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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6)화 (87/121)

86화. 엘디카의 유산 (2)

날이 밝자, 소티스는 레먼을 도와 페리윙클 탑의 물건들을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도, 엘디카가 얼마나 위대한 마법사였는지 실감했다.

엘디카는 ‘규율’이라는 한 단어로 정돈하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삶을 살았다. 그녀가 쓴 책을 모아서 꽂으니 작은 서고 하나를 꽉 채울 만큼이었고, 구상 중인 마법 주문과 물품들이 창고에 넘쳐났다.

“도움이 될 만한 게 너무 많아서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마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법이나 마법학의 기초는 물론이고, 상충하는 속성의 마법을 응용하는 방법, 마법의 역사에서 비롯된 금기와 저주,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마법의 창조…….

새삼 두 사람이 왜 며칠씩 틀어박혀 있었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이었다.

“스승님께서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셨거든요. ‘규율’이 되신 이후로는,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더욱 그랬어요. 무언가 거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이셨지요.”

레먼은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그 광채가…… 미래를 전소해서 내는 빛이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좀 더 돌아봐 달라고 어리광이라도 부려 봤을까요?”

소티스는 그저 가만히 웃으며 레먼을 볼 뿐이었다.

이 미래를 안 채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엘디카를 사랑했던 만큼 그녀의 학식과 열정을 사랑했을 테니까.

그리고 엘디카의 긍지가 누군가의 말 몇 마디로 사그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소티스 님께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따로 빼 두었어요. 엘디카 님께서는 혼돈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도 노력하셨는데, 그 덕분에 역대 혼돈들의 특징이나 악령술사들이 숭배했다던 것들에 대해서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이 많은 자료를 다 보셨나요?”

“대략적인 것들만요.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추억과 그리움으로 이따금 더뎌지는 손길을 제외하고서라도, 엘디카의 유산을 정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티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혼돈에 관련된 자료 중, 중요한 것들은 정리되어 있어서 소티스 님께 드릴 것을 따로 챙기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그건…….”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엘디카 님이 실패를 염두에 두셨다는 말씀이신가요?”

“…….”

레먼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어쩌면 스승님께서 필사적이셨던 이유도, 혼돈과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다음 대의 규율에게 더 많은 것을 물려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이 끝마치지 못한 과업을 물려준 것에 대한 대가였을까? 소티스는 레먼에게서 받아 든 책을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베아툼의 어떤 마법사도 칭송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는 이름의 소유자. 당대의 가장 위대하고 용감한 규율.

소티스는 홀린 듯, 가장 위에 있는 책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엘디카가 제게 남기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나는 내 다음 규율이 불행하기를 바란다.」

우뚝 굳은 소티스의 곁으로 레먼이 다가와, 스승의 필적을 눈으로 살폈다.

「이런 나의 뜻이 비정한가? 하지만 후대여. 당신이 혼돈을 만나는 날이 온다면, 나의 실패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게 되리라.」

기록을 살피던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 생각이 맞았던 것 같아요, 레먼.”

“그래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 대 규율이 불행해지는 것과, 엘디카 님의 실패가 무슨 상관일까요?”

그때, 소티스는 핀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거 아세요? 불행이 자라면 혼돈이 돼요.”

“…….”

“혼돈은 불행을 낳죠. 그리고 그 불행은 자라서 혼돈이 되고요.”

또한, 자신이 각성했을 때 엘디카가 해 주었던 말 역시 떠올랐다.

“붉은 머리의 혼돈이 제게 말했었어요. 이 오래된 싸움을 끝내고 싶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굴복할 방법을 찾으라고요.”

엘디카는 불행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니 혼돈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을 진정한 의미로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소티스가 자신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불행해 본 사람만이 불행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소티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엘디카 님은 고귀한 분이셨겠지요?”

“네, 선대 페리윙클 마탑주의 외동딸이셨고, 그 당신께서도 유일무이한 영혼 마법의 계승자이시자 페리윙클 탑의 주인이 되셨지요. 때때로 전하께서도 엘디카 님께 조언을 구하실 정도였으니, 풍족하고 박식한 삶을 살아오셨음은 분명합니다.”

소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디카가 혼돈을, 그리고 불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행은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그리고 비정하고 서글픈 곳에서 태어나니까.

“걱정이에요.”

책을 덮은 소티스가 응접실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제 삶에도 그저 한정적인 슬픔만이 지나갔을 뿐이라, 제가 혼돈을 이해하고 그들이 세상을 위해 사라질 방법을 잘 찾아낼 수 있을지…….”

레먼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소티스 님께서는 다정하시니까요. 분명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알베스가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그는 어제부터 ‘간호’를 다녀왔다고 했다. 소티스가 누굴 간호했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들린 자료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알베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막상 직접 정리하면서도 엄두가 안 났던 것이, 그래도 너를 보니 결심이 서는 듯하구나.”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그가 덧붙였다.

“소티스.”

“네, 알베스 님.”

“네게 보여 줄 것이 있다. 그건 적당히 옆에 두고, 알베스 마탑에 다녀오자꾸나.”

“스승님! 설마…….”

알베스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운명의 주인이 소티스인 것 같다. 그래, 소티스. 너를 기다리는 것 같더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녀는 두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베스 마탑에, 주인인 그를 제외한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일까? 간호가 필요하다면 아프다는 뜻인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왜 자신을 기다리는 걸까?

소티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제안을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채비를 좀 하고 싶어요.”

“그래, 그러려무나. 난 이 자료들을 좀 읽고 있으마. 괜찮지?”

“그럼요.”

자세를 고쳐 앉은 알베스가 엘디카의 기록 더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사이로 언뜻 드러난 노쇠한 얼굴에는 그리움, 자부심, 슬픔,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사랑…… 그 모든 복잡한 감정이 얼룩져 있었다.

소티스는 그에게 인사하는 대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자리를 비켜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도와드릴까요?”

레먼이 별안간 그렇게 묻기에, 소티스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탑의 구조도 잘 모르고, 애나도 함께 오지 않았으니 레먼의 도움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네, 레먼.”

***

“이런 의미로 도와 달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아하하.”

레먼은 무안한 듯 미소 지으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쯤은 꼭 이렇게 해 보고 싶었다는 듯, 호박색 눈동자를 의욕적으로 빛내고 있기까지 했다.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한 번쯤은 허락해 줄까.

결국 소티스가 고개를 조심히 끄덕이자,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물은 따뜻한가요?”

“네에.”

욕조에 가득한 물에서는 뽀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소티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투명한 물의 표면에는 몇 송이의 페리윙클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넘실거리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접어 팔꿈치까지 올려붙인 레먼은 머리를 등 뒤에서 하나로 내려 묶고, 이내 따뜻한 물에 적신 손으로 소티스의 머리카락을 빗겨 내리기 시작했다.

도와주고 싶다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설마 머리를 감겨 주겠다는 말인 줄은…….

소티스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당신이 제 시중을 들어줄 필요는 없어요, 레먼.”

레먼이 선선히 웃으며 소티스의 보랏빛 머리카락에 입술을 눌렀다.

“좋아하는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것이 이상한가요?”

“그건 아니지만…….”

소티스의 고개가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이내 숨을 참고 얼굴 절반을 맑은 물에 집어넣은 그녀가 보글보글, 공기 방울을 뱉어 냈다.

태어나서 이런 대우를 받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레먼과 꼬박 한 계절을 함께 지냈는데도, 여전히 그의 다정한 시선이나 말 앞에서 낯설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 다정함이 듬뿍 묻어나는 시선, 게다가 다정하고 조곤조곤한 말투까지.

소티스는 어쩐지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뺨과 귀가 붉어진 것을 본 레먼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편히 계세요, 소티스 님. 그래도 머리카락만 감겨 드리는 거잖아요.”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아예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 그, 그럼 뭘 더 하시려고요!”

“……뭘 상상하신 거예요?”

“그…….”

결국 소티스가 빽 소리쳤다.

“그럴 수도 있죠!”

“하하, 푸훗, 아하하. 압니다. 네, 그럴 수도 있죠.”

“레먼…….”

“이렇게 보면 어떻게 저를 그렇게 침실로 이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그땐 그냥 분위기를 타서…….”

“충동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요?”

그녀가 고개를 다급하게 뒤로 돌렸다. 머리카락에 묻은 비누 거품을 꼼꼼하게 씻어 내리던 레먼이 고개를 기울였다.

충동일 리가 없다. 그를 향한 마음은,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심은 그저 한순간만 반짝 빛났다가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부끄럽긴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그 진심은 언제나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소티스가 물에 젖은 손으로 레먼의 옷자락을 쥐어 당겼다.

“분위기 덕에 용기를 내긴 했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저도 그래요.”

레먼이 고개를 기울여 소티스의 따뜻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나저나, 소티스 님. 부끄러우시다고 웅크리고 계신 것 아니었…….”

욕실에 물 튀는 소리, 작은 비명 소리에 이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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