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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3)화 (84/121)

83화. 페리윙클이 피는 땅 (3)

베아툼 왕성은 소티스가 막연히 상상하던 어떤 것과도 다른 정경을 품고 있었다.

성도에 들어서자 발을 디디는 곳마다 새하얗고 얇은 포석이 깔려 있었고, 흰 예복을 입은 마법사들이 경건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다가 일행을 발견하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물그릇을 들고 다니며 주문을 외우는 왕실 마법사들과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빛을 뿜어내는 작은 장식물들은 기이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근위병이 없네요.”

소티스의 감탄에 알베스가 짧게 웃었다.

“필요가 없으니까.”

확실히 그랬다. 그들에게는 검과 방패보다 마법이 훨씬 더 유용할 터였다.

실제로 근위병을 대신하는 듯한 마법사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용하는 무기가 다를 뿐, 잘 벼려져 단단하고 날카로운 표정만큼은 같았다.

알현실로 걸어가는 내내 감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길게 이어진 회랑을 따라 걸어가면 양쪽으로 상아색의 원형 기둥이 수없이 세워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그저 화려하게 장식된 구조물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 전부 다른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부유한 나라인 멘데즈 황국에서 나고 자란 소티스도 이만큼 섬세한 조각을 본 적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잊고 그림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베아툼의 자랑이지요.”

레먼이 빙그레 웃었다.

“왕국의 역사를 빛낸 마법사들이 이 기둥에 새겨집니다. 마법사들에게는 둘도 없는 명예이기도 하고요.”

“그렇겠네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곳저곳 둘러보는 소티스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 까닭에, 일행은 소티스를 재촉하는 대신 나란히 서서 회랑의 기둥들을 함께 살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엘디카를 기리는 날도 오겠지.”

알베스의 주름진 손이 조각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매끈하고 차가운 기둥을 가늠하듯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이제 가자. 전하께서 기다리시겠다.”

“네.”

알현실은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다. 백색과 청색의 실을 얽어 복잡한 문양을 낸 태피스트리가 벽에 걸려 있었고, 왕은 그것을 등진 채 반듯하게 서 있었다.

깊은 사색에 잠긴 남자는 이제 겨우 마흔을 넘겼을까 싶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는 일행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새하얀 옷과 창백한 혈색 탓에 회랑 기둥들의 조각을 떼어서 옮겨 둔 것 같은 인상이 묻어났다.

“전하께서는 조영 마법을 쓰십니다.”

레먼이 작게 속삭였다.

“전하의 질문은 대답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 보시고 답하십시오.”

“……네.”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속삭이는 음성이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소티스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미동 없이 서 있는 왕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열 걸음을 남겼을 때, 얇은 입술이 열렸다.

“새로운 규율이 태어났군. 흔한 일은 아니야.”

왕의 목소리는 투명하리만치 옅게 울렸다.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를 스쳐 둥근 천장으로 솟아 휘도는 것만 같아서, 소티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턱을 당겼다.

“그대가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인가?”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제 고국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마법사의 길을 걷게 된다면, 저는 더 이상 공녀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저 소티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왕이 눈을 천천히 떴다. 새파란 눈동자에 소티스의 모습이 담겼다.

“나는 그대를 직접 살펴보고자 한다. 가능하겠나?”

소티스가 머뭇거리다가 되물었다.

“제 무엇을 보여 드리면 될까요, 전하?”

왕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커다랗고 투명한 수조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기에, 소티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수조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대의 자질, 그리고 더 나아가 그대의 본질을 보고자 한다.”

알베스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전하께서는 네가 규율의 숙명을 받드는 일이 복이 될지, 혹은 독이 될지 알고자 하신다. 과거를 살피기 위함이니, 수조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넣어 보거라.”

소티스는 조금 복잡한 시선으로 고요한 수조를 바라보았다. 과거를 고스란히 드러내자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지난날일 뿐이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나서서 수조의 표면에 손을 조심스레 대어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

수조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것은 소티스의 손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내내 잠잠했던 물이 천천히 일렁이며 보글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곧 그 자체가 거울이 된 것처럼 어떤 풍경을 고스란히 비춰 주었다.

소티스가 정원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제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고요한 슬픔에 잠긴 자신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려 보였는데, 옷차림을 보니 황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 듯했다.

수조 속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석양이 지고, 여명이 떠오르고, 바람이 불거나 눈이 송이송이 날렸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어떤 말도 없이, 그곳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수조 속의 자신이 일어났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휘날리더니, 이내 그 모습이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티스는 새삼 조영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했다. 그건 단순히 한 사람이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 주는 능력이 아니었다. 과거가 모여 어떤 방식으로 한 사람을 빚어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추상적이고 모호했지만, 대단히 본능적인 마법이기도 했다.

이제 수조 속에는 꽃이 만개한 한낮의 정원만이 남았다. 붉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푸르고 작은 꽃잎 위에 내려앉아 고단한 날개를 접었다. 그대로 꽃잎을 움켜쥔 채 고요히 숨진 듯했다.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페리윙클이었다. 때에 따라 푸르게, 그리고 보랏빛으로도 보이는 소담하고 따뜻한 꽃.

“그대의 세계는 작았구나.”

수조에 떠오른 장소는 소티스가 늘 머무르고 가꾸던 황후궁의 정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왕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수조를 향해 손짓했다. 창백한 손끝이 물속에 풀어 둔 얇은 천처럼 우아하고 느리게 움직였다.

“천 년을 사는 고목도 태초에는 아주 작은 씨앗 속에서 꿈을 꾸었지. 세계가 작은 것은 흠이 되지 않는다.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가 중요할 뿐이지.”

곧 물이 투명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마법이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러나 수조의 한가운데에 검은 점 하나가 생겨났고, 점점 커져 가며 조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렸다.

검은 덩어리는 마침내 사람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에서 둘로, 넷으로, 그리고 여덟으로 늘어나며 점점 그 수를 늘렸다.

검은 그림자들이 소티스를 굽어보자 그녀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손을 빼낼 수는 없었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왕이 물었다.

“그들의 적의를 원망하는가?”

추상적인 질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그녀는 신기하게도 그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드먼드, 메리골드 공작, 셰릴, 핀, 그리고…….

“아뇨.”

소티스가 그림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구분할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만일 그들 중 누가 에드먼드이고 누가 핀인지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면, 그녀가 기억하는 이들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을 것이다.

“설령 원망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요. 제겐 그저 과거일 뿐입니다.”

너울거리던 그림자가 이내 하나로 합쳐졌다. 거인처럼 거대해진 그림자는 소티스를 한 손에 쥘 것처럼 새카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왕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혼돈이 두렵지 않나?”

“두렵습니다.”

사람이 어찌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을까.

소티스는 혼돈이 두려웠다. 혼돈이 남기고 간 상흔으로 평생을 서글퍼했던 레먼의 모습을 볼 때면 그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어쭙잖게 달려들었다가 그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더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그것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미래가, 혼돈보다 더 두렵습니다.”

그 말에는 소티스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작은 세상에서 시들어 가는 건 이제 싫었다. 그녀는 살아가기로, 더 열심히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포기하지 않아야 할 수많은 이유를 가슴에 품고서 말이다.

“그렇군.”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소티스는 느리게 나풀거리는 흰 소맷자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을 위협하던 검은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수조의 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투명한 자태를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손을 빼도 좋다.”

소티스는 손목을 몸 쪽으로 천천히 당겼다. 물기 하나 묻어나지 않은 손을 쥐었다 펴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그대를 베아툼의 귀빈으로 대우하겠다. 또한, 온전한 마법사로 인정하며 보호할 것을 약속하지. 왕실 소속 마법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이 적용될 것이며, 그대 역시 힘에 따른 의무 또한 함께 이행해야 한다. 그럴 수 있겠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얼굴에 소년처럼 맑은 미소가 퍼져 나갔다.

“새로운 규율이여,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고향.

소티스는 입을 꾹 다물고 제게 건네어진 그 단어를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서른 해가 조금 안 되도록 살았던 동안, 멘데즈가 그 온기를 주었던 적이 있던가.

소담하면서도 특별한 온기가 서린 단어가 나비처럼 날아와 그녀의 마음에 내려앉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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