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별의 폭발 (4)
셰릴 메리골드는 자신의 남편, 렉투스를 보았다.
렉투스. 제 이름을 딴 상단의 주인. 그가 이뤄 낸 것은 명실상부한 멘데즈의 최고 상단이다. 그 이름 아래 먹고사는 사람이 몇 명인지 감히 셀 수가 없고, 평생 헤아려 주고받은 돈이 얼마인지는 그 자신조차도 모른다고 했다.
그 평민 남자는 자신의 상단을 위해 귀족 가문과의 혼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물려받을 성씨 하나 없던 이에게 이 결혼은 잃을 것 하나 없는 장사였다. 어린 아내는 똑똑했고 아름다웠으며 처세술 뛰어난 아버지와 황후가 된 언니를 두었으니까.
렉투스는 제 아내 될 사람을 천덕꾸러기처럼 보는 공작의 시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진짜 천덕꾸러기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걸 모두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굵직한 거래였기 때문이다.
손익 계산에는 어떤 오차도 없이 단호하게 굴던 그 남자는 유독 셰릴 앞에서만 미지근하고 소극적이었다. 억지로 부부 관계를 맺느니 콱 죽고 말겠다는 아내의 말에 1년이 되도록 허락 없이 손 한번 먼저 잡는 일이 없었다.
셰릴은 그야말로 분통이 터졌으나 차마 자존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해가 넘어가도록 그 남자와 밋밋한 줄다리기를 할 뿐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셰릴과 렉투스는 이 결혼의 불명예스러운 해석을 막기 위해 ‘신분을 초월한 사랑’ 따위의 소문을 냈다. 셰릴은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고, 렉투스는 귀족들과 우호적으로 거래를 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려고 결혼한 거겠지.’
셰릴은 자신이 렉투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성을 따랐고, 언젠가 태어날 아이 역시 그럴 것이다. 벽지에서 시작한 상단을 안정적으로 꾸릴 만한, 이 비정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나마 덜 초라해질 좋은 방법이 바로 이 결혼이었다.
그것뿐인 거지.
나이 든 졸부라 불리던 그 남자는 늘 무심했다. 겉으로는 사랑에 빠진 연기를 잘도 했으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건조했다. 그 온도 차이를 실감할 때마다 제 남편이 애처가를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고, 그럴 때면 미묘하게 불쾌해지곤 했다.
그는 셰릴이 바라는 것을 뭐든 들어주었으나 사교계에는 발을 들이는 일이 없었다. 연회 준비를 돕겠다며 탑처럼 높이 쌓아 가져온 상자에는 셰릴의 드레스와 구두만 가득했다.
값비싼 물건은 지겹도록 많으니, 손이나 한번 잡아 주면 좋으련만. 다른 남자들은 마음에 두는 여인에게 치근대지 못해 안달이라던데, 이 남자는 어떻게 셰릴을 두고도 흑심 한번 품는 적이 없는지.
그 어떤 왈츠에도 춤 한번 같이 추겠다며 나서지 않는 남자. 애처가의 역할을 돈독하게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입에 올리지 않는 남자.
“저는 당신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셰릴은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어머, 그러신가요?”
렉투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셰릴과 그 너머에 곧게 선 소티스를 보았다.
모든 것이 의외였던 아내의 언니. 소티스 메리골드가 제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괜찮을 거예요.’
렉투스는 소티스에게 존경과 사죄의 의미를 담은 꽃을 선물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노력해서 투자를 얻어 낸 빈민 구제 사업을 오로지 자신의 미래와 명성을 위해 이용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소티스는 환하게 웃으며 꽃의 답례로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답례 같은 게 왜 필요하냐며 웃으려다가, 렉투스는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아내가 저를 사랑할까요?”
그 질문에 소티스가 자신 있게 웃었다.
“그 아이는 절대 무언가를 억지로 하지 않는답니다.”
어쩐지 그대로 믿고 싶었다. 그 말만이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다.
“저는…….”
렉투스는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삶을 받았어요.”
셰릴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평소의 렉투스라면 이런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능숙하게 타인의 시선에 거슬리지 않을 남편 연기를 했을 텐데, 우물쭈물하며 두서없이 말하는 모습이…….
꼭 진심 같지 않은가.
아주 오래된 마음을 이제 와 건네려는 것처럼 긴장한 모습에, 셰릴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꼭 맞잡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저는 언제나 당신만을 생각했어요.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제게 팔려 와야만 했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서라도 당신의 삶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비싼 값에 사야만 했습니다.”
셰릴의 물빛 눈동자는 언니 소티스를 닮았다. 무척 슬퍼 보인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렉투스는 그것이 팔려 가는 짐승들이 짓는 체념의 눈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랬다. 그 사실을 번복할 수 없다면, 어차피 거래처럼 이루어진 결혼이었다면.
적어도 헐값에 팔려 와 고생한다는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하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다.
사랑은 변하지만, 유복함은 변하지 않으니까. 때때로 돈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 때가 있으므로.
그러면서도 욕심을 부렸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당당한 아내에게 걸맞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가진 건 돈 몇 푼이 전부인 비루한 남자일지라도 감히 그녀를 웃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제 욕심을 앞세워 연회에 따라가면, 오히려 초라한 평민과 결혼하기나 했다는 눈길에 상처받을까 싶어 내내 피했다. 셰릴은 이미 메리골드 공작의 불명예 때문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수도 없이 오르내렸던 사람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불쾌한 경험을 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걱정과는 정반대의 조언이 돌아왔다.
“셰릴에게 춤을 권해 보세요.”
소티스가 말했다. 렉투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합니까? 자신을 이용한다고 여겨 불쾌해한다면요?”
“진심을 보이세요. 셰릴은 똑똑해요. 당신의 마음을 분명히 알아챌 거예요.”
소티스가 웃으며 말했다.
“거창한 설명도, 구구절절한 변명도 필요 없어요. 손을 잡아 보세요.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부부잖아요?”
정말 그것으로 좋을까? 손을 잡는 것 하나만으로, 이 오래된 침묵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렉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아내가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면서도 시선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말을, 그의 마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악단이 자리를 잡고 악기를 들었다. 연회의 첫 춤을 준비하라는 듯, 가볍고 경쾌한 바이올린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겠지. 그러니 용기를 내야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연회복의 가슴 주머니에 꽂았던 붉은 장미를 한 송이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렉투스 메리골드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오늘의 첫 춤을 청합니다.”
셰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미심쩍어하고 있었지만, 마냥 싫지는 않은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춤을 출 줄은 아시나요?”
그가 가만히 웃었다.
“오로지 이날을 위해 연습했습니다.”
“렉투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춤 신청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도대체 숙녀를 얼마나 기다리게 할 생각인지!”
하지만 그보다 훨씬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미련한 남자 같으니. 그래서 어디 상단을 제대로 이끌겠어요?”
“…….”
“뭘 멍하니 있어요? 빨리 오지 않고. 얼마나 잘 추나 검사해 보겠어요.”
렉투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
그리고 그 순간, 셰릴 메리골드는 알았다.
이 따뜻한 손을 잡자마자 전해지는 그의 진심이 너무도 또렷해서, 너무도 열렬해서.
소티스의 말이 옳았다. 남편은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저 그녀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바보 같으니.”
셰릴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언니한테 조언을 구한 건가요?”
“바로 아셨네요. ……저답지 않은 행동이기는 했죠.”
“누가 우리 사이에 대해 조언한다면, 그럴 사람은 언니뿐이니까요.”
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낸 그녀가 덧붙였다.
“언니가 너무 똑똑해서 가끔, 아니, 솔직히 자주 짜증 나요.”
“그래도 현명한 분이잖습니까? 그래서…… 당신의 허락도 없이 공녀께 투자했던 겁니다. 큼직한 일은 함께 논의하기로 했는데.”
“빈민 지원 사업이라면 잘했어요. 당신의 안목은 틀리는 법이 없잖아요.”
가볍게 몸을 풀 겸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본 셰릴이 소티스가 있던 자리를 눈짓했다. 언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 준 모양이었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훌륭해요. 멍청이가 아니고서는 다 알아요. 어디의 누구는 다소 멍청하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좀 차리는 모양이고요.”
“하지만 제 눈에는…….”
렉투스가 고개를 숙여 조심스레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제 아내가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고, 똑똑합니다.”
“…….”
“당신을 아주 오래도록 좋아했어요.”
셰릴은 그 뜨거운 고백에, 자신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어떤 별무리를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수많은 별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일생 수십 번에 나누어 하나씩, 혹은 여러 개가 한꺼번에 터져 나간다. 그것은 폭죽처럼 터져 나가며 사람의 마음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인다.
사람은 그것을 감정이라 불렀다. 이따금 터져 나가는 그것은 환희일 때도, 증오일 때도, 행복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설움이거나, 감동이거나, 분노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사랑일 때도 있었다.
셰릴은 자신이 아주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던 거대한 별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이 알던 어떤 빛 중 가장 찬란하고 따뜻했다.
렉투스 메리골드.
그녀의 남편은 하나뿐인 아내를 위해 기꺼이 그 빛이 되어 주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사랑하는 셰릴을 위하여.
“남편이 아내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셰릴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아내가 남편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단언컨대, 렉투스 메리골드의 삶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