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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69)화 (70/121)

제69화. 사람의 마음 (4)

소티스 메리골드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석찬에 참석했다.

새하얀 드레스는 발목 근처까지 내려왔고, 연한 주홍색 끈으로 허리를 묶은 뒤 아래로 부드럽게 퍼지는 모양새였다. 수수한 듯 보였지만 곳곳에 달린 섬세한 레이스가 그녀를 초라하지 않게 만들었고, 레먼이 직접 걸어 준 목걸이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에드먼드가 다가와 그녀가 앉을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티스가 어색하고 불편한 시선을 에드먼드에게 보냈다. 보는 이들도 많은데, 새삼스럽게 왜 이러는 건지. 심지어 먼저 도착해 앉은 핀은 아무렇지도 않게 음료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괜찮나?”

“…….”

“그렇게 이상하게 볼 것 없소. 그저 내가 평생 하지 않았던 말을, 이제 할 뿐이니까.”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빚이 되어 쌓인 물음들이었다. 이제야 그것을 나누어 갚을 뿐이다.

다만 소티스는 에드먼드의 변화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평생 냉대와 비아냥으로 일관하던 이가 새삼스레 그녀를 신경 쓰는 것도, 어딘가 간절한 눈길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에드먼드가 소티스에게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어 주기 위함이었다.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빛나고 있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닿아 보려는 몸짓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볼 만도 하지요.”

허공에서 뻗어진 손이 소티스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먼저 정리해 주었다. 녹색의 새틴 드레스를 입고 나온 마리아네스였다.

마리아네스의 차가운 눈길이 에드먼드에게 향했다.

“때로는 시기를 지나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게 있곤 하지요. 목숨과 마음은 그럴 때면 참 비슷해요. 안 그런가요, 폐하?”

“…….”

마리아네스가 세톤느 황자의 옆이 아닌 소티스의 옆에 몸을 내리자, 에드먼드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레먼을 찾았다.

“로즈우드 공녀, 그 자리는…….”

그때, 알베스와 함께 나타난 레먼이 소티스의 맞은편이자 세톤느 제4왕자의 옆에 앉았다.

“세톤느의 광물은 특별하지요. 베아툼의 왕실에서는 언제나 세톤느의 마석을 최고로 여깁니다.”

내내 마리아네스를 찾던 왕자의 시선이 레먼에게 향했다.

“감사합니다. 폭발 사고 때문에 외국으로의 수출량이 상당히 줄었는데, 베아툼에서는 꾸준히 찾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국제 방침 때문에 이렇다 할 교류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레먼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베아툼의 정책도 변화를 앞두고 있겠지요. 또한 마법사의 나라에서 마석을 관리하지 못해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제 스승님께서는 사람이나 물건에 깃든 힘을 안정시키는 데 아주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계시지요. 저 또한 그 일에 관심이 아주 많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에드먼드로서도 자리 이야기를 꺼내기가 겸연쩍어지고 말았다.

이내 본격적으로 석찬이 시작되었다. 에드먼드의 짧은 인사에 이어 석찬에 초대된 귀빈들이 차례차례 소개되었다.

소티스는 베아툼의 마법사들과 함께 소개되었는데, 그녀가 멘데즈 최초의 마법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군중의 시선이 일제히 향했다.

평소에 타인의 시선을 받는 데 익숙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소티스는 허리를 꼿꼿이 펴며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침 건너편에 앉은 레먼이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던 덕에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그러다 문득, 커다란 송곳이 관통하는 듯한 두통에 놀란 그녀가 고개를 황급히 숙였다. 마침 귀빈 소개가 끝나고 음식이 날라질 때라, 사람들의 시선은 소티스에게서 떨어져 나간 뒤였다. 그러나 에드먼드와 레먼은 여전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네.”

마리아네스의 속삭임에 소티스가 짧게 대답했다. 제가 듣기에도 썩 설득력 있는 음성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마리아네스는 속은 척 넘어가 주었다.

타국의 귀빈들도 함께 모이는 자리였다. 까탈스럽고 유약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알베스가 마력을 안정시켜 준 덕에 반나절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모처럼 두통 없이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자 지금의 증세가 더 새삼스럽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잠깐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일 것 같은 전채 요리에 이어 온갖 요리들이 이어졌다.

대개는 멘데즈식으로 요리한 것들이었으나 때때로 세톤느에서 자주 먹는 튀긴 채소 요리, 베아툼의 방식으로 숙성된 새 고기나 용병들의 연합국인 케러윈 연합의 전통 음식이 함께 어우러지기도 했다.

이색적인 요리를 맛보는 멘데즈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외국의 귀빈들 역시 고향의 방식이 존중되었다는 사실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깊은 배려심에 놀랐습니다, 폐하. 만찬의 음식들과 어우러지는 제 고향 음식을 보고, 멘데즈에서 어떤 화합을 추구하는지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드먼드가 낮게 웃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전 황후,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의 의견 덕이었소.”

“……예?”

포크를 눕혀 고기를 꾹 누르던 소티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두통과 부담감 때문에 음식을 반도 입에 넣지 못했는데, 사람들의 감탄 어린 시선이 다시금 쏟아지자 삼킨 것도 토해 내고 싶은 심정이 들고 말았다.

“정말입니까, 공녀님?”

“대단하십니다. 석찬에 이렇게 신경을 쓰시기에도 쉽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이번에 마법사가 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와중에도 황비 전하를 대신해 황실을 이토록 세심히 돌봐 주시다니.”

“그럼요. 그전에도 소티스 님께서 돌봐 주셔서 황실에 큰 탈 없이…….”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이내 에드먼드와 그 옆에 앉은 핀을 바라보았다. 소티스의 유능함을 칭찬하는 것은, 반대로 피니에가 황비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핀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다만 향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제 몫의 음식을 밀어내기에, 잠시 고민하던 에드먼드가 핀이 잘 먹었던 전채 요리를 다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보니, 황비 전하께서는 폐하의 총애를 받아 황비가 되시기 전부터 아기님을 가지셨다지요.”

“올해 내로 경사가 생기겠습니다. 황실의 첫아이니, 황태자 혹은 황태녀 전하가 되시겠네요.”

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저와 달리 잘 배워야 할 텐데 말이에요.”

“예? 그게 무슨…….”

“저야 노예로 팔려 갈 뻔한 것을 폐하께서 구해 주셨으니, 다른 분들과 비슷한 수준의 격식을 차리는 것만으로도 급급하답니다. 나랏일 같은 것을 할 줄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세상에. 폐하께서…….”

“아, 황후 폐하께서요.”

“소티스 님께서 말이십니까?”

귀족들이 암묵적으로 침묵하던 제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던 핀이 에드먼드를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잠시 곤란한 듯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던 이들은 에드먼드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두 사람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운명적인 일인지 칭찬하기 시작했다.

웃으며 말을 붙이는 이들의 틈에서 에드먼드만이 불편해했다. 그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치켜세울 때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어그러뜨렸는지 깨달아야 했다.

사랑. 그 비이성적인 감정 때문에 훌륭한 황후였던 소티스를 내치고, 그녀에게 수많은 죄를 짓고, 이토록 답답한 마음에 시달리는…….

“……핀?”

에드먼드가 핀에게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시선이 제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이 보였다.

핀은 에드먼드의 반대편에 앉은 소티스를, 정확히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접시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를 걱정하는 레먼이 이따금 그나마 소티스가 입에 한 입이라도 밀어 넣었던 음식들을 살피며 제 몫을 양보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삼키지 못하는 듯했다.

에드먼드는 그 시선을 따라 소티스의 떨리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핀이 옆에서 무어라 물었던 것 같은데, 제대로 듣지 못해 건성으로 대답할 정도였다.

힘들어 보이는데, 나설까. 그런 고민을 했다. 괜찮냐고 물어보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그만두었다. 또다시 왜 그러냐는 듯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겠지. 그게 바로 제가 그간 했던 행동의 결과인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알고 있다. 그런 불평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한창 수확철이라 맛이 좋더군요. 귀빈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을 담아 올립니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석찬에 참석한 손님 중 한 명이 선물을 가져왔다며 체리를 꺼냈다. 이내 황실 요리사가 그것을 받아, 아이스크림 위에 체리를 장식해 내어 왔다.

이거면 소티스도 먹어 주지 않을까. 내내 입맛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단 음식은 조금씩 먹으려고 했으니까. 레먼은 조금 기대하는 시선으로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주 웃었으나, 아까와는 다른 긴장감으로 손끝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떡하지.

소티스는 조그만 숟가락을 쥐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감에 찬 레먼의 시선에 이마가 따가울 정도였다.

이조차도 못 먹는다고 하면, 까탈을 부린다고 생각할까. 낮에 알베스가 마력을 진정시켜 줄 때 곁에 있었으니, 이제 와 머리가 또 아프다고 하기에도 무안했다.

그래, 바로 아픈 게 아니면 한 입만 먹자. 눈 딱 감고, 먹고 나서 의사에게 보이면…….

저렇게 기대하는 얼굴로 보는데.

아이스크림과 체리를 함께 떠서 입 앞에 가져다 대려던 순간이었다.

“소티스.”

옆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에드먼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티스를 바라보더니, 이내 뒤에 있는 시종에게 명령했다.

“공녀는 체리를 못 먹는다. 다른 걸 내어 오라 하지.”

레먼의 표정이 굳었다. 소티스는 차마 그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이내 레먼이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공녀님에 대해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말에 미묘한 가시가 담겨 있었다. 에드먼드가 그대로 소티스의 손목을 잡은 채로 비죽 웃어 보였다. 호승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내 아내였던 사람이니까.”

“…….”

소티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석찬은 도대체 언제 끝날까.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 못해 완전히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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