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페리윙클이 피는 땅 (1)
국경을 넘어서고 나서부터는 내내 처음 겪는 일의 연속이었다.
다행히도 베아툼에서는 사절단을 기다리는 마차가 있었기에, 멘데즈를 건너왔을 때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네 사람은 마차에 몸을 싣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져 잠들었는데, 반나절이 지나도 눈을 뜨는 사람이 없어 이상하게 생각한 마부가 작은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이 있나 들여다볼 정도였다.
기운을 좀 차린 알베스와 소티스는 독특한 놀이를 시작했다. 바로 ‘베아툼 바로 알기’ 놀이였는데, 레먼은 그 놀이가 신기하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멘데즈에서만 보냈던 소티스는 베아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베스는 소티스에게 지식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베아툼의 왕조는 대대로 마법사 왕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애나는 살짝 질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멘데즈의 역사도 아니고, 베아툼의 역사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나 소티스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잠시 침묵할 뿐, 마법사들에게 답을 구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뿐이었다.
감겼던 눈이 뜨이고, 소티스 메리골드의 맑은 물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
“베아툼은 유서 깊은 마법 왕국이지요. 왕정 제도와 대마법사로 구성된 원로회 제도를 통해서 위엄을 유지하고 있고요. 그러니 마법에 대한 베아툼 국민의 감정은 특별할 거예요.”
말을 하다 보니 생각이 차근차근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소티스는 차분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베아툼의 국민 중 마법사가 있군요. 그것도 생각보다 흔해요. 마법사는 혈통을 통해 이어지기도 할까요? 아마 평범한 사람들은 작은 마법들만 쓸 수 있겠지만요.”
알베스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소티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영민하구나.”
그녀가 살짝 웃자, 알베스가 마주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예전에는 집마다 마법사가 살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작은 마법이라면 흔히 다룰 수 있지.”
“예를 들면요?”
“성냥불을 붙이거나, 얼음을 금세 얼린다든가, 물건을 가볍게 띄운다든가 하는.”
소티스가 작게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그런 사람들이 마법에 가지는 감정은, 그래. 네 말대로 특별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위대한 마법사를 존경하지. 그러니 베아툼이 마법사들의 왕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툼의 왕위 계승에 혈통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마법적인 자질일 것이다.
“적자라고 하더라도, 마법적인 능력이 없을 경우……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나요?”
“드물지만 있다. 그러니 베아툼은 좋은 마법사 집안과 혼인하는 것으로 훌륭한 혈통을 유지하려고 하지.”
소티스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좋은 마법사가 되면 왕실과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있네요.”
“그렇지.”
곧장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베아툼의 국민들은 ‘소티스 메리골드’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알겠느냐?”
소티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멘데즈의 황후였지요. 황후가 아니더라도,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공작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마법으로 핍박받아 베아툼으로 향하는 국경을 넘은 이들은, 제 유복한 환경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러움은 미움으로 변질하기 쉬운 감정 중 하나이고요.”
레먼은 그들의 묘한 문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스가 왜 평범하게 설명하지 않고 질문을 건네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베아툼은 배타적인 외교 정책을 몇 세대째 지키고 있었으므로, 황국 출신인 소티스에게 왕국의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찾은 답으로, 그녀 자신의 힘으로 베아툼의 본질에 가까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럴 힘이 소티스에게는 있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방인이겠군요.”
“그래.”
“제가 이번 대의 ‘규율’로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타국에서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던 사람이 자신들의 오래된 명예와 숙명마저 도둑질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가만히 있던 애나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오셨다고요? 저, 시녀 언니들에게 다 들었어요. 폐하께서 얼마나 차갑게 구셨는지, 어떻게 이용당하고 무시당하셨는지, 소티스 님께서 얼마나 많은 걸 견디고 버텨 오셨는지도요!”
아이가 씩씩거리며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쉽게 판단하면 안 돼요!”
“네 말이 맞아.”
소티스가 살짝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타인을 판단하지. 어떤 사람의 전부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란다. 그 사람들에게 내 사연은, 어쩌면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라.”
애나는 여전히 입이 잔뜩 나와 있었다. 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냐는 불평에 어른들은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이 아이의 천진한 선의 같은 감정만이 존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후로 소티스와 알베스의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다. 레먼은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고, 이내 알베스로서는 그녀가 이곳에서 최대한 충격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딘가 괴팍한 구석은 있지만, 참 좋은 스승이었지. 레먼은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덜컹거리며 움직이던 마차가 멈추자 툭툭, 누군가 투박한 손길로 마차 벽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옆이 아닌 앞에서 울리는 소리였기에 일행은 그게 마부의 부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저, 마법사님들. 성문에 도착했는데…… 누군가 뵙기를 청합니다.”
레먼이 경계심 가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누구라고 합니까? 신원을 밝히십시오.”
베아툼의 국경을 넘었건만, 레먼은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몇 차례 있었던 습격 때문에 왕성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믿지 않을 심산인 듯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마부의 대답은 그런 레먼조차도 마차의 문을 열게 할 정도였다.
“퀘렐라 님이십니다.”
소티스는 맞은편에 앉은 레먼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퀘렐라’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어깨를 굳혔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내 무언가를 각오하듯 결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다시 인상을 찡그리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설레설레 내젓다가 한숨을 푹 쉬기까지 했다.
무슨 사이일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아마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소티스는 알베스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내려도 될까요? 알베스 님.”
알베스도 복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내리자꾸나.”
마차 밖으로 얼른 뛰어내린 애나가 소티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조그만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오자, 그 옆에 팔짱을 낀 여인이 깐깐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내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앳된 여인이었다. 소녀티를 갓 벗어났을까 싶은 그녀는 짧게 친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팔을 내렸다.
“당신이군요.”
그 짧은 문장에는 적대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나운 눈길에 소티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토록 노골적인 적의는 소티스로서도 그리 많이 겪어 보지 못했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이가 보내기에는 다소 날것의 감정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소티스 메리골드입니다.”
두 여인이 시선을 가만 맞춘 채로 수 초가 흘렀다. 소티스는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퀘렐라를 바라보았다.
곧, 레먼이 소티스의 앞을 막아섰다.
“퀘렐라.”
“페리윙클 마탑주님.”
퀘렐라의 새카만 눈이 가늘어졌다.
“여전하시군요.”
“국경 지대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일거리가 없어서요. 그리고 전 원래 주기적으로 돌아온답니다.”
빈정거리는 것에 가까운 말투였다. 퀘렐라가 덧붙였다.
“이쪽이 외국인 마법사군요.”
알베스가 발끈하며 꾸중하려던 때였다.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한 소티스가 고개를 내저으며 나섰다.
“처음 뵙습니다.”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짧은 정적 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소티스가 평화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북부 출신이라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배움을 청하고자 이곳까지 왔으니, 모쪼록 제가 무언가 실수한다면 편히 가르쳐 주세요.”
소티스는 퀘렐라의 검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규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레먼은 분명히 그 사실을 왕실의 마법사들만 안다고 했으니, 어쩌면 퀘렐라도 그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퀘렐라는 그 사실을 일부러 무시했다. 그리고 소티스를 그저 외국인이라고만 칭했다. 즉, 그녀가 규율이라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멘데즈 출신이라는 것도 적대감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테지만, 레먼과 알베스가 그녀를 알고 있으니 전자의 확률이 높다.
그런 상황에서 내국인인 레먼과 알베스가 나서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다. 소티스를 데려오자마자 감싸려 들었다며 나쁜 소문만 퍼질 테니까.
“……북부.”
퀘렐라는 소티스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의외라는 듯 미간이 살짝 풀렸다.
“퀘렐라 에니드입니다.”
“저, 퀘렐라 님께서 뵙기를 청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퀘렐라는 소티스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시선에는 여전히 적대감이 가득했다. 너무나도 차가워서 저도 모르게 손에 식은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다행히도 소티스는 한평생 에드먼드의 냉대를 받았기 때문에, 타인의 적의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상태였다. 어쩌면 왕성에는 이보다 더한 적대감을 가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견뎌 내고 이겨 내야 할 일이다. 소티스는 다리에 힘을 꾹 주고 견뎠다.
“……그렇군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퀘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은 모여 있었지만, 아까 소티스의 입에서 ‘북부’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만큼은 너그러워졌다.
“마차를 타지 말고 걸어서 들어가십시오.”
레먼이 항변하듯이 나섰다.
“소티스 님은 몸이 약합니다.”
“여기서 본궁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닐 텐데요.”
퀘렐라가 레먼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 정도도 견딜 수 없는 체력이라면 혼돈의 적수가 되기는커녕 그것의 부활이나 돕는 꼴이겠군요.”
“말씀이 심하…….”
“괜찮아요.”
소티스가 레먼의 손을 잡아 만류했다.
“조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지금 마차를 타지 않고 직접 걸어가는 것이 소티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쩐지 얕은수로 자신을 골탕 먹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
퀘렐라는 맞잡은 손을 빤히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치미는 화를 겨우겨우 참아 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떤 말도 없이, 인사조차도 없이 몸을 홱 돌려 버렸다.
“……걸어서 갈까요?”
소티스만이 위로하듯이 레먼의 손을 살짝 흔들며 웃어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