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힘과 의무 (3)
국경을 두고 있는 가장 마지막 영지에 다다른 다섯 명을 기다리고 있는 건, 전혀 예상도 못 한 반가운 인물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실게요.”
하나로 깡총하게 올려 묶은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진하고 선명한, 장미목 빛깔의 머리카락이었다.
말을 탄 마리아네스 로즈우드가 소티스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베아툼에 가시려면 후작령을 통과하시는 게 가장 빠르니까요.”
“마리아네스.”
“그나저나, 대공 전하께서도 계시는 줄은 몰랐네요. 마차는 어디로 가고 다들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계시는 건가요?”
마리아네스의 매서운 눈길이 사내들에게 날아들었다. 그러자 그 무뚝뚝한 아벨마저도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필요한 걸 준비하려면 바쁘겠어요. 일단 로즈우드 성으로 가요. 하루만이라도 쉬었다가 가는 게 좋겠어요.”
소티스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레먼이 더 빨랐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녀님. 안 그래도 며칠 내내 소티스 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레먼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소티스가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된 여정에 몸이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건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이 오르내리는 까닭에 때때로 몸이 으슬으슬 떨렸고, 사지에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휴식이 간절하다 못해 몸이 아우성을 치는데도 쉬자는 말을 하지 못한 건, 여전히 그녀의 뒤꿈치에 매달려 질질 끌리듯이 따라오는 듯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멀리 보거라.”
내내 과묵하게 곁을 지키던 알베스 역시 레먼에게 동조했다. 이 여정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어려운데, 밤이 되면 불을 밝히겠다며 빛 마법을 아낌없이 쓰는 소티스를 보는 내내 불안했다. 애나에게 치유 마법을 쓰느라 마력도 많이 모자랄 텐데 싫은 내색이라고는 없었으니.
노력하는 모습은 존경스럽지만, 지금은 몸을 챙기는 게 급선무였다.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으냐.”
알베스의 다정한 말에 소티스가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렸다. 자신의 약한 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베아툼에 도착하는 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참 좋겠지만, 그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좋아요. 로즈우드 성에서 하루 신세를 져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마리아네스는 자신을 따라온 수행 기사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었다. 발이 날랜 이는 성에 손님이 들 것을 알리러 떠났고, 다른 이들은 대열을 바꾸어 소티스 일행을 보호했다.
그간 항상 선두에는 아벨이 서 있었는데, 이번에는 마리아네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까지 동행하겠습니다.”
아벨은 지평선을 따라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홀가분하게마저 느껴지는 말투에 멈칫, 말에 오르려던 소티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전하.”
“국경을 넘는 것을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벨의 말이 옳았다. 여기는 로즈우드 후작령이다. 마리아네스가 직접 붙어서 움직이기도 하거니와, 후작의 서녀인 핀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작은 행동을 조심할 것이다.
기사 몇 명이 붙은 정도라면 그도 조금 더 고민했겠지만, 소티스의 안전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마리아네스가 직접 나섰다. 의심 많은 아벨조차도 두 사람이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 여겼다.
소티스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의 헤어짐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공작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듬직했던 나머지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붙잡지 않았다. 여기까지 함께한 것만 해도 다망한 아벨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호의였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아벨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소티스 메리골드 님.”
낯선 호칭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소티스가 제 치맛자락을 꼭 말아 쥐었다.
“……네?”
“당신을 보지 않았던 시간이 길어,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적어도, 아주 오래전 단념한 제 낡은 사랑 따위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람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이끌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줄곧 궁금했습니다.”
아벨은 오래도록 소티스를 정의할 만한 단어를 찾아 헤맸다.
양심? 아니다. 그렇다기엔 너무 사사로웠다. 정의, 그건 너무 거창한 감이 있었다. 선구자가 되기에 그녀는 소심하고 유약했다. 권위라기에는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이 낮은 곳에 존재했다.
그 고민의 해답은 오래도록 시원하게 내려지지 못한 채 망각 속에 파묻혀 있었다. 다른 해야 할 일 덕에 아벨은 소티스를 종종 잊고 지냈던 것이다.
10년쯤 흘러서야 아벨은 소티스 메리골드의 삶을 하나의 낱말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베아툼의 사절단이 멘데즈의 황성에 도착한 이후였다.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정답을 처음 들었을 때, 아벨은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 내어 감탄하고 말았다.
“규율.”
그래, 규율이었다.
이 세상에서 옳다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의 본보기가 되는 여인. 세계의 지고한 선이, 지켜지고 계승되어야 마땅할 가치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그 존재 자체로 증명하는 이.
이상과 도덕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이.
“당신은 내 규율이었습니다.”
아벨은 이제 고민하지 않는다. 한 번뿐인 삶을, 최소한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최대한의 무언가를 거머쥐기 위해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생각할 때가 됐다. 북부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지, 어떤 가치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고를 수 있는 최대한의 선택지는 무엇일지.
그가 가진 모든 힘에는 의무가 따르므로. 아벨 폰 세턴 멘데즈는 그 고귀한 의무를 기꺼이 받들 생각이었다.
“그러니 당신은, 남은 일은 멘데즈의 사람들에게 맡기고…….”
아벨은 지평선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곳에는 태양을 옮겨 심은 듯한 여인이 곧게 서 있었다.
“돌아오지 마십시오.”
그 말이 꼭, 반드시 행복해지라는 부탁으로 들렸다.
소티스가 맑게 웃었다.
“그럴게요.”
아벨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타인의 앞에서 절대로 저를 낮추는 일이 없던 이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존경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소티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레먼의 호박색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갈까요, 소티스 님?”
“네. 이제 가요.”
레먼이 당연한 것처럼 손을 내밀었고, 소티스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손을 맞잡았다. 이제는 그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익숙했고, 그와 손을 겹치는 것이 마냥 좋았다.
“베아툼의 여름은 유독 덥습니다. 소티스 님께서 고생하실까 걱정도 되네요.”
“마음 편히 지내면 건강도 점차 좋아질 거예요.”
그녀는 앞을 보며 무심한 척 대꾸했다.
“그러려면 누가 내내 곁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아요.”
대답이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 말발굽이 풀을 짓이기며 달려 나가는 소리만이 울릴 따름이었다.
정적이 한참이나 이어지자 궁금해진 소티스는 고개를 살짝 돌려 제 뒤를 받치고 있는 레먼을 보았다.
그리고.
“…….”
레먼의 귀 끝이 새빨갛게 붉어져 있는 것을 본 순간, 이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졌다.
끌어안고 싶다. 귀는 물론이고 붉어진 뺨과 코끝에도 낱낱이 입을 맞춰 주고 싶다. 당신이 있어 걱정할 것은 무엇도 없다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있어 달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달리면서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소티스는 아쉬운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며 앞을 보았다.
“소티스 님.”
곧, 가죽 고삐를 단단히 쥔 그녀의 손등에 따뜻한 손이 겹쳐져 왔다.
“저는 사실 운명을 믿지 않았어요. 신도, 절대자도, 혹은 어떤 무형의 흐름조차도 인간의 의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거든요. 혹은…….”
그 운명인지 뭔지가 존재하더라도, 적어도 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마법사가 되기 전 멘데즈에서 외면받아 국경 지대의 스카우터의 손에 거둬졌을 때, 마법사가 되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감내해야만 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것을 혼돈에게 잃었을 때.
그토록 그리워하던 은인인 소티스조차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어쩌면 죽기 전까지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 절망할 때조차도 레먼은 운명을 끝없이 미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다. 아래로 끝없이 가라앉기만 할 것 같은 레먼 페리윙클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름밤, 멘데즈에서 만났던 은인과 재회했다. 영혼이 되었던 그녀에게 손을 뻗었고, 그녀는 사라지지 않은 채 제 곁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마음속 그림자를 걷어 내고 소티스가 걸어 들어왔다. 여전히 레먼은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어제가, 함께 말을 달리는 오늘이, 곁에서 눈을 감고 뜰 내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운명이 존재한다면, 그건 소티스 메리골드의 이름을 빌려 그의 삶에 다가오지 않았던가.
어느새 말들이 성문을 넘어섰다. 부드러운 잿빛으로 빛나는 로즈우드 성 안으로 들어선 레먼은 먼저 말에서 내린 뒤, 소티스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무척이나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걸을 수 있어요.”
레먼은 느리게 웃었다.
걸을 수야 있을 것이다. 소티스의 의지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침나절부터 계속 비틀거리던 것을, 핏기 하나 없는 안색이 달빛처럼 창백하기만 한 것을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레먼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소티스의 마른 몸을 고쳐 안았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내내 제대로 잠들지도, 먹지도 못한 지친 몸은 그새 더 가벼워져 있었다.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를 때 즈음 소티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며 제 목을 감싼 팔의 힘이 느슨해졌을 때, 레먼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며 만날 수 있는 가장 귀하고 소중한 운명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영혼을 팔라고 해도 아까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좋은 꿈 꿔요, 소티스 님.”
당신을 쫓던 차갑고 잔인한 꿈은 두고,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땅으로 가요.
무엇도 당신을 감히 괴롭힐 수 없는 곳으로.
이 대륙에서 가장 따뜻한 꽃이 피는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