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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70)화 (71/121)

제70화. 별의 폭발 (1)

레먼은 에드먼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저히 좋게 보기 힘든 자였다. 권위적이고 독선적이었으며 오만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간 소티스에게 저질렀던 일을 생각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방법을 찾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좋은 사람을 가려내는 안목조차 없어 소티스를 홀대하는 것 같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이렇게 신경을 쓸까. 그녀가 그 오랜 시간 동안 황성에서 홀로 견딜 때마다 매몰차게 굴었으면서.

그에 대한 분노와 함께 자괴감이 엄습했다. 못 먹는 음식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소티스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이 작은 지식조차도 몰라 그녀를 곤경에 처한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시키기 싫어서 먹으려고 했던 거겠지. 혹시 또 두통이 찾아온 걸까? 스승님께서 도우셨으니 적어도 오늘은 괜찮을 줄로만 알았는데…….

“……잠시 실례.”

참담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레먼은 탁자를 빙 둘러 문가로 걸어 나갔다. 일단 찬물로 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 시답잖은 질투심을 빼고 침착하게, 정말 소티스를 위한 방법이 뭔지 생각해야 했다.

사랑과 이기를 구분하자. 독선적으로 사랑하지 말자. 레먼이 자신에게 되뇌며 입술을 꾹 깨물고 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

소티스의 곁을 스치던 찰나, 그녀가 손을 살짝 뻗어 그의 손을 쥐는 것이 느껴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지만, 지금의 제게는 세상 무엇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티스가 눈꼬리를 살짝 접어 웃어 보였다. 미안해하는 듯했다.

그 감정에 레먼은 오히려 울고 싶어졌다. 잘못한 것은 자신인데, 속이 좁은 것도 자신인데. 왜 그녀가 사과하고 있는 걸까.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깍지를 끼고 손등을 엄지로 가볍게 문지르자, 소티스가 조금 더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쪽을 향하는 손길이 한없이 따뜻했다.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든 상관없다. 누가 그녀에게 어떻게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괜찮았다.

소티스 메리골드가 선택한 사람은 레먼 페리윙클이다. 그녀와 함께 걸어갈 자격을 가진 사람도 자신뿐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그에겐 앞으로 약속된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온전히 소티스를 위해 살아갈 테니까.

“혹 힘드시면 이야기하십시오. 함께 돌아가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곧 있으면 파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견뎌 볼게요. 금방 나아지겠죠.”

“……네.”

연회는 내내 어수선할 테니, 다른 나라의 인사들이나 귀족들과 이야기하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다. 흠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는 일차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라도, 이 석찬은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도무지 그 뜻을 따라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두통은 아예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눈앞이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체리를 먹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거의 억지로 앉아 있던 소티스는 몸을 일으키고는 다른 이들과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고, 에드먼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형식적으로나마 말하려던 때였다.

“미안하다.”

난데없는 사과에 소티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랐었다. 그대가 체리를 먹지 못한다는 걸.”

그가 언제의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골탕 먹이려고 보냈던 게 아니었어. 물론 믿지 않겠지만…… 친해지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던 거다. 너무 오래된 일이지만.”

“괜찮아요. 이제 제게 그런 건…….”

어떤 의미도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소티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드먼드의 냉대가 꾸준했다는 것이다. 소티스는 긴 시간 동안 에드먼드에게 기대하는 방법을 잊어 갔다. 그래서 그의 차가운 시선에 아플지언정, 실망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시간은 슬픔조차 퇴색시킨다. 그를 사랑하는 동안은 그들이 멀어진다는 사실이 아팠지만, 마음이 멀어지고 나자 더는 속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은데. 정말로 괜찮은데.

“…….”

“소티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새카맣게 암전되었다가 빛이 범람하듯 새하얗게 번쩍였다.

소티스는 제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기분 나쁜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쿵, 쿵, 쿵, 손끝이 거세게 요동치는 듯했다. 마치 심장이 이쯤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툭,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러나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는 달랐다. 정확히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듯한 격통이 가슴께에서 느껴졌다.

“위험해!”

세톤느의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알베스가 외쳤다. 핀이 다가와 에드먼드의 팔을 잡고 뒤로 당겼다. 동시에 알베스의 옆에 서 있던 레먼이 다가와 그 자리에 무너지는 소티스를 끌어안았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며, 몇 개의 속박 주문을 외웠다.

에드먼드는 핀이 저를 당기는 것을 알면서도 머뭇거렸다.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소티스의 모습에 어쩐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평온함을 유지했던 그녀가 저렇게까지 무너진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가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폐하, 물러서세요!”

“……스승님, 도와주십시오! 제어가 안 됩니다!”

“각성이다. 고대 마법을 써!”

소티스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몸이 금색 빛무리에 휩싸이더니, 이내 사방으로 빛의 파편이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에드먼드는 뾰족한 것이 제게 날아오는 것을 망연히 보았다.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비명을 듣는 순간 온몸이 굳어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꼭 울부짖는 것 같아서.

한 번도 무너지지 않던 그녀가 고통 속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 것만 같아서.

“폐하!”

핀이 에드먼드의 어깨를 꽉 쥐고 돌렸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에드먼드의 뺨에 대고 눌렀다. 그제야 그는 제가 그 빛에 베였음을 깨달았다.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는지, 새하얀 손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사방으로 튀어 나간 파편에 그릇이 깨지고, 놀란 귀족들이 도망치고, 그녀를 껴안아 제압하던 레먼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만찬장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처가 깊어요. 아프지 않으세요?”

욱신거리는 통증은 뒤늦게 찾아왔다. 에드먼드는 제 뺨을 누르고 있는 핀의 손등 위에 제 손바닥을 겹쳐 쥐고 여전히 비명을 지르는 소티스와 그녀를 막기 위해 분투하는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괜찮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괜찮지 않았다. 그 말을 했을 때의 자신이 어땠는지 알자, 그간의 소티스가 어땠는지도 함께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픈데, 괜찮다. 괜찮아야 했다.

그건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그냥 아팠던 거구나.

그간의 네 마음은 이런 고통 따위와 비교할 수도 없었던 거겠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규율의 마법사…….”

핀이 소티스를 보며 읊조리듯이 말했다.

“‘혼돈’을 잡기 위해 태어난 자를 베아툼에서는 ‘규율’이라 불러요. 일종의 천적과 같지요.”

“…….”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힘을 가지기 위해, 세 번의 각성 과정을 거친다고 해요.”

“각성이라고…….”

저게 어딜 봐서 각성일까. 에드먼드는 한탄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토록 아파하는 건 그저 고문이 아닌가.

레먼이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된 주문을 외우며 소티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주홍색 빛무리들이 허공에서 새장 모양으로 뭉쳤다.

그러나 잠시 후, 소티스의 비명과 함께 그녀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금빛이 그 새장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그건 구경거리라기에는 너무도 처절해 보였다. 소티스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 빛이 어디로 튈지 모르며 자칫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그곳에는 오직 소티스와 레먼, 알베스, 그리고 핀과 에드먼드만이 남아 있었다.

“……차라리 기절 마법을 쓰면 안 됩니까, 스승님? 소티스 님이 너무 고통스러워하시잖아요.”

레먼이 땀을 뚝뚝 흘리며 허공에 손을 움직여 간이 마법진을 빚어냈다. 가까이 다가온 알베스 역시 주문을 몇 개 외웠지만, 소티스의 마력이 주변을 부수는 것을 막아 내는 데에만 그쳤다.

“누굴 죽이려고!”

알베스의 노성에 에드먼드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지금 기절시키면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규율을 죽일 셈이냐!”

“…….”

“네가 아는 모든 마법을 전부 동원해라. 영혼을 다루는 것과 다르지 않아. 소티스의 의식에 침투해서 길을 알려 주는 거다. 내가 폭주를 내리누를 테니까. 얼른!”

알베스가 레먼의 손목을 잡아 소티스의 이마에 손을 대도록 했다. 레먼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소티스의 이마와 뺨을 어루만지며 다시 침착하게 주문을 외웠다.

에드먼드는 그 모든, 비극 같은 장면을 눈에 담았다. 이내 비명이 끊기고, 소티스가 피를 왈칵 토해 내는 모습을 보며 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마 자신의 표정은 지금의 레먼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었구나.

그건 부정할 길 없는 사랑이었다. 그가 그동안 소티스를 그토록 밀어냈던 이유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무용한 발버둥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을. 더 비참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알고 후회하게 될 것을.

알았더라면, 미리 알았더라면. 에드먼드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랬더라면, 네게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굴었을 텐데. 이보다는 좀 더 낫게 굴었을 텐데. 그렇게 멍청하게, 널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타오르지 않는다고 사랑이 아닌 건 아닌데…….

“이런 기분이었구나.”

에드먼드가 멍하니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녀가 기절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얼 위해 저 고통을 견디는지, 저 고통보다 대단한 게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억겁 같은 찰나가 흘렀다. 시간이 아예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참담할 정도로 느리게 흐르다 고여 버린 시간 속에, 다섯 사람만이 버려져 박제된 듯했다.

그리고 누군가, 그의 곁에 있던 이가 그에게 물었다.

“후회하세요? 폐하.”

마치 비밀을 속삭이는 듯한 그 목소리 앞에서, 에드먼드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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