 너와 의견이 같았던 모양이다. 인간이 불행을 먹고 자라 혼돈이 되었으니…… 혼돈에게 깃들었던 모든 불행한 기억을 없애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걸 실패한 건가요?”

“마법은 완벽했어. 베아툼에 있는 어떤 서책보다도 더욱 완벽하게, 정교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아마 전하께 가져간다면 정말 깜짝 놀라실 테지. 조영 마법은 기억 마법에 뿌리를 둔 마법이니까.”

“마법이 완벽하다면 실패할 수 없을 텐데요…….”

“혼돈이 저항했겠지.”

그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사람의 정신에 직접 침투하는 마법은, 당사자가 저항할 경우 그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혼돈은 자신의 불행한 기억을 지우지 않길 바랐어. 왜였을까? 본인의 삶이 불행 그 자체였다면, 그걸 지우고 행복해지는 것이 낫지 않나?”

소티스는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한평생 불행한 사람에게 그 기억을 제거해 주겠다며 손을 뻗었을 때, 거절한다면 이유가 있을까?

그리 애쓰지 않아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피니에 로즈우드. 자신이 그녀를 막 구했을 때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불행 그 자체였다. 광채 없이 죽어 있던 녹색 눈동자는 분노나 증오마저도 품지 못하고 한없이 시든 채였고, 팔을 잡아 이끌어도 인형처럼 끌려오기만 했었다.

그런 핀에게 자신이 그때의 기억을 지워 주겠다고 하면, 수락할까?

아니. 거절할 것이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왜? 모든 삶이 불행했는데도?”

“모든 삶이 불행했으니까요.”

소티스가 짧게 탄식하며 가슴께에 손을 얹어 보았다. 어쩐지 그 혼돈의 아픔이 제게 전해지는 듯, 심장 언저리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에게 불행을 앗아 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잖아요.”

“…….”

“불행한 순간을 지워 주겠다는 건, 그저 제안하는 사람의 오만에 불과했을지도 몰라요……. 정말 불행한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면,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을 부정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믿고 함께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야 했어요.”

혼돈에게 필요한 것은 망각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엘디카는 혼돈의 반발을 샀을 뿐이었다. 혼돈으로서는 기억을 없애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겠지.

엘디카는 현명하고 자비로웠으나 불행을 이해하지 못했다. 혼돈을 선도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았기에, 그 시혜적인 비정함이 실패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 거였어.”

알베스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런 거였어…….”

그의 감탄 어린 시선이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이 놀라운 여인은, 자신이 겪지도 않았던 불행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마는구나.

새삼스럽게 그녀가 이번 대의 규율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이 작은 규율이, 마지막 규율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알베스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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