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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75)화 (76/121)

75화. 자비로운 여자 (2)

때를 놓친 사랑은 잔인하구나.

소티스는 에드먼드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에드먼드가 사랑으로 고통받는 날이 올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까닭이다. 심지어 그녀를 붙잡으려 하는 모습은 어색하다 못해 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타까운 마음은 잠시였다. 아주 일시적인 동정에 불과했다. 썩 이상한 방식으로 그가 저를 사랑했으며 이제야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철 지난 감정은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소티스가 그러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폐하.”

몸의 중심을 잡은 소티스가 춤을 이어 나갔다. 그러고는 엄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을 사랑해요. 그리고 제 미래가 그의 미래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믿고요.”

에드먼드의 금빛 눈썹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는 가장 차가운 달빛만을 모아서 빚은 듯한 미남이었지만, 범람하는 질투심은 그 아름다움마저 무색하게 했다.

“소티스, 그대는 나의 아내였어.”

눈을 마주치기 싫어 어깨 언저리를 응시하던 소티스가 그의 코르사주를 눈짓하며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저희는 이 꽃이 피기도 전에 이혼했고요. 자식 하나 없었죠.”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설령 제 몸이 약하지 않았어도 저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을 거예요. 아닌가요?”

그건 에드먼드가 부부의 의무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꼬집은 게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니었으며, 온전한 감정을 주고받거나 적어도 형식상으로라도 교류하는 ‘진짜 부부’가 아니었음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제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게 어찌 이상한 일이겠어요?”

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레먼 페리윙클이 그대에게 뭘 해 줬지? 원래 아는 사이였던가? 아니지, 그대 성격에 밀애 따위를 할 리가. 안 그런가? 그대가 사랑할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잖아.”

마지막 말에 소티스는 약간의 모욕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이미 다 지난 일을 두고 화내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다.

“그대가 쓰러진 이후 페리윙클이 왔다고 했지. 그래, 영혼 마법사가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만, 유일한 말 상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아.”

중얼거리듯 뇌까리는 목소리를 그녀가 차분하게 잘라 냈다.

“십 년보다 값진 한 달이더군요. 그리고 폐하, 폐하도 피니에 전하를 만나신 지 그리 오래지 않아 사랑에 빠지지 않았나요?”

“…….”

“제가 왜 그를 사랑하는지 궁금하신가요? 그 사람의 사랑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건 논리도, 어떤 규칙도 아니었지요. 그저 자연스러운 이끌림에 가까웠어요.”

춤 때문에 가빠진 호흡을 정돈하던 소티스가 웃었다.

“꼭 장작 없이도 유지되는 불길 같았어요. 태양이 어떤 연료 없이 타오르는 것과 비슷했지요. 그의 앞에 서면 저는, 그에게 ‘사랑할 만한 근거’ 따위를 주지 않아도 좋았어요. 어떤 쓸모도 필요 없었죠. 거래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랬다. 그랬기에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떤 강박도 들어설 틈이 없었다. 그저 힘껏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했다.

레먼 페리윙클의 사랑은 꼭 조건 없이 쏟아지는 신의 축복 같았다. 아니, 감히 말하건대 그녀에게는 멘데즈를 굽어본다던 무형의 신보다 나았다. 그의 사랑은 제단에 올릴 염소도, 어떤 경건한 제례며 맹목적인 신앙도 요구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폐하의 곁에 있으면 저는 언제나 한 모퉁이가 느리게, 느리게 깎여 가는 기분이었어요.”

대단치 않은 고통이라며 견딘 세월이 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어느덧 춤곡이 끝났다. 그녀가 훌쩍 멀어지자,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불렀다.

“소티스.”

“…….”

“여전히, 늘 생각해. 닥치는 대로 그대의 생각을 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을지. 나는, 내 죄는, 그리고 내가 갚아야 할 것은…….”

소티스가 쓰게 웃었다.

“제가 한평생 했던 일이네요.”

어떤 여지도 없는 과거형이었다. 에드먼드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그 또한 제가 한평생 했던 일이네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그는 소리치듯이 말했다. 마치 따져 묻고 싶은 것 같았다.

“이건, 그래, 견딜 만한 일이 아니었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머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내게 하라면…… 절대 그럴 수 없겠지. 소티스, 그래서 그대를 생각해. 불가능한 걸 끝내 가능하게 했던…… 아니, 이런 말은 의미가 없어, 그래, 어떤 의미도 없지.”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가락 사이로 두서없는 말이 쏟아졌다.

“왜 이걸 미리 알아채지 못했을까. 왜. 하지만 지금은 알게 됐어. 그러니까, 소티스…… 우리가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마주 볼 수는 없을까?”

“애석하게도 없어요.”

“그대가 후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소티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 제가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폐하를 사랑한 일일 거예요.”

“…….”

“제가 폐하께 이보다 더 무정해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

연회가 이어졌다.

소티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연회다운 연회를 즐겼다. 모든 이가 그녀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여기서 얼른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소티스는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꽃을 받았다. 평민들의 행동을 본 귀족들은 그 꽃으로 말을 붙일 만한 핑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뻔뻔하게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비겁하지 않은 선택을 하고 싶었어요.”

그간 그들은 그녀가 세력가의 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편들지 못했다. 황제의 눈 밖에 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메리골드 공작의 평판 자체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야말로 진심으로 이 나라를 생각하는 황후였다는 사실을.

그녀의 존재는 그들의 양심을 시험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리하여 꽃 한 송이와 함께 비겁함을 조심스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소티스는 꽃을 기꺼이 받아 들었다. 그 사죄로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애나가 가져온 새 바구니가 가득 차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느새 소티스의 근처에 없던 귀족들마저도 이 광경을 작은 이벤트로 인식했다. 시종들이 연회장을 바쁘게 오가며 꽃을 날랐고, 서로 한 송이씩 그것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생겨 버렸다.

유행에 슬쩍 탑승한 레먼과 알베스에게 꽃을 받은 소티스는 애나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작은 소녀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다가 이내 잰걸음으로 연회장을 나섰다.

“석찬 때 몸이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법사의 삶이라는 건, 저희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더군요…….”

“늘 소티스 님께서 고초를 겪으시는 듯하여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 연회가 끝나면…… 베아툼으로 가신다지요?”

그사이, 소티스는 제게 한마디라도 말을 더 붙여 보려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때로는 순수한 호의도 있었으나, 멘데즈와 베아툼의 국교를 염두에 둔 계산적인 아양도 섞여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언제 이렇게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겠는가. 지금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가늠하며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저 웃어 주니까. 이름을 불러 주니까. 자신을 기억해 줄 테니까.

그녀는 더 이상 투명 인간도, 불쌍한 여자도, 공작의 꼭두각시도 아니었다.

“소티스 님, 가져왔어요!”

연회장으로 돌아온 애나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꽃이 소복하게 쌓여 있던 바구니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독특한 외관의 꽃으로 엮어 만든 작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해바라기를 닮은 꽃이었다. 그러나 해바라기보다는 조금 작았다. 열 개에서 열두 개쯤 되는 꽃잎이 검고 동그란 중심을 감싸고 있었고, 몇 송이는 꽃잎의 안쪽이 고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티스가 황후궁에서 몇 년간 가꾸었던 꽃, 루드베키아였다. 몇 해쯤 그대로 씨를 받아 쓰다 보니 처음 심었던 꽃보다는 조금 작기는 했지만, 모아 놓고 보니 소담스럽고 예뻤다.

그녀는 애나에게 루드베키아를 가져오라고 했다. 수십 가지의 꽃이 있으나 반드시 그 꽃이어야 한다고, 생긴 것을 꼼꼼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꽃의 종류를 잘 알지 못하는 애나는 아마 황후궁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 꽃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여주니, 아이가 뿌듯하면서도 기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앉아 있던 소티스가 꽃다발을 쥐고 몸을 일으키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담소를 나누던 레먼과 알베스는 물론이고,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에드먼드조차도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수많은 사람의 꽃을 받은, 이 황성에서 가장 현명한 여인.

소티스의 꽃은 누구에게 향할까.

“…….”

레먼은 소티스가 들고 있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담하게 피어난 몇 송이의 루드베키아를 보고, 그녀의 표정을 살핀 레먼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퍼졌다.

제 몫의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느린 발걸음이 향한 곳은.

“루드베키아의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라는 뜻이에요.”

침묵 속에서 소티스가 말했다.

“저는 행복할 방법을 찾았으니, 제가 가꾼 이것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붉은 머리의 여인이 소티스를 올려다보았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자신의 꽃을 피니에 로즈우드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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