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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74)화 (75/121)

74화. 자비로운 여자 (1)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오늘 같은 연회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연회의 주인공이자 그들의 황제인 남자 때문이었다.

“소티스 메리골드, 그대에게 이 연회의 첫 춤을 신청한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소티스 메리골드에게 첫 춤을 신청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사교계가 발칵 뒤집힐 법한데, 그들을 더 경악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 그대가 내 황비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연회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손을 맞잡은 채로 가까이 붙어 무언가 다정한 말을 속삭이던 렉투스와 셰릴마저도 안색이 창백해진 채 소티스의 쪽을 바라볼 정도였다.

“폐하.”

그는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티스는 그 모습을 흔들리는 눈길로 응시했다.

새삼 그에게 어떤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다만…….

“이건 좋은 처사가 아닙니다.”

소티스가 에드먼드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으켰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일순 희망이 어렸으나, 곧 소티스의 표정을 보고 실망과 슬픔으로 천천히 어두워졌다.

“저는 이미 폐하와 이혼했습니다. 이제 와 제가 황비가 되는 것은 저와 폐하, 그리고 핀 전하와 태어날 아기님마저 소문 거리로 만들 뿐입니다.”

“내 생각이 짧았소.”

에드먼드가 고해하듯이 말했다.

“그때는 그저 그대가 사라져야 내가 편해질 거라고, 그런 이상하고 멍청한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대가 없는 멘데즈의 미래가 얼마나 우스워질지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더군.”

“…….”

“아기 때문이라도 핀을 황후 자리에 올려야겠지만, 아니, 그대가 원한다면 내가 핀을 설득해서라도…….”

“폐하.”

소티스가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 냈다.

“저는 황비 자리도, 황후 자리도 원하지 않아요. 멘데즈의 일을 돕던 것은 오로지 제 개인적인 선의에서 비롯되었던 일이에요. 어떤 포상도 바라지 않았답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차분히 덧붙였다.

“지금의 폐하께서는 제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실 수 없어요.”

에드먼드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자유.”

소티스가 고민 없이 답했다.

“저는 자유를 바라고 있어요.”

그는 침묵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소티스의 말이 옳았다. 에드먼드는 소티스에게 자유가 되어 줄 수 없었다. 오히려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없이 늦어 버린 지금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탓이리라. 이미 철 지나 시들어 버린 감정은, 미련이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함에도.

“폐하께 필요한 건 지나간 일에 마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소티스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폐하께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겠지요.”

에드먼드는 혼자가 아니다. 그의 마음을 빼앗은 정열적인 황비가 있고, 곧 태어날 아기도 있다. 그가 소티스에게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피니에 로즈우드는 이 황성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릴 뿐이다.

얄궂은 일이다. 오로지 타인의 사랑 덕에 그 자리에 몰린 이가, 타인의 사랑 때문에 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일이.

알고 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이다. 그러나, 소티스는 다시 추락하는 이를 보고 싶을 만큼 복수심에 휩싸이지 않았다.

“소티스 님.”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제 곁을 지키고 있던 레먼 페리윙클이 손을 내밀었다.

“곧 첫 춤이 시작돼요.”

“그렇겠네요. 아마 왈츠일 거예요. 전통적으로 그랬으니까.”

“다행이네요. 왈츠는 연습을 많이 했는데.”

마법사의 호박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소티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기꺼이.”

두 사람은 숱한 사람의 시선 속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채 춤을 추었다. 레먼은 소티스의 양손을 잡고 능숙하게 이끌었고, 소티스는 춤을 추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일인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경쾌한 삼 박자의 춤곡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에 다갈색 눈동자와 다정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가 아로새겨졌다.

“모든 일이 끝나면…….”

소티스가 말했다. 꿈을 꾸는 것 같은 어조였다.

“베아툼에서 작은 집을 짓고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시종이라고 할 것도 없이, 심부름을 도와주는 아이만 있으면 돼요.”

“소티스 님.”

“처음엔 모든 게 무척 어렵고 낯설겠죠? 어쩌면 전 옷차림 정돈하는 일조차 어려워하며 조금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지겠죠. 저는 뭐든 금세 배우고, 기꺼이 그 모든 일을 능숙하게 해낼 거예요. 그리하여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롯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면…….”

그럼 정말 행복할 거예요. 그녀가 뒷말을 삼키며 가만히 웃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진짜 강한 사람이 될지도 몰라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는 더욱더 그렇게 되실 거예요.”

“그때까지 제 곁을 지켜 주시겠어요? 레먼.”

레먼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 낭만적인 돌발 행동에 놀란 귀부인들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대로 소티스의 몸을 가볍게 안아 한 바퀴 빙글 돌린 레먼이 웃었다.

“그 이후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

어떤 불행도 생각하지 않은 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내일을 힘껏 떠올리며 레먼이 말했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을 거예요.”

“약속해요?”

“맹세해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소티스 메리골드를 걸고?”

레먼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소티스 님.”

***

“두 번째 곡은 나와 추지.”

첫 곡이 끝날 때까지 들뜬 미소를 갈무리하지 못해 내내 웃는 낯이었던 소티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에드먼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그저 춤을 추자는 것인데.”

이번에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레먼을 사랑하기에, 특별한 의미가 담긴 첫 춤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까지는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자유롭게 춤을 이어 가는 두 번째 춤까지 밀어내야 할 만한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내게 필요한 것은 지나간 일에 마음을 쓰는 게 아니라,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제 말을 얄미울 정도로 그대로 돌려주는 행동에 그녀는 치미는 한숨을 삼켰다. 두 번째가 아니면 세 번째, 네 번째까지 노리겠지.

차라리 한 곡 추고 자연스레 떨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약한 몸을 이끌고 두 곡이나 춤을 추었으니 그다음부터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춤 신청을 거절하거나, 더 운이 좋다면 연회장을 이르게 빠져나갈 수도 있으리라.

결국 그녀가 조그마한 손을 에드먼드의 검은 장갑 위에 올렸다. 에드먼드는 그것을 다소 우악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며 그녀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귓가를 날카롭게 저미는 듯한 바이올린의 선율이 이어졌다. 샤콘이었다. 어떻게 추었더라? 소티스는 눈을 반쯤 내리깔고 박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능숙하군.”

“어떤 곡이 나와도 망신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했으니까요.”

그녀의 건조한 대답에 에드먼드가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었나?”

“네.”

소티스의 푸른 눈동자가 에드먼드를 원망스레 응시했다.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알았다면, 적어도 춤을 못 출까 염려하는 시간은 없었을 거예요. 불안한 것보다는 참담한 게 견디기 편하더군요.”

“…….”

그녀의 말속에 숨은 뼈를 알아차린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서 불편하다. 소티스는 반 뼘이라도 좋으니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의 사이로 언뜻 레먼의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질 때마다 불편함은 곱절이 되었다. 제 연인이 이런 일로 책잡을 만큼 배려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그만 바늘로 심장께를 콕콕 찌르는 듯한 불쾌한 기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억지로 그와 몸을 떨어뜨리려던 소티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드레스 자락을 밟아 발을 삐끗한 탓이었다.

옆으로 기울어지려던 몸을 에드먼드가 받아 바짝 붙였다.

“완벽할 필요는 없지. 감싸면 그만이 아닌가.”

소티스가 차갑게 웃었다.

“폐하께서 저를 감싸 주신다고요?”

“……그래, 그럴 만한 위인은 아니었어. 우리는 어쩌면 첫 만남부터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라. 어그러진 땅에 집을 지으면 언제고 무너지기 마련이지.”

아니. 비뚤어진 건 그저 그의 마음이었을 뿐이다. 소티스는 무너지는 기둥을 온몸으로 받치며 안간힘을 썼지만, 이제는 그 집이 아무리 무너진다 해도 눈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많은 생각을 했어.”

소티스는 침묵했다. 에드먼드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건 판도라의 상자와 같아서, 들으면 그저 신경이 쓰이고 속상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늘 그랬듯, 그녀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소티스. 우리가 망가진 첫 단추를 다시 끼울 수는 없을까.”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어요, 폐하. 설령 그럴 수 있다 하여도, 저는 더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답니다.”

“그래서, 멘데즈를 두고 베아툼에 가겠다?”

“제가 아닌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티스는 일부러 더 당당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규율의 숙명을 물려받았어요. 각성하는 모습도 보셨잖아요.”

“……석찬 때, 말이지.”

에드먼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꼭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소티스는 그 얼굴을 무척 낯설고 이상한 것을 바라보듯이 보았다.

“지금은 괜찮나?”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염려한다는 것만큼 기막힌 농담이 있을까?

“네. 극진한 간호를 받았거든요.”

“그 마법사가 곁을 지키던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에요. 항상 제 곁에 머무르며 많은 이야기를 해 주지요. 저 또한 많은 것을 듣고요.”

“나는 그대를 잘 몰라. 그토록 오래 함께 있었는데도.”

“그건 폐하께서 저를 알려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전 언제나 같은 곳에 있었어요.”

“그래. 알아. 이미 늦었다는 것. 그대의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하자 그 사실을 깨달은 게 멍청한 짓이라는 것도 알지만.”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기회를 줘, 소티스. 단 한 번이면 돼. 몰랐던 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필요해.”

“…….”

“그대는 자비롭잖아.”

그녀의 허락도 없이 열려 버린 판도라의 상자에서는 비수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대는 내게 평생 자비로웠잖아, 소티스. 마지막 자비를 내게 베풀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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