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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4)화 (85/121)

84화. 페리윙클이 피는 땅 (4)

베아툼에서의 며칠이 정신없이 흘렀다.

약 나흘간 소티스는 레먼을 세 번도 보지 못했다. 그것도 그녀가 일부러 페리윙클 마탑까지 가지 않았다면 한 번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먼과 알베스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두 사람은 엘디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페리윙클 마탑의 도서관을 뒤지고 엘디카의 수기를 정리해야 했다.

“언젠가는 하셔야 했을 일입니다.”

소티스가 남쪽으로 난 창을 하염없이 바라보자, 그녀의 마법학 선생이 깐깐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을 들키고 말아, 그녀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죄송해요. 이제 집중할 수 있어요.”

왕실 마법사들의 기초 교육을 도와주는 선생은 소티스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평생 베아툼을 위해 봉사하던 이가 별안간 외국인을, 그것도 자국의 숙명을 가져가 버린 귀족을 도맡게 되었으니 못마땅한 것도 당연했다.

자신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소티스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이 자꾸 페리윙클 마탑으로 날아가는 것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선생은 잔소리하는 대신 책을 눈짓하며 제안했다.

“조금 쉬었다 하지요.”

“감사합니다.”

짧은 정적 후에 선생이 말했다.

“엘디카 님은 ‘규율’이시기 전에, 위대한 마법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왕성의 마법사 중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삶이란 얼마나 대단한 걸까. 그녀로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이 안경을 고쳐 쓰며 이어 말했다.

“그런 분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왕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뿐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연구하시던 기록이나 일지는…….”

“페리윙클 탑에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엘디카가 살아 있었다면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 되었을 거라는 설명을 짧게 덧붙였다. 당시의 레먼은 너무 어렸고, 따라서 아무도 그가 차기 마탑주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면서.

“불행한 사고로 영혼 마법사들이 죽고 난 뒤, 사람들은 페리윙클 마탑이 저주받아 버린 거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혹은 레먼 님께서 음모를 꾸몄다고 믿은 이들도 있었지요. 사고를 위장해서 동료 마법사들을 죽이면, 마탑주가 되실 수 있을 테니까…….”

“레먼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선생의 얼굴에 회의적인 미소가 어렸다.

“물론 그랬지요. 다만, 그때는 누구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혼돈과 악령술사들이 죽인 이들을 수습해 날마다 장례식을 치러야 했거든요.”

“…….”

“그로부터 3년간, 레먼 님은 탑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엘디카 님의 유산 역시 정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셨지요. 언제 사라지셔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소티스가 한 번도 제대로 들어 보지 못한 레먼의 아픈 과거였다. 그저 혼돈과의 싸움으로 소중한 이들을 잃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세상을 등질 만큼 좌절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 몰랐을까. 날 때부터 강한 이가 얼마나 있다고.

지금의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기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가늠하던 소티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엘디카 님의 연구 기록이 절실하지만, 그것을 하루빨리 내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은 왕실이 보인 속죄이자 후대 페리윙클 마탑주에 대한 존중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감히 다시 한번 혼돈과 싸워 달라고 청하지 못했다. 레먼 역시 먼저 나서서 약속하지 않았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잃은 베아툼은 ‘혼돈’이라는 이름을 애써 덮어 두었다. 잊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으니까.

상황을 대강 전해 들은 소티스가 미안하다는 듯이 살짝 웃어 보였다.

“제가 짊어진 운명은 베아툼이 그토록 기다리던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네요.”

규율은 대대로 그들의 고국을 수호하던 지고한 마법사이자, 혼돈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동시에 혼돈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음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글자 그대로 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사람의 영혼을 좀먹고 혼돈에 빠뜨리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러니 새로운 규율께서는 다른 이들의 반응에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각각 오래된 역사에 얽힌 감정이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소티스가 선뜻 대답했다.

“그래도 베아툼에서는 제가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거두어 도와주셨지요. 또한 베아툼이 아닌 멘데즈에서 혼돈이 부활한 사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요. 그 덕분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저는 선생님께 이렇게 귀중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평온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에 서린 진심을 스스로 알아보게끔 했다.

선생은 허탈한 듯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소티스 님, 당신은 제 생각과는 사뭇 다른 분이시군요.”

처음에는 그녀가 못마땅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한 나라의 황후이자 지체 높은 공작 가문의 딸이라니, 제 고국에서 귀하게 대접받으며 살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만나 본 소티스 메리골드는 소탈하고 겸손했다. 그간 품고 있던 편견이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이었다. 배우는 것이 빨랐고 생각이 깊기까지 해서, 가르치는 입장으로서는 더없이 완벽한 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는 실망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입장이 다르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그 현실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묵묵히 해낼 뿐이었다.

소티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 고국에 비하면 이곳의 반응은 따뜻한 편에 속한답니다.”

선생이 조금 아연해져서 물었다.

“당신은 일국의 황후였는데도요?”

멘데즈의 치부를 자세히 떠벌릴 수도 없으니 자연히 미소만이 돌아왔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선생은 소티스가 더는 사담을 이어 나갈 의향이 없음을 파악했다. 베아툼의 역사를 더 이야기하자니 레먼의 과거를 파헤치는 느낌이었고, 소티스에 대해 이야기하자니 멘데즈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주고받을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제가 드린 서류까지만 보시면 마법에 대한 기초 이론은 다 익히시는 셈이 됩니다. 그릇이 약해 불안정하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인 운용법도 아시는 듯하고요.”

“다행이네요.”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대마법사님들께서 바쁜 일을 마치실 때까지만 제가 마법을 좀 더 가르쳐 드릴까 합니다만…….”

선생은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특별히 더 배우고 싶으신 분야가 있습니까? 이론이라면 무엇이든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소티스가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무엇이든요. 역대 규율들께서 익히셨던 마법은 무엇이든 좋아요. 저는 너무 늦게나마 이 길 위에 섰고,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 간극을 어떻게든 노력해 메우고 싶어요.”

그녀의 물빛 눈동자는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티스가 이 일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눈빛만으로도 누구든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이었다.

“좋습니다.”

선생이 안경을 고쳐 썼다.

제자가 이렇게 열심인데, 자신이 본분에 충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저는 위대한 규율들의 흔적을 좇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지요. 이따금 왜 그렇게까지 그분들의 뒤를 따라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우습게도 당신을 보니,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달려온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새로운 규율이여, 당신이 이 오래된 싸움을 끝낼 수 있도록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바라던 바예요.”

이윽고 선생은 역대 대마법사들과, ‘규율’로 발탁되었던 이들의 기록과 자료를 가져왔다. 산처럼 쌓인 책과 서류를 옮기는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는 연신 즐거운 표정이었다.

***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유를 얻은 소티스는 선생이 준 책 몇 권을 품에 소중하게 안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몇 번쯤 갔던 길이라고 처음처럼 헤매지는 않았다. 소티스는 새하얀 포석을 밟으며 앞으로 부지런히 나아갔다.

이내 창백한 백색을 띠던 포석의 색이 파르스름해지더니, 밤하늘 같은 푸른색을 띤 것들로 대체되었다. 페리윙클 탑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잠들었을까. 지금 가면 그를 잠시라도 볼 수 있을까.

보고 싶다.

소티스는 제 안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선명하게 살아 숨 쉬는 감정을 느꼈다. 그를 생각할 때면 심장이 빨리 뛰고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답지 않게 조급하게 굴거나 멋대로 들뜨기도 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내게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변화인지, 당신은 알까.

당신을 사랑한 뒤로 내 삶이 얼마나 생기로 가득한지, 당신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레먼.”

새벽하늘을 모아 빚은 듯한 색의 마탑이 소티스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아래로는 너른 꽃밭이 펼쳐져 있었고, 포석이 깔리지 않은 곳에는 수백 수천 송이의 연보랏빛 꽃이 피어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페리윙클이 피는 땅. 그를 ‘레먼 페리윙클’로 만든, 그의 터전. 그가 사랑하는 것을 얻고 잃은 높디높은 탑.

소티스는 제 앞에 펼쳐진 모든 전경을 뇌리에 꼼꼼히 아로새겼다.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페리윙클. 꽃말은, ‘행복한 추억’이에요.”

그와의 대화를 가만히 떠올려 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탑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의 추억이 여기에 있어요.”

당신의 지난 삶이 모두 불행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어요.

“그러니까, 무너지지 말고.”

그 과거를 이겨 내고, 애도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뒤.

그리고 내게 돌아와요.

우리는 서로의 곁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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