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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77)화 (78/121)

77화. 자비로운 여자 (4)

웰트 대공령을 상징하는 검과 도끼, 독수리를 새긴 검은 마차가 산길을 부지런히 달렸다.

“웰트 선대 공작님은 멘데즈 제일의 검사셨다지요? 어마어마한 크기의 양손검을 휘두르면 당해 낼 자가 없대요. 한동안 동네 녀석들이, 자기도 그렇게 멋있는 검사가 되겠다며 부지깽이나 길쭉한 장작 따위를 들고 설칠 정도였다니까요.”

애나가 바닥에 닿지 않는 발끝을 까딱거리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런데 웰트 대공령의 문장은 검과 도끼잖아요? 도끼를 다루는 사람도 있을까요? 좀 무서울 것 같아요. 기사다운 느낌과는 거리도 멀고요.”

소티스는 잔잔히 웃으며 아이의 수다를 들어 주었다. 며칠 내내 그랬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려던 찰나, 건너편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쉽게도 멘데즈 북부의 대도끼술은 그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지요. 애나가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선호하는 이도 많지 않았거니와 익히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해요.”

레먼이 어느새 길어진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드는 북부에서 익히기 어려운 무술이란 환영할 만한 건 아니었겠지요.”

그의 설명에 소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신가요?”

레먼의 옆에 앉은 알베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무술을 배우려면 자신이 다루는 것 외에도 기본적인 지식은 갖추어야 하는 법이지. 물론 방금 말한 게 전부겠지만.”

그녀는 그 대답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라면 굳이 무술의 기초나 역사 같은 건 몰라도 되지 않을까.

덜컹. 마차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커다란 돌이나 나무뿌리 따위에 바퀴가 걸린 듯했다.

보름 치의 식량과 사람 넷을 태운 마차는 꼬박 닷새째 남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중간에 다른 사절단은 말을 바꾸고 식량을 구하느라 마을에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기왕이면 함께 움직이자는 의견이 있기는 했으나, 소티스는 한시라도 빨리 베아툼으로 가고 싶었다. 마침 마부가 산골짜기를 건너가는 지름길을 안다며 흔쾌히 나섰다.

덜컹. 마차가 다시 흔들리더니 멎었다. 말들이 성난 콧김을 내뿜으며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두런두런 이어지던 네 사람의 잡담이 끊겼다.

“무슨 일입니까?”

레먼이 바깥의 마부를 향해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얘야, 잠시 나갔다 오려무나.”

알베스의 말에 애나가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문을 밀어 열며 상체를 밖으로 내밀었다. 소티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적막이 위험의 전조라는 것을 세 사람 중 한 명만이라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아이가 그렇게 무방비하게 나가지 않도록 했을 텐데.

“꺄악!”

“소티스 님!”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아이의 몸이 쓰러졌다. 흩날린 피가 마차의 문가에 달라붙는 소리가 섬뜩했다. 소티스는 몸을 반쯤 일으켰으나 애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레먼이 그녀의 몸을 당겨 감쌌기 때문이었다.

“습격입니다, 스승님.”

알베스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냐. 그래 보이는구나.”

알베스가 작게 탄식하며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반투명하고 얇은 방어막이 세 사람을 감쌌다.

멘데즈는 정말로 변한 것이 없다. 오래전, 이상 증상을 겪은 그들을 내쳤던 비정함에 개선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러니 좋아할 수가 없지.”

레먼의 얼굴에도 사나운 미소가 어렸다. 그들의 고국은 마차 안의 누구에게도 그리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지는 못할 운명인 듯했다.

텅! 거대하게마저 느껴지는 소리가 마차를 뒤흔들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레먼의 바로 옆쪽 벽을 후려쳤다. 그것은 마차를 뚫을 기세로 박혔다가 뽑혀 나갔다.

“귀하신 귀족 나리들은 아무래도 산적을 만나는 게 처음이신 모양이구만. 괜한 피 보시기 전에 쉽게 쉽게 갑시다, 예?”

껄렁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소티스가 애나를 바라보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아이의 몸에서는 피가 자꾸만 흘러나왔다.

그사이 누군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애나의 발목을 쥐어 질질 끌자,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마차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안 내리는데요, 대장. 어쩔까요?”

“어쩌긴. 꼬마를 죽여. 하녀 같으니 쓸모도 없을 거다. 그러고도 안 나오면, 낭떠러지까지 마차를 몰아 드릴 수밖에.”

“그건 명령에…….”

“입 안 닫아?”

소티스는 저를 여전히 단단히 감싸는 레먼의 어깨를 밀어냈다.

“내려야 해요.”

“안 됩니다, 소티스 님. 위험해요.”

“……죽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애나가, 애나가…… 저기 있어요.”

“…….”

“저, 저를 믿어 보세요. 저들은 절 죽이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지금 느끼기엔 그래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티스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재난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상황이 고통스러웠다.

레먼과 알베스가 시선을 짧게 교환했다. 설령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소티스를 혼자 내리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레먼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핀 뒤, 손을 내밀어 소티스를 잡아 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돈과 물건인가?”

산적 떼의 가장 앞에 선 남자가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 그리고 거기, 예쁘장한 아가씨도 두고 가라.”

남자는 도리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피가 군데군데 얼룩져 있는 무기 끝에는 갓난아이의 머리통만 한 쇠공이 매달려 있었다. 한 치의 막힘도 없는, 두려울 정도로 능숙해 보이는 손놀림이었다.

알베스가 화를 꾹꾹 참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이를 이리 내게.”

“이거, 말이 영 안 통하시네. 아이를 데려가려면 여자를 내놔야지. 안 그래?”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쇠도리깨를 내렸다. 그것으로 쓰러진 아이의 등을 툭툭 쳤을 때, 소티스는 과할 정도의 분노에 휩싸여 속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저 남자에게 달려가 나무껍질 같은 머리털을 전부 뜯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산적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청을 높였다.

“여자를 적당히 팔 만한 곳을 물색해 봐라! 이 정도 낯짝이면 술값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지?”

“하하, 예! 대장. 아무렴 그래야죠!”

레먼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일렁이는가 싶더니, 이내 백색 빛이 주먹을 천천히 감쌌다.

“안 된다.”

알베스가 제자를 점잖게 말렸다.

“너는 이제 막 대마법사가 되었음을 잊지 마라.”

“……스승님.”

악문 잇새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마치 원망하는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레먼은 산적들을 공격하지 못했다. 알베스가 말한 자신의 신분을 그 역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레먼 페리윙클은 남부 베아툼 왕국의 여섯 번째 대마법사다. 그 지위는 그가 대륙 어디를 가든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지만, 그 이상의 의무와 책임을 요구했다.

“대마법사의 첫 번째 금기를 기억하라.”

알베스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먼이 고개를 숙였다.

대마법사의 일곱 가지 금기 중 첫 번째, 마법으로 인간의 목숨을 해치지 말 것.

그들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마법이지만, 가장 큰 규제의 대상 역시 마법이었다. 대마법사는 어떤 이유로든 마법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강대한 힘을 제어하기 위한 기본적인 규율이었다.

만일 대마법사가 살인할 경우, 즉시 마법사 재판에 회부된다. 약하게는 근신이나 지위 박탈, 심하게는 죽을 때까지 탑에 유배되거나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수모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소티스와 관련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든 나서려던 차였다.

“당신은 산적이 아니군요.”

소티스의 말에 주변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절그럭, 쇠도리깨를 내려놓으며 산적이 삐딱하게 물었다.

“뭐라고 했냐?”

“그리고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알고 있어요.”

“웬 헛소리야?”

소티스는 여전히 벌벌 떨고 있지만, 물빛 눈동자만큼은 점차 고요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 속에서도 자신만이 찾아낼 수 있는 허점을 찾아냈다.

이 사람들은 산적이 아니다. 악질적인 이들은 저들의 이익을 위해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의 목숨도 수탈해 간다지만, 이들의 목적은 몇 푼의 돈이 아니다.

그들의 차림새는 생각보다 말끔했으며 무기는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귀족들이 달고 차는 것처럼 화려한 세공은 없었지만, 날은 매끈했고 녹슨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웬만큼 질긴 가죽도 쿠키 반죽처럼 부드럽게 잘릴 정도였다. 이들은 단순히 배고파서 무기를 든 사람들이 아니다. 훈련된 싸움꾼들이다. 심지어 오락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질이 나쁜 살인자들에 가깝다.

정말로 돈이 되길 바란다면 애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팔아치우려고 할 것이다.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노예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물을 원한다면 사람들이 마차에서 나온 지금 마차를 점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재물은 차치하고, 마치 소티스부터 내놓으라는 듯 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실력자들인데도 레먼과 알베스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적의가 없는 게 아니다. 일이 최대한 피곤하지 않은 방향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레먼과 알베스가 베아툼의 마법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제가 일행과 떨어지기를 기다리셨군요.”

누구일까. 그녀가 베아툼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리고 이런 얕고 치졸한 술수를 쓴 사람은.

소티스의 고개가 비어 있는 마부석을 향했다. 지름길을 안다고 했던 그 마부는 도망치고 없었다.

한통속이구나.

새삼스럽게 실망한 이유는, 아마 연회장에서 보았던 숱한 이들의 선의에 잠시 취해 있었던 까닭이리라.

“아이를 이리 주세요.”

레먼을 뿌리친 그녀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산적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소티스는 여전히 떨리는 몸으로 한 걸음 더 나섰다. 남자들이 다시 물러났다.

그건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그녀가 황후이자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온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아이를 넘겨주지 않으면…….”

소티스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당신들 모두가 죽게 될 겁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한 협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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