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힘과 의무 (2)
추적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배후가 그 메리골드 공작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어쨌든 소티스가 공작의 집요함을 경고한 덕에, 일행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음 마을까지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
소티스는 검을 받았지만 실제로 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도적’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아벨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 해치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벨 폰 세턴 멘데즈. 웰트 선대 공작의 후계자이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자신이 대공작이 된 남자. 묵묵한 북방의 수호자이자, 사장되었던 북부 대도끼술의 계승자.
“그렇게 보실 것 없습니다.”
소티스와 아벨은 모닥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는 물 먹인 천으로 도끼를 꼼꼼하게 닦아 내고 있었는데, 이따금 달빛에 그것을 비추어 잘 되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구태여 소티스의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한참 전부터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나는 북부에서 생존 걱정 없이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평생을 웰트에 충성했던 숱한 기사들을 제치고 단숨에 후계자가 되었지요. 단지 대공작의 조카이자 이 나라의 황자라는 이유로요.”
“…….”
“내가 아니면 누가 대도끼술을 살려 내겠습니까? 검과 방패로 무장한, 정석적인 기사의 인상을 바란 적도 없으니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무사히 익혀 이것을 후대에 계승할 수 있다면, 적어도 북부에 부끄러운 인물로 죽는 일만은 면하겠지요. 아마 그 정도면 다른 기사들도 내 존재를 인정할 겁니다.”
“이, 인정까지 필요한 일인가요? 전하께서 북부로 떠나신 건…… 에드먼드 폐하와 정치적으로 다투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까, 일종의 배려에서 비롯된 결정이 아니었던가요?”
아벨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건 북부 사람들이 알 필요가 전혀 없는, 내 개인적인 사연일 뿐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달갑지 않은 이방인에 불과했고요.”
그는 그것이 제 노력과는 상관없는 성과였다고 짧게 덧붙였다. 아벨의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가 잠시 스친 탓에, 소티스는 그가 자신의 출신을 자조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타닥, 잔가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모닥불에 가까이 앉아 있어서인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멀어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먼 부분은 으슬으슬하고 서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침묵 속에서 소티스는 멍한 눈길로 모닥불을, 그리고 그 너머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아벨을 바라보았다.
“여정이 고되지는 않으십니까.”
정중하면서도 건조한 목소리였다. 소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다가 문득 제 모습이 그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빈민가에서도 지내 봤는걸요. 죽을 때까지 황성에서만 살 게 아니라면, 적응해야죠.”
“강하시군요.”
감탄보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수긍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벨이 도끼를 옆에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폐하께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황성에서 그렇게 생각하신 분은 전하뿐이었을 겁니다.”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다들 보는 눈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군요.”
“…….”
“차라리 당신이…….”
아벨은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내쉬고, 도끼를 쥐었다. 반질반질한 표면에는 어색한 무표정을 지은 얼굴이 비쳤다.
아벨은 제 형, 에드먼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그럴 수 없을 것이며, 이제는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부정할 길 없이 에드먼드는 어리석었다. 아니, 그런 표현조차도 과할 정도로 온건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얼간이다. 소티스를 놓쳤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러면서도 이제 와 공작이 개수작을 부릴 때 묵인했다는 것이 그 멍청함에 쐐기를 박아 주는 꼴이었다.
놓치지 말았어야지. 아벨은 형을 속으로 비웃었다. 자신이 황태자였다면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메리골드 공작인 게 대수인가? 그 비열한 작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소티스를 키워 낸 공만큼은 인정할 법하지 않나. 적당히 평생 물고 뜯을 것만 던져둔 뒤 그녀를 곁에 가까이 두기만 해도 메리골드 공작이 벌이는 터무니없는 일 대부분은 수습할 수 있을 텐데.
소티스에게 함부로 대하는 에드먼드를 본 뒤로 아벨은 그 지긋지긋한 황성에 머무르는 것을 포기했다.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따라오는 황자라는 신분에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로 원망스러웠다.
태어날 거면 차라리 황태자였어야지. 그렇다면 소티스와 약혼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에드먼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누릴 생각조차 하지 않을까?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소티스가 그를 사랑했건만.
물론 치기 어린 감정을 오래 간직한 것은 아니었다. 아벨은 북부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애송이의 첫사랑은 녹지 않는 눈으로 덮인 벌판 어딘가에 고이 묻어 두었다. 이제는 그녀가 레먼의 어깨에 기대어 자는 모습을 보아도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까지 가혹하고 어리석게 구는 황성의 모든 이를 도끼로 쳐 죽이고 싶은 기분이 들 뿐이다.
그건 애정이라기보다는 염치에 가까웠다. 아벨은 멘데즈에서 이 정도의 ‘기본적인 양심’을 지닌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비웃고 싶을 지경이었다.
“잠시.”
아벨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대로 잠든 알베스와 애나 쪽을 빙 돌아서 소티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얇은 모포로 몸을 감싼 채 무릎을 모아 안고 있었는데, 열에 들뜬 듯 뺨이 조금 발그레하고 시선이 멍해 보였다. 어깨는 살짝 빠른 속도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소티스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뜨거웠다.
아벨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무어라 하려던 찰나, 소티스가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소란 피우기 싫어요.”
다섯 사람은 지난 마을에서 마차를 처분했다. 뒤를 밟는 이들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도적들이 짚단을 잔뜩 실어 보낸 마차를 추적하는 사이, 소티스 일행은 말을 사서 다른 길로 빙 둘러 돌아갔다. 하루라도 빨리 베아툼에 도착하기 위해 말이 지쳤을 때는 다 같이 내려 걷기도 했다. 어쩌다가 몇 사람만 태울 수 있게 되면, 소티스는 언제나 다친 애나를 먼저 태워 쉬게 했다.
험난한 북부에서 살아왔던 아벨에게도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소티스에게 녹록한 일이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열 끓는 몸으로도 어떻게든 견뎌 냈다. 퉁퉁 부르튼 발을 연신 주무르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오히려 잠든 레먼과 알베스, 그리고 애나를 미안한 표정으로 살피기까지 했다. 마치 이 모든 고초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
아벨은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건 의무를 진 이의 눈이었다.
그런 이를 말릴 수도 없다는 것을, 말려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때는 조금도 탐나지 않던 황위조차도 가지고 싶게끔 했던, 그의 첫사랑. 그의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여인.
태양을 닮은 여인을 보며 아벨이 말했다.
“당신이 베아툼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 땅의 누구도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감히 욕심내지 않는다. 당신의 진짜 행복은 그 나라에, 그리고 곁에 잠든 마법사에게 있음을 알고 있다.
질투하느냐고? 그럴 리가! 누구라도 좋으니 당신을 웃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도 홀가분했다.
그런 마음을 낱낱이 고한다면, 그녀는 특유의 미안하다는 미소로 응답하겠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어떤 의미도 없는 말이다. 아벨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언젠가 보은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네요.”
소티스가 잔잔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아벨을, 그리고 곁에 잠든 알베스, 애나, 그리고 다시 레먼을 바라보았다. 일행을 둘러보는 그녀의 물빛 눈동자에는 애정과 고마움이 담뿍 묻어났다.
“아버지가 끈질기게 쳐 놓은 덫을 볼 때마다 얼마나 무안하고 죄송한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한다는 것조차 염치없는 일인 것 같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녀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벨을 올려다보았다. 아벨은 잠시간 그녀를 마주 내려다보다가, 이내 빙 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반대라고 생각해 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그간 했던 일이 돌아오고 있는 거라고요. 언젠가 베풀었던 선의를 사람들이 보답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
“누군가는 당신을 미련하다고 하고, 바보 같다고 하고, 안일하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다정하고, 너그럽고, 현명하며 자비롭지요. 천금을 주고도 사기 어려운 마음입니다.”
그러더니 살짝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걸 모르는 이야말로 가엾은 인간이지요. 놓친 뒤에야 후회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습니까?”
“……아하하.”
“그러니 당신이 품 안의 그 칼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도 당신을 감히 탓하지 않을 겁니다.”
허무하게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단도를 주었지만, 실은 그걸 쓰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이었기에 존경했다.
그녀의 망설임이, 그 다정함이 낳은 찰나의 틈이 몇 명을 깊은 절망에서 건져 냈던가.
날붙이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 쓰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사람을 구하는 데 쓰인다.
“내가 당신에게 주는 이 호의가 대단해 보인다면…….”
아벨이 눈을 내리깔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그만큼 올바르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소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모은 무릎 위로 고개를 묻고 한참을 침묵했을 뿐이었다.
눈물의 이유는 여러 개일 것이다. 감동해서, 고단해서, 미안해서, 고마워서…… 혹은 자신은 가늠하지 못하는,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섬세하고 복잡한 어떤 마음 때문일지도 몰랐다.
작은 모닥불이 악몽을 내쫓는 파수꾼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