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별의 폭발 (2)
소티스 메리골드는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이 거대한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아득하고 압도적인 감각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몰랐다. 자신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내는 듯한 이 감각이 단순한 ‘고통’이라고 정의될 만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두려웠다. 소티스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운명을 실감하고 말았다. 이 운명은 그녀의 안에서 시작되어, 이내 자신을 찢고 세상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마치 태양이 폭발하며 세상을 밝게 비추듯이.
그래서 두려웠다. 소티스는 문득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인간은 결국 이 거대한 운명 앞에서 한낱 먼지에 불과한 걸까? 자신의 노력은 어떤 의미도 없는, 허탈한 발악일 뿐일까?
고개를 들기 시작한 두려움은 거대한 혼돈이 되어 그녀를 잡아먹으려 하는 듯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 한 줌도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건 혼돈이었다. 혼돈이 소티스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 오래된 전쟁을 끝낼, 최후의 규율이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태양처럼 따뜻하고 대지처럼 단단했다. 바다처럼 깊으면서 한없이 아늑했다.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소티스는 그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본능처럼, 아니, 운명처럼 알아볼 수 있었다.
엘디카. 그녀는 선대 규율의 마법사, 엘디카였다.
엘디카가 소티스에게 말했다. 다정하면서도 어딘가 슬픈 어조였다.
“규율은 별을 닮았답니다.”
“…….”
“별이 빛나는 이유는, 온몸을 부서뜨리며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소멸만이 약속된 이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가 힘을 보태겠어요.”
짧은 침묵 후에 엘디카가 덧붙였다.
“새로운 규율이여, 이는 우리가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 말은 여과 없는 사실일 것이다. 선대 규율들은 모두 혼돈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자의에 의해서인지, 타의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결과만은 명확했다.
소티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자신만 사라져 준다면 세상이 어떤 문제도 없이 돌아갈 것 같았다. 이대로 모든 걸 손에서 놓아 버리면 편할 테니까. 체념만큼 즉각적인 해방은 없을 거라 믿었다.
“지금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지도 몰라요. 저는 마음속으로 줄곧, 의미 있는 죽음을 갈구하고 있었거든요.”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엘디카가 말했다. 거기에 누군가의 음성이 더해졌다. 수십 명이 함께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선대 규율들일 것이다. 소티스는 그렇게 믿었다.
“우리는 완성된 죽음을 향해 달려왔고, 마침내 그것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렇기에 ‘규율’이라는 운명으로 엮인 건지도 모르겠군요.”
소티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건 그녀가 평생 가져왔던 단 하나의 욕심이었으니까.
그러나 시야가 넓어졌다. 어둠 속에서 한 가지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며 매몰되는 게 아니라, 그 곁에서 그녀를 줄곧 기다리던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의미 있는 죽음은 최선을 다한 삶에서 옵니다. 저는 사라지고 싶으면서도, 모든 미련을 없애기 위해 힘껏 살고 싶어요.”
죽음이 도피가 아니라 멋진 마무리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는 있었다. 그녀의 슬픈 소멸에 눈물을 흘릴 사람을 알고 있으므로. 그런 그를 사랑하고 말았으므로.
레먼 페리윙클은 그녀에게 삶의 찬란함을 알려 주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생명의 위대함과 삶에 깃든 따스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무력하게 죽어 가는 게 아니라, 힘껏 견디고 필사적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저는 아직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살지 못했어요.”
“모순적이에요, 소티스.”
“알아요.”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과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나 그녀의 안에서 맹렬히 충돌했다.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티스는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모순 속에서 가장 완벽한 균형을 찾아가며 살아요. 그게 바로 ‘규율’이 아닌가요?”
세상이 단 한 가지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래서 정의가 오직 하나뿐이며 삶에 갈림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규율 역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
소티스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에, 엘디카가 웃었다. 마치 이 순간을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듯 기껍고 반가워 보였다.
“그렇군요. 그래요. 그러니 당신은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군요.”
“……네.”
“나는 혼돈과의 전쟁이 곧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티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미래를 내다보실 수 있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하지만 예지와는 달라요. 그저 때가 오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엘디카가 말했다.
“붉은 머리의 혼돈이 제게 말했습니다. 이 오래된 싸움을 끝내고 싶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굴복할 방법을 찾으라고요.”
“진심으로 굴복할 방법…….”
“그래요, 소티스. 부끄럽게도 우리는 그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으로 그들을 통제하고 소멸시켜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불행한 일이 일어나 혼돈의 부활로 이어졌으니까요.”
소티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그저 이제 겨우 규율의 소명을 이해한 풋내기 마법사일 뿐이에요. 그런데…… 그런 제가 정말로 이 악순환을 끝낼 수 있을까요?”
엘디카가 웃었다.
“가능해요. 우리는 알 수 있답니다.”
규율들이 입을 모아 그녀에게 속삭였다.
“소티스 메리골드, 우리의 마지막 규율이여. 당신은 다정해요.”
“그것만 기억한다면…….”
“당신은 어떤 불행조차도 진정으로 씻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소티스는 어떤 온기에 이끌리듯이 눈을 떴다.
그건 레먼 페리윙클이 전하는 온기였다. 그는 소티스의 머리맡에 앉아 줄곧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는데, 손끝이 저릴 정도로 꽉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는 레먼을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실은 부르지 못한 것에 더 가까웠다.
“…….”
레먼이 울고 있었다. 그의 투명하고 뜨거운 눈물이 소티스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 부드러운 피부에 방울방울 맺혔다.
소티스는 문득 그 모습이 안타깝고 서글퍼졌다. 소리 죽여 우는 것이 익숙해 보이는 이 남자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밤의 고통을 얼마나 많은 눈물로 씻어 내려야 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율의 길을 포기할 수도 있다. 혼돈이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한낱 인간이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바로잡을 필요도 없으며, 그럴 의무 또한 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이 아님을 소티스는 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제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무엇보다 그녀가 희망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고 싶었다. 추상적인 정의론에 그친다고 해도 좋았다.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단 한 명이라도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그게 레먼 페리윙클이 사랑하는 ‘소티스 메리골드’이리라. 이 사실을 포기한다면 레먼은 소티스를 잃지 않겠지만, 다만 원할 이유도 사라지겠지.
“레먼.”
소티스가 그를 위로하듯이 불렀다.
“저요, 엘디카 님을 만났어요.”
“…….”
“다음에는 안부를 전해 드릴까요?”
레먼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두덩이 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엘디카, 그 이름에 그리움이 치민 듯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였다.
소티스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그의 얼굴에 손을 뻗어 보았다. 온몸을 얻어맞기라도 한 듯 얼얼하고 불편한 열감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레먼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다.
레먼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제 상처를 돌보는 일을 미루고 소티스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떠나도 당신은 이렇게 울어 줄까?
분명히 그렇겠지.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살고 싶었다. 그저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가치 있게 살고 싶었다. 눈부시게, 그리고 힘껏, 올바르게 살아가고 싶었다.
“저는 언제 죽을지 걱정하는 삶이 아니라, 언제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후련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해요.”
그 말은, 아직 오지 않은 이별과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오늘을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두려움에 움츠리며 숙명을 피하지 말자는 의미와 같았다.
“……압니다.”
레먼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제 옛 스승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는 제 뺨을 어루만지는 소티스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소티스 님께서 무엇을 선택하시더라도, 당신을 사랑해요.”
“…….”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소티스 님께서 살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소티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 함께라면 분명히 그럴 거예요, 레먼.”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당신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사랑한 거다. 이 마음을 다해.
“……제가 조금 오래 잔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 생일 연회에 늦지는 않았겠지요?”
“물론입니다. 준비하실 시간도 충분해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함께 춤을 추기로 했잖아요. 당신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제게 소티스 님은 언제나 예쁘신걸요.”
레먼이 마주 웃었다.
“그래도 당신과 춤을 추고 싶어요. 잠시 물러가 있을 테니, 준비가 끝나거든 불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