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67)화 (68/121)

제67화. 사람의 마음 (2)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일어났더니, 마리아네스가 왔다며 시녀들이 수선을 떨었다.

마리아네스는 혼자 오지 않았다. 무척 불만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옆에는 황제의 시종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는데, 소티스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다고 했다.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소티스 공녀님. 오렌지 껍질과 약초 몇 가지, 그리고 말린 꽃잎을 섞어 만든 약차입니다.”

마리아네스가 입을 비죽 내밀며 시종장의 말을 잘랐다.

“두통에 좋죠.”

“…….”

소티스는 조금 놀란 시선으로 시종장이 가져온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리본 장식이 달린 병에는 찻잎이 소복이 채워져 있었고, 그 밑에는 황제의 집무실에서만 쓰는 금빛 양피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두통에 좋다고 들었다. 낫지 않거든 의사를 부르도록.」

에드먼드의 필체였다. 소티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태어나 에드먼드의 쪽지를 받아 본 게 처음이어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거 말고 이걸로 드세요, 소티스 님.”

마리아네스가 제 불만의 원인을 떡하니 내보였다. 작은 사각형의 상자였다. 뚜껑을 열어 보이자, 안에는 에드먼드가 준비한 것과 정확히 같은 차가 담겨 있었다.

“웬일이래요?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종알거리듯이 투덜거리던 마리아네스가 시종장을 홱 돌아보았다.

“안 가시나요? 선물도 다 전하셨는데.”

“그게…….”

시종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깊이 내쉬더니 덧붙였다.

“폐하께서 이 차를 드시는 모습까지 확인하라 지시하셨습니다.”

“허어.”

“마실게요.”

소티스가 차분히 웃었다.

“식사한 뒤, 마리아네스 양과 함께 들지요. 그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돌아가시거든 제가 마시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전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드가 당부하기는 했지만, 소티스의 말마따나 그걸 확인하겠답시고 식사하는 모습까지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하겠다고 했으니, 시종장은 돌아가서 그녀가 원치 않아 돌아 나왔다고 보고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물러나자 마리아네스가 유리병을 쓱 밀고, 제가 가져온 차를 소티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로 마셔, 소티.”

소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날이 좋으니 정원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마리아네스는 오늘 있을 석찬에서 세톤느 제4왕자의 옆에 앉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왕족이잖아요? 결혼하면 분명히 세톤느에 와서 살라고 하겠지! 그게 싫어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외국 생활이라니. 폐하께서 소티스 님께 잘하면 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썩 그러지도 않았고요.”

소티스가 과일 접시를 친구에게 건네며 물었다.

“황성에서 지내는 것도 지겹다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슬슬 로즈우드 후작령으로 돌아가려고 했죠.”

“후작령으로? 후계자가 되시려고요?”

소티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 것에도 관심이 영 없어 보였는데.

“……그래야 베아툼이랑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잖아요.”

“……”

“소티스 님이 떠나고 나면, 저는 혼자가 돼요. 그렇다고 세톤느로 가 버리면, 사람들은 로즈우드의 외동딸이 황비 전하라고 생각하겠죠.”

소티스는 말문이 막혀 포크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몰랐다. 항상 당당하고 쾌활하며 하고 싶은 말은 뭐든 거침없이 해내기에 어딜 가서도 사랑받고 즐겁게 지낼 줄 알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사람들이 마리아네스를 사랑하는지가 아니라, 마리아네스가 누구의 곁에서 즐거울 수 있는지였다. 그리고 그녀는 소티스를 가장 좋아했다.

하나뿐인 친구가 황성을 떠나면, 당연히 외로워질 수밖에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티스는 조금 미안해졌다.

“차라리 세톤느 왕자를 사랑했다면 편했겠죠?”

마리아네스가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넉살 좋게 웃었다.

“아니면, 베아툼의 마법사들이 피아노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든가.”

“좋아합니다.”

부드럽고 익숙한 목소리에 소티스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레먼이 빙그레 웃으며, 들고 있던 찻잔을 소티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깜짝 선물을 드리려고 궁에 몰래 들어갔는데, 마침 밖에서 식사 중이셨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과도 좀 넉넉히 챙겨 올 걸 그랬습니다.”

레먼이 내려 둔 찻잔에서는 은은한 오렌지 향이 났다. 소티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오늘은 이 차 선물을 많이 받네요.”

“……저 말고도 소티스의 두통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마리아네스가 재빨리 외쳤다.

“제 몫은 뇌물이기도 하거든요!”

“뇌물?”

“네. 석찬 자리를 바꿔 달라는 뇌물이요. 십중팔구 왕자의 옆자리일 테니까요.”

소티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제 자리는 폐하의 옆자리일 텐데요.”

“그 반대편은요?”

소티스의 옆에 에드먼드가 앉는다는 사실에 심경이 조금 복잡해진 레먼이 손을 슬쩍 들었다.

“제 자리입니다.”

“친구에게 하루만 양보해 주세요, 그 옆자리! 두 분은 앞으로도 쭉 함께 계실 거잖아요.”

마리아네스가 양손을 맞잡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숫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녹색 눈동자였다.

레먼이 선선히 웃었다.

“좋습니다. 제가 바꿔 드릴게요.”

“와!”

진심으로 기뻐하던 마리아네스가 레먼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럼, 그 값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제가 두 분의 즐거운 데이트를 위해 눈치껏 비켜 드릴게요. 저녁에 봐요!”

날아갈 것처럼 멀어지는 마리아네스를 보며 소티스와 레먼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실 줄 알았다면 기다렸다가 아침 식사를 함께 했을 텐데요.”

소티스가 고개를 들자 레먼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괜찮습니다.”

“제가 석찬 때 폐하의 옆자리로 배치된 것도요?”

“아하하, 그건 사실 안 괜찮지만…….”

레먼이 그녀의 옆에 몸을 내리며 이어 말했다.

“소티스 님의 마음이 제 몫인 걸 알아서 불안하지는 않아요.”

그녀가 작게 웃으며 레먼의 손을 쥐었다.

“전 황후라는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레먼.”

꼭 칭찬하듯 레먼의 뺨을 쓸어 주던 소티스가 물었다.

“그나저나, 차를 주러 오신 건가요?”

“아, 그게.”

그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석찬 전에 뵙길 청하셨어요.”

“……저를요? 알베스 님께서?”

“네.”

레먼이 말하기를, 알베스가 두 사람과 긴밀히 상의할 것이 있으니 따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편히 대화를 나누기에는 황후궁만 한 곳이 없으니 이곳으로 모셔도 되겠냐는 질문에 소티스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수심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타국의 대마법사가 제게 상의할 일이라는 게 대체 뭘까. 혼돈에 관한 일인가? 하지만, 그건 정식 회의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소티스는 문득 알베스가 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던 것이 생각났다. 뭘 단단히 밉보이기라도 한 걸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괜찮을 거예요.”

레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점심 즈음에 잠시 뵙고 석찬 준비를 하시면 될 겁니다. 두어 시간쯤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함께 있어도 될까요?”

“……네.”

소티스는 얼른 웃어 보였지만, 긴장한 탓에 다소 어색한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소티스 님. 춤을 알려 주세요.”

“춤을요?”

“예. 당장 내일이 연회잖아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 연회에서 춤을 춰 본 적이 없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아툼에는 사교 모임이 없나? 아무리 마법사의 나라라고 불려도, 왕족과 귀족이 있을 텐데.

소티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배우기는 했습니다. 왕실 연회에 얼굴을 비쳐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기본 소양 삼아 익히기는 했거든요. 다만 직접 춤을 신청해 본 적이 없어서요.”

“…….”

“함께 춤추고 싶다고 생각한 건 태어나서 소티스 님이 처음입니다.”

레먼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소티스 님과 춤을 추고 싶어요. 도와주시겠습니까?”

사실 그녀는 춤이라면 지긋지긋했다.

황후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연습했지만, 정작 에드먼드와 춤을 춘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언제나 정부의 손을 잡고 댄스 홀로 먼저 나가 버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안도감인지 실망감일지 모를 모호한 감정만을 느꼈던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와 춤을 추고 싶었다. 그의 한마디만으로 벌써 연회가 기다려졌다. 태어나 기대해 본 적이라고는 없었던 행사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얼마든지요.”

소티스가 웃었다. 시녀들을 불러 오늘 일정을 일러 주자, 발 빠른 애나가 알베스를 찾아갔다. 다른 시녀들은 정원의 탁자를 치워 공간을 마련한 뒤 마법 축음기를 가져왔다.

이내 초여름에 어울리는 경쾌한 음악이 작은 정원에 퍼지자, 소티스가 레먼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에게 춤을 청해도 될까요?”

“……기꺼이 수락하지요, 나의 숙녀.”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레먼은 긴장한 탓인지 이따금 허둥거렸다. 발이 꼬여 한 번은 소티스를 놓칠 뻔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소티스는 괜찮다며 웃었지만, 레먼은 동요한 듯 미간을 구기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별일 아니에요, 레먼. 그저 실수잖아요.”

“그래도…… 제 실수가 소티스 님의 평판으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녀는 수심으로 가득한 호박색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매 순간 자신의 입장부터 생각할 수 있을까.

“저는 그게 더 이상 두렵지 않아요.”

소티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누가 무어라 힐난해도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삶을 지지하는 최고의 아군을 만났으니까. 그리고, 그 아군이 말해 주었으니까. 당신은 그런 것에 깎여 나가기에는 너무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저를 자유롭게 만든 건 당신이니까요, 레먼.”

그래. 그저 실수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자신은 왜 그렇게 실수할 때마다 벌벌 떨어 댔는지.

소티스는 맞잡은 손을 힘껏 끌어당겼다.

그대로 두 사람은 정원에서 아무렇게나 춤을 추었다. 그건 왈츠도, 샤콘도 아니었다. 어떤 박자에도 가둘 수 없는 자유로움이 싱그럽게 흘러넘쳤다. 얼싸안고, 손을 잡고, 비틀거리고, 격의 없이 웃고, 빙글빙글 돌며 풀밭을 마음껏 누볐다.

초여름의 따스한 볕이, 두 사람의 긴 머리카락이,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뜨린 웃음소리가 뒤섞여 하늘하늘 흘러갔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의자에 걸터앉은 레먼이 숨을 살짝 몰아쉬며 소티스를 올려다보았다.

“요즈음의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소티스 님은 절대로 모르실 거예요. 하루하루가 꿈 같아서, 그래서…….”

그가 작게 덧붙였다.

“두려워요. 높이 난다는 건, 그만큼 까마득히 낮은 곳까지 추락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니까요.”

레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찬란한 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그 뒤에는 어떤 상실의 암흑이 기다리고 있을까. 끝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치미는 것은 지금이 너무도 행복한 까닭이리라.

“레먼.”

소티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아, 제 몸에 기대게 했다.

두근, 두근, 두근.

조금 빠른 듯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귀와 뺨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저는 여기 있어요.”

“…….”

“알아요.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으니, 태어난 모든 것은 미래를 두려워할 운명을 부여받은 거겠죠. 저 또한 그렇고요.”

“소티스 님.”

“그래도 저는 여기 있어요. 당신 곁에. 그러니, 이 현재가 과거로 흘러가 버리기 전에…….”

아, 레먼이 작게 탄식하며 그의 태양을 꽉 끌어안았다.

“저를 조금 더 사랑해 주세요. 그걸로는 안 될까요?”

“사랑해요.”

“…….”

“사랑해요, 소티스 님.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소티스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사람이 너무 행복하면, 문득 울고 싶어지기도 하는구나.

“저도요.”

“…….”

“저도요, 레먼.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해요. 제 삶에서 그런 사람은, 오직 당신뿐일 거예요.”

그건 태어나 처음으로 전해 보는 듯한, 열렬한 사랑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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