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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68)화 (69/121)

제68화. 사람의 마음 (3)

“어찌 이렇게 쓸모가 없을까!”

대마법사의 노성에 소티스는 금방이라도 심장을 토해 낼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알베스가 오기로 한 시각이 될 무렵부터 차게 식어 가던 손은 이제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질 정도였다.

알베스는 소티스를 보자마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유의 깐깐하고 엄격한 인상에 위엄까지 서려 있어서,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앉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놈아!”

노인의 고함이 레먼에게 향했다. 소티스가 앉은 의자 뒤편에 서 있던 레먼이 움찔했다.

“너 말이다, 너!”

“……예?”

“스승이라는 것이 어찌 제자에게 이렇게도 쓸모가 없단 말이야! 어딜 봐서 네가 스승이라는 거냐?”

소티스가 멍하니 물었다.

“그게 무슨……?”

“공녀께서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저 녀석이 말이 좋아 마탑주니, 대마법사니 하지만 내내 제자며 막내로만 지내 누굴 돌보는 일에는 서툴기 짝이 없습니다.”

무시무시해 보일 정도로 굳어 있던 알베스의 표정이 펴지더니, 이내 미안한 듯 살짝 웃어 보였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겠소.”

“저…… 제가 고생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최근 마력을 무리해서 운용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길이 억지로 넓어진 상태요. 안정시키는 과정도 없이 그릇만 넓히면 크게 탈이 납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소티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제 스승님의 스승님이시니, 저를 제자처럼 대해 주세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구나. 그럼 눈을 감아 보거라.”

알베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소티스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 굳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레먼이 천천히 고개를 젓자, 알베스가 다시금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해치려는 게 아니다.”

“……죄송해요.”

그저 몸에 익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고 만 행동이었다. 소티스의 귀 끝이 붉어졌다.

이런 식으로 초라한 모습을 보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솔직히 조금 부끄러웠다.

그녀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자 잠시 후, 이마와 어깨에 알베스의 큼직하고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베아툼에서 가장 오래된 마탑, 알베스는 조화와 정돈을 상징하지. 내 힘이 도움이 될 거다.”

그의 손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스며들어 왔다. 몸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움직이는 알베스의 마력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속을 진정시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동안 부쩍 심했던 두통이 가라앉으며 머리가 맑아졌다. 소티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할 것 없어. 동료 마법사를 돌보는 것은 원로회의 임무지.”

알베스가 깐깐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안 그러냐, 이 무능한 놈아.”

“하하.”

“못난 것. 앓느니 죽지. 마력 통로가 이렇게까지 넓어지도록 옆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냐?”

“……그렇게까지 넓어져 있었습니까? 다소 무리하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가라앉을 줄 알았습니다. 아직 각성하실 시기도 아니고요.”

“각성?”

“아마 소티스 님께서 ‘규율의 마법사’라면…….”

레먼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알베스가 그의 말을 잘랐다.

“웬 가정이냐. 이미 확실한 것을.”

“…….”

“감상에 빠져 있다고 해서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알베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아 소티스의 손을 쥐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제 얼굴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일흔은 훌쩍 넘긴 대마법사의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주름이 가득했다. 어쩐지 그것들이 슬픔이 할퀴고 간 흉터 자국처럼 보였다.

이 사람도 혼돈에게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까. 그래서 제 눈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걸까.

“아직 늦지 않았어.”

“…….”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너를 보고자 했다, 새로운 규율이여. 그대는 규율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아.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승님!”

알베스는 물빛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소티스 메리골드를 처음 본 순간 알았다. 그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소티스는 그가 평생토록 사랑했던 한 여인을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삶을 살겠지. 이런 눈을 한 여인들은 대개 비슷한 삶을 살다가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니까.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선대 규율이자 레먼 페리윙클의 스승, 그리고 연인이었던 엘디카를 잃어 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너는 규율로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죽음이 약속된 그 자리에서, 너만큼은 빼내 주겠다고.

“마력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이라, 마법적인 능력도 사라질 수 있겠지. 하지만 베아툼에서는 여전히 너를 보호할 것이다. 원한다면 페리윙클 마탑에서 함께 머물 수도 있어.”

“…….”

“레먼은 이미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남겨진 적이 있는 아이다. 나는 이 녀석이 엘디카를 잃고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보았지. ……그러니 부탁하는 것이다. 레먼을 사랑한다면, 그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 주는 길을 선택해 다오.”

엘디카.

소티스는 그 이름을 발음할 때 알베스의 얼굴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지 보았다. 사랑하는 것을 잃고 무너진 것은 비단 레먼뿐이 아닐 것이다.

알베스는 엘디카를 사랑했구나.

그러니 엘디카의 소명을 물려받은 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소멸만이 약속된 운명에서 자신을 빼돌리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겨 낼게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해내고 싶어요. 이 운명이 제게 찾아온 데는, 다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리고…… 제가 규율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혼돈은 누가 막겠어요?”

치기와 만용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해내 보고 싶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이 두려워 도망친다면, 비겁하게 레먼의 등 뒤에 숨어 그의 안전한 연인으로만 남는다면.

그렇다면 레먼의 사랑을 받으며, 레먼을 사랑하며 떳떳할 수 있을까?

소티스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의지가 있었다.

“사랑은 포기하는 힘이 아니라, 해내는 힘이라고 믿어요.”

포기하고 도망치는 삶을 살 거였다면, 그때 레먼의 손을 잡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구도 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을 때 조용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 소티스는 이 세계에 남기를 선택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더 강해져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로 다짐했다.

누군가 혼돈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수려 한다면.

가루가 되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맞서 싸우리라.

“각성에 대해 알려 주세요.”

알베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무언가를 확인하듯 소티스의 푸른 눈을 끝없이 들여다볼 뿐이었다.

마치 무언의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듯했다.

너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소티스가 눈길로 대답했다.

저는 후회할 거예요. 사람이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선택하게 되지요. 그리고 자신이 가지 않았던 길을 끝없이 돌아보며 후회할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어쩌면, 혼돈과의 전쟁에서 지칠 때마다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몰라요. 그때 규율의 길을 포기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안전하고 편안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는 더 큰 후회를 부르겠지요. 무용한 삶을 살며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겠지요.

그러니 더 작은 후회를 위해 나아갈 뿐이에요. 후회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덜 후회하는 삶을 위해서.

“너는…….”

알베스가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엘디카를 아주 많이 닮았구나.”

참 신기한 말이었다. 어떻게 극찬 같으면서, 또 한탄 같을 수 있을까.

소티스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자 알베스가 그녀의 손등에 미지근한 입술을 내리며 말했다.

“이번 대의 규율을 살린다면, 우리는 그토록 고대하던 종전을 맞이할 수도 있겠구나.”

전쟁, 그리고 종전.

그 단어가 가져오는 섬뜩하리만치 차갑고 무거운 울림이 소티스의 가슴께에 납덩이처럼 얹히는 듯했다.

“각성이란, 한 마법사가 혼돈과 싸워 이길 힘을 갖추기 위해 맞이하는 세 단계의 발전을 뜻한다. 보통의 노력으로 쌓을 수 없을 만큼의 발전을 단기간에 이룩하며, 큰 고통을 수반하지.”

엄격하게 이어지는 말은, 꼭 일부러 겁을 주려는 듯 낮고 사무적으로 이어졌다.

“죽지는 않겠지. 다만 그뿐이다. 때로는 죽음보다 더욱 큰 고통이 찾아온다고 해.”

“괜찮아요.”

그녀가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다.

“견디는 건 자신 있어요.”

알베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두었던 조그만 상자를 꺼내 레먼에게 건넸다.

“부탁한 물건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레먼이 환하게 웃더니 상자를 받아 들고, 그 뚜껑을 열더니 소티스의 무릎 위에 놓아주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목걸이였다. 꼭 레먼의 눈동자처럼 반짝이는 호박색 보석과 부드러운 백색을 띤 진주, 그리고 상아색 끈이 이어진 장신구였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호박색 보석에, 정확히는 그 안에서 느릿하게 요동치는 어떤 빛의 흐름에 맺혔다.

“제 마력입니다.”

레먼이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영혼 인도자’로도 불립니다. 소티스 님께서 길을 잃었을 때, 혹은 위험에 처했을 때 이 힘이 도움이 되기를 바랐어요. 다만 마력이라는 건 불안정한 힘이어서, 물건에 담아 오래도록 보존하려면 그 강도를 아주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도왔다. 더불어 내 마력도 담았지. 녀석의 힘과 상성이 좋으니 도움이 될 게야.”

소티스가 머뭇거리다가 알베스에게 물었다.

“저…… 알베스 님.”

“그래.”

상자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알베스 님을 한 번만 안아 봐도 될까요?”

“…….”

어떤 대단한 이유나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위대하고 고단한 노인을 안아 주고 싶었다. 제게 다정한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어쩐지, 제게서 엘디카를 찾는 그 절실한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엘디카가 아니고, 엘디카가 될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그 선대 규율의 삶과 죽음을 관통했던 뜻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것이기에.

알베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티스는 상자를 쥔 채 천천히 일어나 알베스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사의 영혼은 따뜻하구나.

그래서, 자신이 마법사로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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