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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76)화 (77/121)

76화. 자비로운 여자 (3)

피니에 로즈우드는 그녀가 제게 내민 꽃다발을 보았다.

핀은 연회장을 흘러 다니던 이 조그만 유희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자신과는 어떤 인연도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귀족들은 그녀가 소티스의 뒤를 이어 허울뿐인 황후가 될 것이라 여겼고, 에드먼드는 뒤늦게 자각한 감정으로 인해 연일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소티스의 부재를 느끼는 이들은 자신을 분란의 씨앗 정도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억울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꽃 따위, 꺾여 버린 순간부터 서서히 시들어 가는 무력한 식물에 불과했다.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무슨 의미겠는가. 고작 한 철뿐인 삶 내내 실컷 이용당하기만 할 텐데.

“꽃송이가 좀 작죠?”

소티스가 멋쩍게 웃었다.

“정원사가 더 좋은 꽃을 피우고 싶다면 새 종자씨를 가져가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이 꽃은 제가 황태자비였을 때 선물 받아 줄곧 직접 키우고, 해마다 작은 씨를 모아 새로 피운 녀석들이거든요.”

핀의 무감정한 녹색 눈동자에 소티스의 맑은 미소가 담겼다. 마치 그간 있었던 수많은 일은 다 잊어버렸다는 듯한 태도였다.

“……왜 제게 이런 걸 주시는지 묻지는 않을게요.”

어차피 답이야 정해져 있었다. 소티스는 그저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 같은 건 없다는 듯 웃어 줄 뿐이었다. 그게 위선이든, 학습의 결과이든, 본성이든 상관없었다.

핀은 손끝으로 얇은 꽃잎을 문질러 보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뜯겨 나갈 것처럼 작고 약한 꽃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뜯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꽃이 소티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태양을 닮았어요.”

핀이 작게 말했다. 마치 넋두리에 가까웠다. 상대가 듣기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그저 입 밖으로 낸 것으로 족하다는 듯 얇은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거 아세요? 저는…… 이 세계에 ‘규율’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게 소티스 님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소티스는 그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멘데즈의 사람들은 대부분 ‘규율’과 ‘혼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혼돈의 존재가 최근에서야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있다든가, 베아툼에 관련된 사람이거나, 혹은 근래 영혼 관련 문제로 고생하던 이들만이 혼돈의 존재를 알았고, 규율은 그보다도 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핀은, 누구보다도 그 두 존재를 잘 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 오래된 혼돈이 물러나려면, 소티스 님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겠지요. 어쩌면 세상이 오래도록 기다렸던 단 하나의 정답일지도 모르겠어요.”

소티스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작은 목소리 앞에서, 그저 침묵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 뿐이었다.

“그거 아세요?”

“…….”

“불행이 자라면 혼돈이 돼요.”

핀이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혼돈은 불행을 낳죠. 그리고 그 불행은 자라서 혼돈이 되고요.”

소티스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행복과 달리 불행은 끊기 어렵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조건 속에서 자란 사람은 환경에 쉽게 매몰된다. 불행은 늪과 같아서, 아무리 바르게 서려 해도 그 끝도 없는 밑바닥으로 끌어당기는 탓이었다.

그래서 핀을 구하고 싶었다. 지독한 늪에서 끌어 올리고 싶었다.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그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저 지나칠 수 없었다.

소티스는 핀에게서 어떤 운명을 느꼈다. 레먼에게 느꼈던 것과는 그 궤가 조금 달랐으나,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연결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당신을 쉽게 원망하거나 외면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소티스는 현명했지만, 선택하지 않았던 길의 결과까지 내다보지는 못했다.

“이따금, 당신을 황성으로 데려온 일을 후회해요.”

핀의 표정은 여전히 단단한 돌을 깎아 낸 것처럼 매끈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책임을 지고 싶었어요. 구한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니까. 얄팍한 선의는 그 사람을 더 깊은 나락으로 빠뜨린다는 사실을 알아요.”

“어설픈 희망은 사람을 더 크게 절망하게 하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데려온 거지만…….”

핀이 에드먼드의 정부가 되었다고 했을 때, 소티스는 처음으로 핀을 데려온 일을 후회했다.

“제가 내민 손은, 당신이 홀로 행복할 방법으로 이끌지는 못했던 거지요.”

“소티스 님께는 그럴 의무가 없어요.”

핀이 뾰족하게 말했다.

“맞아요. 너무 오만한가요?”

“…….”

“하지만, 당신이 불행하길 바랐다면 먼저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거예요.”

붉은 머리의 황비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이건 제가 행복해질 방법이에요.”

“당신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아닌 것 같으신가요?”

소티스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드먼드는 핀을 사랑했다. 그게 유혹에서 비롯된 변덕인지, 불꽃처럼 타오르는 열정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저 소티스를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기 위한 못된 장난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에드먼드는 핀을 황비로 만들었고, 그녀의 아기를 반겼으며, 곧 자신의 계승자를 위해 핀을 황후 자리까지 올릴 거라는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그러나, 핀은?

핀은 에드먼드를 사랑했던가?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몰랐다. 황제가 그 숱한 정부를 정리하게 한, 붉은 장미 같은 여인.

피니에 로즈우드는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를 사랑했나?

소티스는 어쩐지 그 두 사람을 둘러싼 감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중요하지 않겠지요.”

소티스가 이 황성을 떠나 버리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멀어진다면 그런 치정극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촌극이 될 것이다.

추억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발목을 잡지도 못하게 되겠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해지면 돼요. 제가 행복해진다고 당신이 불행해지는 게 아니며, 당신의 행복 역시 제 불행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우는 것 같기도 했으며, 비웃거나, 동정하거나, 존경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은 자비롭네요.”

칭찬인지 타박일지 모를 말이었으나, 읊조린 그 한마디가 다정하게만 들려 소티스는 그만 웃고 말았다.

***

베아툼으로 떠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느라 본궁을 오가던 소티스는 공교롭게도 매번 에드먼드를 마주쳤는데,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말리고 싶다는 듯 말을 걸 기회를 노렸다.

아마 그녀를 어떻게든 멘데즈에 매어 두고 싶지만,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곤혹스럽겠지. 소티스는 그를 슬그머니 피해 정원의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마법사가 되었다는 소식 덕에 메리골드 공작은 조용했다. 이혼 후에는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는데, 지금은 한결 부드럽게 바라보는 것은 물론이고 레먼에게 나쁜 인상이라도 심어 줄까 염려되는지 황후궁으로 찾아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의 지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공작은, 소티스가 마법사인 것보다는 황비가 되는 쪽을 더 좋아할 것이다. 특히 어떻게든 그녀에게서 황자나 황녀를 얻어 내려 하겠지.

그래서 소티스는 아버지의 침묵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분명히 이럴 사람이 아닌데. 협박이 어렵다면 설득이라도 할 위인이었다.

그런데 마치 다른 일로 바쁘기라도 한 것처럼, 회의에도 불참하더니 아예 황성 밖으로 나갔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숨바꼭질인가요?”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당겼다.

“레먼.”

“아벨 대공작께서 마차를 준비해 주신다고 해요. 북부의 말들은 먼 거리도 잘 달린다더군요.”

“물자는 렉투스 상단에서 지원해 주셨는데…….”

국경을 넘어야 하는 일이니만큼, 적지 않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호위를 최소한으로 두기는 했으나 먹을 입도 많았다.

“한동안 멘데즈로 돌아오지 못하실 텐데, 인사를 더 나누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여행하기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소티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출발이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고, 평소 안면을 튼 사람들은 한 번씩 만났다. 애나를 제외한 시녀와 하녀들은 꼭 필요한 인원들을 놔두고는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인사가 길어지면 아쉽기만 한걸요.”

그나마 붙어 있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마리아네스뿐이지만, 그녀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제 영지로 내려가 버렸다.

길이 겹치니 함께 가도 좋았을 텐데.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아쉬웠던 소티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레먼은 소티스가 단지 이곳을 떠나 아쉬워한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어요, 소티스 님.”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오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멘데즈는 제게 그리 애틋한 고향은 되지 않아요. 물론 소중한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레먼과 함께 베아툼에서 살게 되겠지. 그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다만…….

“로즈우드 후작령은 베아툼에서 그렇게 먼 곳이 아니니까요, 가끔…… 그러니까, 몇 년에 한 번만이라도 놀러 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레먼이 양손으로 소티스의 손을 쥐며 다정하게 말했다.

“당연합니다, 소티스 님. 원하신다면 마리아네스 님을 베아툼의 손님으로 초대할 수 있도록 제가 힘써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베아툼 왕실 직속 피아니스트로 모시는 방법도 있어요.”

“마리가 새 일자리에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소티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이제 가요. 짐을 잘 챙겼는지 점검할 시간이에요.”

이번에는 레먼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들이 왜 베아툼으로 향하는지, 그 이유를 새삼스럽게 떠올린 탓이었다.

소티스가 손을 살짝 움직여 연인의 손을 꼭 쥐었다.

“저는 괜찮아요.”

“…….”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저는 한평생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던, 평범한 귀족이니까요. 어쩌면 베아툼의 그 어떤 ‘규율’보다도 자질이 부족하고 어설픈 마법사일 수도 있겠어요.”

“……소티스 님.”

“그래도 해낼 거예요.”

혼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탄과 불행, 슬픔과 비극을 먹고 자라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베아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베아툼과 멘데즈가 위험해진다면 그다음은 세톤느다. 용병 연합국과 신성 왕국, 그리고 바다 너머의 공국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녀가 감당하기에 녹록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보탤 수 있는 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베아툼에 가서 도움을 받고, 자료를 수집한 뒤 다시 멘데즈로 돌아오는 게 좋겠어요. 혼돈이 본래 태어났다던 베아툼과 멘데즈 사이의 바다를 조사하고, 멘데즈 남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던 흉년을 조사할 거예요.”

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율’이 인간을 그릇으로 삼듯, ‘혼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애나가 말했던 ‘붉은 머리의 마녀’가 본래 인간이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조사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어요.”

“할 일이 정말 많겠네요.”

소티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요, 베아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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