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별의 폭발 (3)
연회를 앞둔 시각, 붓꽃색 드레스 자락이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누군가는 여인을 질시했고, 누군가는 여인을 까닭 없이 미워했다. 그녀는 황성을 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그리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소티스 메리골드 님, 제 꽃을 받아 주시겠어요?”
누군가는 여인을 존경했다.
“제가 폐하의 탄신 연회에 운 좋게 초대되었다고 했을 때, 온 마을 사람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같은 부탁을 했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고맙습니다, 공녀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 말을 전해 달라더군요.”
누군가는 여인에게 감사했다.
“전 황후님이야말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진심으로 위해 주신다셨지요.”
누군가는 여인을 기억했다.
“소티스 님께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누군가는 진심으로 여인의 행복을 빌었다.
“…….”
소티스 메리골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꽃을 받았다. 진한 보랏빛 꽃을 엮어 만든 화관마저 쓴 소티스는, 그녀 자체가 커다란 꽃다발처럼 보일 정도였다.
곁에 서 있던 애나가 큼직한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 꽃은 이리 주세요, 소티스 님. 제가 바구니에 잘 담아 황후궁에 가져다 둘게요.”
어색한 표정으로 꽃을 안고 있던 소티스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작은 하녀가 이 사실을 전혀 새삼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애나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태도마저 보였다. 아마도 지금 들고 있는 바구니조차 이 상황을 예견하고 준비한 듯했다.
“소티스 님께서 이번 연회에는 지체 높은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참석한다고 하셨잖아요?”
소티스는 애나가 가져온 바구니에 꽃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랬지.”
귀족들보다는 수가 훨씬 적긴 했지만, 일부 평민들도 연회에 참석한다.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연회를 즐기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초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혹여라도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황실에서 평민들을 위한 연미복을 준비하고, 연회 이후의 대통합 회의에서 그들의 의견을 들을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평민들은 소티스 님 덕에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 의견을 낸 것은 다름 아닌 소티스였다. 세금 낭비라는 귀족들의 비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한 귀족이 해마다 필요한 비용을 자신이 대겠다고 나서서 무사히 넘어갔던 기억이 있었다.
그 귀족이…….
“……아벨 대공작이 도와주셨던 거였어.”
소티스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혼자인 줄로만 알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남몰래 지지하는 이가 있었고, 제가 만든 길을 걸어와 이 꽃을 바칠 날만을 기다리던 이들이 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하고, 신기하고, 따뜻한 기분이었다. 소티스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애나.”
“네, 소티스 님.”
“사람들은 언제 꽃을 선물하니?”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요.”
“그렇구나.”
소티스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이걸 내 처소에 두고 돌아오렴. 한 송이도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해. 귀한 선물이니까.”
“네!”
소티스는 크게 심호흡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넓은 연회장이, 이 비정한 황성이.
이제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
연회가 시작되자 많은 이들이 소티스에게 말을 걸었다. 대개 꽃을 주기 위해 모여든 평민들이나 그녀의 평소 행적을 호의적으로 지켜보던 귀족들이었다.
그동안 황제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 소티스를 외면했다며 사죄의 말을 꺼내는 이들도 있었다. 소티스는 모두를 웃는 낯으로 반겼다. 설령 과거 자신의 외로움에 일조한 이들이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소티스가 그 시간에 더는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지난날의 잘잘못을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다.
카네이션을 선물 받아 향을 맡던 소티스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에드먼드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소티스.”
거리가 멀어 그 입술이 제 이름을 벙긋거렸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소티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가 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넘어서 두렵게마저 느껴졌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소티스 메리골드를 걱정한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묻고,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 심지어 조금 미안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말로 그 에드먼드가 맞나? 스무 해가 지나도록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이상했다.
“폐하.”
그런 에드먼드의 변화를 괘씸하게 여기는 이도 존재했다. 마리아네스나 레먼은 물론이고, 알베스마저도 그랬다.
알베스는 에드먼드가 소티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재빨리 끼어들어 말을 붙였다.
다분히 노골적인 방해 공작에 에드먼드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상대는 타국의 대마법사다. 함부로 푸대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내 자신에게 향하던 시선이 떨어지자 숨통이 좀 트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녀가 가져온 음료로 목을 축였다. 연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꼬박 하루는 서 있었던 것처럼 피로해졌다.
벽에 기대서 잠시 쉬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앞에 성큼 나타났다.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가 쐐기처럼 날아와 소티스의 귓가에 쿡 박혔다.
“이렇게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들지도 못하면서 황후로 어떻게 살았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소티스가 살짝 웃었다.
“황후가 되기에는 내가 조금 소심한 성격이었지? 셰릴.”
“그걸 말이라고 해?”
소티스와 같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어깨에도 닿지 못할 만큼 짧았다. 차디찬 겨울 새벽 같은 머리카락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무심하게 흩어졌다.
“겉만 번지르르한 귀족들은 진작 한 손에 휘어잡았어야지.”
셰릴이 혀를 차며 덧붙였다.
“난 그랬을 거야. 언니처럼 약하지 않으니까. 관용? 자비의 가치를 아는 치들에게나 베풀 일이지! 누구에게나 잘해 주고 싶다는 욕심에 온갖 상처나 받으면서 끙끙거리는 건 미련한 짓이거든.”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선 셰릴을 본 소티스는 살짝 웃어 보였다.
“나 대신 이 자리에 앉고 싶었니?”
“입 아픈 소리 자꾸 시키지 마, 언니.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마음 없는 결혼식에 설 거라면, 확실한 지위라도 보장되는 게 나아.”
셰릴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난 언니와 달라. 황제의 약점이 뭔진 모르겠지만, 그걸 아는 이상 당연히 활용했겠지. 뭐 좋은 일이라고 일방적인 모욕을 참고만 살아? 게다가 그뿐이야? 자존심도 없이, 싸구려 정부에게 몸에 좋다는 약이나 지어 바치지를 않나…… 낙태약인가 싶어 좀 기대한 내가 멍청했지. 어휴.”
소티스의 미소가 어색하게 흩어졌다.
“미안하구나. 네가 보기에 난 그냥 답답하고 미련한 언니일 뿐인데, 그러면서도 네 삶에 너무 많은 그림자를 드리웠지.”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 그림자를 만든 건 아버지였어. 물론 언니가 없었다면 내 처지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언니가 없었다면.
그 말에 소티스가 어깨를 굳혔다. 아무리 당당해지려 애써도 본능적으로 위축되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셰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됐어. 이미 다 지나간 일, 결론적으로 언니는 온갖 수모를 겪었고 나는 부자 남편 만나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으니까. 비록 그쪽도 귀족 집안에 줄이나 대려고 나와 결혼한 거지만…….”
“렉투스 님이?”
소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럴 리가 없어. 렉투스 님은 널 좋아하잖니?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무슨 소리야.”
셰릴이 핀잔하듯이 대꾸했다.
“그 사람은 아버지 때문에 날 좋아하는 척하는 거야. 연기하는 거라고! 난 허울뿐인 안주인이야. 뭐, 그래도 법적으로 부부라는 점은 분명하고, 착실하게 연기라도 하니 상관없지만.”
“……연기?”
“그래. 뜬금없이 귀족이랑 평민이 결혼하는데, 좋게 떠들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낭만적인 소문이라도 덧대서 부풀려야 내가 바보 취급을 안 당할 거 아냐. 그래서 남편의 장단에 맞출 뿐이지. 이건 다 반쪽짜리 사랑이야. 우리는 둘 다 서로를 사랑하는 척하지만, 실은 아니거든.”
그럴 리가 있나? 소티스가 계속 고개를 기울였지만, 셰릴은 오히려 소티스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고 믿었는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편은 내게 아기를 갖자는 말도 안 해. 사랑하지 않으니 안을 마음도 안 드는 거겠지. 게다가 이런 자리에 따라오지도 않고, 어쩌다가 오더라도 멀뚱하게 저 구석에 처박혀 있을 뿐이라니까?”
“그…… 그러니?”
“연회에 함께 간 것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지만, 가더라도 내게 춤을 신청하는 일 따위는 없어. 하긴, 춤은 출 수 있나 몰라. 사교계의 평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평민이니까!”
씩씩거리며 말하다 보니 어느새 언니에게 푸념하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셰릴은 조금 당황해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 드는 게 분했다. 심지어 제 언니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멀뚱멀뚱 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미묘한 짜증과 기대감이 제멋대로 뒤섞였다.
뭘 기대하는 건지. 결혼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합방조차 하지 않는 무심한 남편이 이제 와 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셰릴은 저를 향해 맑게 웃는 소티스를 보았다.
“셰릴.”
그래. 그런 식이었다.
아무리 미워해도, 열등감에 가득한 시선을 보내도, 소티스는 그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웃어 준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듯.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듯.
꼭 지금처럼.
“아냐. 네 남편은 널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
“위로할 거라면 집어치워. 난 어린애가 아니야. 입에 발린 소리 같은 건 안 믿게 된 지 꽤 됐거든.”
셰릴이 입술을 깨물며 소티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 누구보다 약해 빠진 얼굴을 하고, 가시 돋친 말 몇 마디에도 금세 상처받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이런 순간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웃는 것이다. 한 치의 틀림없는 진심으로.
“저기 봐, 셰릴.”
소티스가 셰릴의 뒤를 손짓했다.
“렉투스 님이 오셨어.”
셰릴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남편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듯 저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열렬히, 그리고 간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