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힘과 의무 (1)
소티스도 대마법사의 의무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강대한 힘을 가진 대신 그만큼 복잡한 규칙을 지켜야 했다.
산적을 만날 거라고 예상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위험한 순간이 오면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레먼과 알베스와는 달리 그녀는 아직 의무로 묶여 있지 않았다. 설령 실수한다 해도 미숙함과 무지를 감안한 수준의 가벼운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게다가 나 때문이기도 하고…….’
누군가 소티스를 베아툼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이들을 보냈다. 아직은 소극적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상황이 나빠진다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는 안 된다. 절대로.
“제 말이 그저 경고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소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으로 마력이 모여들며 창백한 백색 구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산적들은, 아니, 고용된 암살자들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평생 뜯어 먹은 고깃덩어리의 개수보다 살해 협박의 횟수가 더 많은 이들이었다. 살의 한 조각 비치지 않는 여인의 눈은 지나칠 정도로 곧고 맑기만 했다.
그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며 낄낄거렸다. 가당치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이고, 무서워라.”
우락부락한 사내 한 명이 애나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기왕 죄다 죽는 김에 길동무 하나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혹시 모르지, 가는 길에 심부름시킬 일이라도 생길지!”
소티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종류의 악인과 대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낯설어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미 아이는 많이 다쳤고, 이렇게 있는 시간 동안 애나의 생명은 바닥으로 속절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죽일 각오로 달려드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니,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 또한 상대를 죽일 마음으로 달려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떨렸다. 어쩌면 첫 살인이 될지도 모른다.
망설이면 안 되는데…….
“그래서, 어디 싸워 먹겠수?”
사내의 비아냥거림에 소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고 있다. 그녀는 싸움꾼도 아니거니와, 감히 흉내조차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이 물러터진 마음으로 누굴 해친단 말인가.
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자비로움일까. 그녀는 자괴감을 느끼며 입술을 꽉 씹었다.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야 했다.
망설임을 끝내려던 차였다.
“모두가 싸울 필요는 없지.”
낮은 목소리였다. 가장 추운 겨울만을 모아 빚어 만든 듯, 섬뜩하게마저 느껴지는 냉기였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이질적인 목소리는 도적들의 뒤에 서 있었다. 살인에 익숙한 이들도 그 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순간,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두는 그들이었기에 오히려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접근하는 이는, 상대를 절대로 살려 두지 않는다는 것을.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아냥대던 남자의 몸이 쓰러졌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홉뜬 남자의 눈이 잠시 소티스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한 구의 시체가 되었다.
검붉은 피가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발치까지 흘렀다. 모든 것이 두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무, 무슨…….”
레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낮추더니 재빨리 접근해 도적을 어깨로 밀쳐 허리춤에 매어 두었던 단도를 빼앗았다.
하늘 높이 솟구친 핏줄기가 점점이 흩뿌려지듯 떨어졌다. 그중 몇 방울은 소티스의 이마와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레먼이 아무렇지도 않게 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있었으니, 그건…….
“아벨…… 전하.”
아벨이 소티스의 팔뚝보다 긴 도끼를 가볍게 휘둘러 아래로 내렸다.
“어떻게, 여기에…….”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 가려던 소티스에게 아벨이 한쪽 팔을 들어 저지했다.
“대화는 나중에 합시다.”
그가 다시 도끼를 곧게 세웠다.
단 한 명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
소티스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널브러진 이들을 바라보았다. 레먼과 아벨이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죽은 이들의 소지품을 뒤질 때는 살짝 질렸다는 표정까지 떠올랐다.
다행히도 애나는 죽지 않았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러움을 호소하기는 했지만, 소티스의 치료 마법 덕에 큰일을 막을 수 있었다.
“대도끼술은 사장된 줄 알았건만…….”
마차를 살피던 알베스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걸 배우는 조건으로 작위를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아벨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괜찮습니까, 공녀.”
“네, 좀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요.”
“좋은 시도였지만 앞으로는 안 그러시는 게 좋습니다.”
마법으로 사람을 해치려 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에 대한 황국의 이해도는 썩 좋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공녀께서 멘데즈 소속의 유일한 마법사라고 하니 호의적으로 보고 있지만, 그 마법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별로 좋지 않을 겁니다.”
도적들의 두목으로 추정되는 이의 외투를 벗겨 보던 레먼이 냉소적으로 물었다.
“이상 증상을 겪는 어린 마법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핍박하고 쫓아내는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놀랍게도 아벨은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적어도 귀찮은 일은 면할 수 있겠지요.”
그러더니 아벨은 품 안에 있는 단도를 꺼내 소티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 손에 커다란 도끼를 쥔 피투성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는데, 그런 그 모습을 본 아벨이 쓰게 웃었다.
“안심하십시오. 아무리 무시무시한 검술이라 한들 웬만하면 사람을 향해 쓰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입니다.”
“……왜요?”
소티스는 떨리는 손을 반대편 손으로 얼른 잡아 진정시키며 단도를 받아 들었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해 보았자 볼썽사납기만 할 테니, 조금 진정하고 나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힘에는 의무가 따르지요. 나는 역사를 되살릴 의무와 함께 그 역사를 온전한 형태로 빚어낼 의무를 함께 지고 있습니다.”
힘과 의무. 그건 소티스에게 익숙한 듯하면서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자신이 부유한 이로 나고 자랐으니, 어려운 이들을 위해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건지…… 이제 여쭤봐도 되겠지요?”
아벨은 정신을 잃은 애나를 안아 들어 마차에 태우더니, 특유의 무덤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본래 내 호의는 공녀를 위해 마차를 준비하는 것까지였지요. 사실 호의라고 하기에도 어렵겠습니다. 공녀 덕에 렉투스 상단과 무사히 거래를 틀 수 있었고, 웰트 대공령의 오랜 숙제였던 경제적인 고립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소티스는 잔잔하게 이어지는 설명을 들었다.
“내게는 공녀의 안전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멘데즈를 떠나게 되었으니, 웬만하면 베아툼에서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었지요. 그런데, 세상이 모두 내 마음 같지는 않더군요.”
아벨의 얼굴에 혐오감, 분노, 경멸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대의 아버지는 그대를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답니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소티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자신이 베아툼으로 가는 것을 가장 싫어할 사람이라면, 에드먼드와 아버지뿐이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미움을 받는 게 싫어서라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다소 과격할지라도 갖은 수단을 불사하는 인물. 자신을 한평생 하나의, 유용한 도구 정도로 취급한 인물.
달리 누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었던 거다.
“그 사실을 알고선 말을 타고 여기까지 달려오신 겁니까?”
“한시라도 지체해서는 안 되니까요. 한 놈쯤은 살려서 고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소티스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시, 싫어요!”
눈앞에서 사람을 고문한다니, 싫었다. 차라리 일격에 죽이는 게 더 자비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일의 배후가 정말로 메리골드 공작이라면, 어차피 이들에게서 얻어 낼 정보는 없을 것이다. 소티스는 제 아버지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인물인지 알았다.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하게만 하는 것으로 충분해요. 앙갚음 같은 걸 하는 것조차도 낭비예요.”
레먼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도 빨리 국경을 넘어 버리죠.”
잠시 고민하던 아벨이 근처에 내려 두었던 검은 말을 데려왔다.
“내가 호위하겠습니다. 30분 후 출발할 테니 준비하십시오.”
“……네.”
레먼은 아무렇게나 쓰러진 남자들을 발로 적당히 밀어낸 뒤 소티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 보았던 비정하고 단호한 표정은 착각이라는 듯,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길이었다.
검술을 배운 적이 있는 것일까. 혼란스러운 속에서 그런 추측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래서 대도끼술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낸 그가 소티스의 이마와 뺨에 튄 피를 문질러 닦아 주었다.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
정작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레먼도 망설이지 않는다. 아마 알베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법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은 자신뿐이다. 아벨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신 때문에 모두가 위험해졌는데도, 정작 망설이다가 더 위험해질 구실을 만들기만 했다.
부끄러웠다. 평생을 고운 환경에서 안전하게만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수치스러움으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게 아닌데.
더는 그 작은 황후궁에서 머무르는 무력한 여자가 아닌데. 아니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레먼이 소티스의 양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어요.”
“…….”
“소티스 님은 다정하고 친절하시지요. 그 사실이 장점만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게 단점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이 어긋난 탓일 겁니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에 눈물이 어렸다.
“미안해요…….”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처음에는 자괴감 때문에 울고 싶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뺨에 닿은 온기가 너무 따스해서, 어떤 원망도 없는 그 목소리가 그저 포근하기만 해서.
그저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는 사랑이 이만큼 대단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해서, 그게 너무 좋아서.
그래서 울고 싶어졌다.
“이 땅이 당신에게 좋은 터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레먼이 단호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베아툼으로 가요.”
“…….”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그 말은, 그가 보여 주었던 어떤 마법보다도 더욱 마법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