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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5)화 (86/121)

85화. 엘디카의 유산 (1)

소티스는 언젠가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이 훤히 보일 만큼 너른 벌판이었다. 밤하늘에는 온화한 주홍빛 달이 떠올라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웃자란 풀들이 한쪽으로 넘어지며 파도처럼 출렁였다.

꿈에서는 나비가 되어 이곳을 보았다면, 이제는 현실 속에서 직접 이곳을 보고 있다.

자정에 가까울 무렵인데도 페리윙클 마탑의 주변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완연한 여름이 싣고 온 꽃향기에 코를 찡긋거리던 소티스는 고개를 들어 탑을 올려다보았다.

저곳에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한달음에 달려왔는데도 이제 와 머뭇거리는 이유는, 그가 자신만큼 저를 반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소하고도 이기적인 걱정 때문이리라.

“여기서 조금만 기다릴까.”

꽃밭에 적당히 자리 잡고 앉은 소티스는 줄지어 핀 꽃과 그들을 향해 날아드는 나비, 그리고 기울어가는 별과 달을 살피며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그러다 언제 잠들었을까.

페리윙클 사이에 파묻혀 잠든 소티스에게 조그만 나비들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먼발치에서 소심하게 기웃거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내 용기가 생긴 듯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이마나 머리카락에 내려앉아 보기도 했다.

[이번 규율은 좀 어린 것 같은데.]

[좀 약해 보이지? 걱정이야.]

[모르는 소리. 마법사는 겉만 봐서는 모르는 거야. 엘디카는 뭐, 덩치가 컸나? 하지만 모두가 기대했잖아. 엘디카의 손에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날 거라고.]

[그래. 이번 규율은 어리기도 어리고, 마법도 뒤늦게 발현되었다면서.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나비들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처럼 가볍고 흐릿하게 울리던 소리에서 익숙한 단어를 들은 소티스가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엘디카 님을 아세요?”

[너, 우리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알지, 알다마다. 우리는 이 마탑의 나이 든 수호령들이란다. 우리의 다정한 마탑주가 어렸을 때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도 보았지.]

그때까지만 해도 소티스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품 안의 책을 끌어안으며 잠꼬대하는 말투로 대답했다.

“레먼 님은 좋은 분이에요.”

[그래. 썩 좋은 청년이지.]

[그래서 우리는 너희에게 기대하고 있단다.]

[너희가 이 베아툼의 악습을 끝낼 수 있을까?]

소티스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끝낼 거예요.”

세상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은 그리 상충하지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분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작은 규율이여, 너는 다정하구나.]

[어쩌면 이 세상이 기다리는 힘이라는 게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지…….]

그 뒤로도 몇 마디의 말이 이어졌으나, 소티스는 듣지 못했다. 그대로 까무룩 잠들어 버렸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따스한 공기에 둘러싸여 잠들어 있던 소티스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도, 어깨를 잡고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손을 잡고, 제 온기를 건넬 뿐이었다.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그녀가 눈을 뜨자, 달빛을 머금은 호박빛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가득한 그 시선을 보는 순간, 소티스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마탑에 올라가기를 망설였는지 잊고 말았다.

레먼이 자신의 연인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왜 여기 계셨어요? 올라오시지 않고.”

“그냥요. 왠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어요.”

그게 자신을 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가만히 웃어 보였다.

“거의 다 끝나 갑니다.”

“괜찮아요?”

“그럼요.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어요. 용기를 내는 게 어려웠는데, 막상 하다 보니 마음이 후련하네요.”

“…….”

“슬픔에 너무 오래 얽매여 있었어요.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지요. 엘디카 님의 기록들은 정리해서 필요한 것은 참고하고, 남은 것은 왕실 마법학자들에게 보낼 생각입니다.”

선생님께서 좋아하시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소티스가 레먼의 어깨를 쥐어 끌어당겼다. 순순히 따라온 레먼은 여전히 꽃밭에 누워 있는 그녀의 콧잔등에 입술을 눌렀다.

“소티스 님께 페리윙클 향이 나요.”

그녀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생각을 하다가 잠들어서 그런가 봐요.”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당신이니까 가능한 거예요.”

레먼은 마침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다며 맞잡은 손을 부드럽게 당겼다.

소티스는 홀린 듯 그의 뒷모습을 따라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낯선 동화책 속 세상에 방문하는 소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마탑의 주인답게 친절한 태도로 소티스에게 이곳을 안내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응접실, 손님용 방, 큼직한 창문이 돋보이는 작은 휴게실과 마법으로 따뜻함이 유지되는 커다란 욕탕이 이어졌다.

자신이 갈 만한 곳은 다 둘러보았구나, 하고 생각하던 순간 레먼이 그녀의 손을 다시금 당겼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조금 숨이 찰 때까지 계단을 올랐다. 몇 개의 방을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아마도 레먼의 개인적인 장소로 가는 거겠지. 소티스는 긴장을 달래기 위해 그의 손을 꽉 쥐었다.

그가 낮게 웃으며 작은 방으로 소티스를 이끌었다.

“…….”

아늑하고 포근해 보이는 곳이었다. 공기마저도 옅은 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추억을 떠올릴 때면 한 겹쯤 덧씌워지는 얇은 막 같은 것이 방 전체를 둘러싼 것 같았다.

“제게 소중한 것을 모아 두는 곳입니다.”

“따뜻해 보여요.”

성큼 앞서 나간 레먼이 선반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참나무로 짠 상자는 소박하고 낡아 보였지만, 평소에도 관리를 잘해 둔 듯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열어 보시겠어요? 제가 이 방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소티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망토를 고정하는 데 쓰는 브로치였다. 수십 개의 황금 잎사귀가 맑은 에메랄드를 감싸는 형태로, 귀족가의 영애들이 쓸 법한 사치품이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황태자비 시절에 쓰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길에서 고생하던 레먼에게 여행 경비로 사용하라며 베푼 것이기도 했다.

“되찾았다고 하셨지요…….”

“그때는 이걸 가지고 있어도 은인을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하고 조금쯤 의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레먼의 큼직한 손이 소티스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렇게 만났네요. 제게 이 브로치보다 더 소중한 게 생기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브로치를 돌려주자 그는 소티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들리자 그녀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레먼의 목을 끌어안았다.

“저를 침실로 데려다주시려고요?”

“제 방으로 가는 길입니다.”

“……네?”

“하하, 아하하. 농담입니다.”

소티스가 그의 어깨를 짚은 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요.”

“…….”

“……당신 침실.”

“소티스 님.”

레먼의 헝클어진 목소리가 목을 긁어내듯이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그렇게…….”

“알아요.”

그녀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지는데…… 설마 모르고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소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안은 레먼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실렸다.

“안 놔 드릴 겁니다.”

“좋아요.”

“내일 아침까지 함께 있는 거예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제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에요.”

그녀가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그래서, 싫어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

레먼은 아침이 되도록 잠을 청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으음.”

잠긴 목소리와 함께 곁에 웅크려 누운 여인이 뒤척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소티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당신도 조금 자요…….”

조그맣게 울리는 목소리에 레먼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 맞추었다.

“그럴게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더 주무세요.”

소티스는 그의 품을 파고든 뒤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 신기한 일이다. 한숨도 자지 않았는데 밤새 꿈을 꾼 것만 같다.

“좋아해요, 소티스 님.”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몇 번 더 읊조려 보았다. 좋아한다는 말에 담긴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기분이 마냥 기꺼웠다.

소티스 메리골드. 그의 세계에서 가장 따뜻하고 강한 여인.

레먼은 그녀가 오랜 냉대를 견디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토록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는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티스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엘디카의 유산을 정리하며 그녀를 생각했다. 너무 오래도록 덮어 두었던 과거에 매몰되지 않게, 그녀가 그를 잡아 주었다.

“레먼, 나는 네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구나.”

“……스승님, 모든 것을 잃은 제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떠난 이들일랑 그대로 놓아주고, 남겨진 이는 남겨진 이의 삶을 살아야 하거늘.”

엘디카가 울 듯이 웃으며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내 미진한 막내 제자야. 너는 언제쯤 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까.”

레먼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스승님.”

이제는 그 자유가 무엇인지 알았다. 깨달았고, 누리고 싶었다.

그렇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소티스였다.

그녀는 알까. 자신의 온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하는지. 얼마나 많은 마음을 까마득한 늪에서 건져 올리는지.

그건, 장담하건대 소티스 메리골드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다정한 구원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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