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사람의 마음 (1)
알베스와 사절단을 맞이하는 일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어차피 본격적인 이야기야 회의 때 충분히 할 테니, 지친 이들을 붙잡고 골머리 앓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베아툼의 손님들이 귀빈용 건물을 안내받는 모습을 확인한 소티스는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연회 이후 정식으로 회의가 열리기 전, 조금이라도 마법 연습을 해서 힘을 보태고 싶기도 했다.
몸을 돌리자마자 찌르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과 함께 몸의 중심을 잃어, 소티스는 급히 목장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나 그로도 부족했는지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턱, 순간 누군가 팔을 뻗어 허리를 감았다. 소티스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반사적으로 고맙습니다, 하고 대답하려던 차였다.
“괜찮나?”
에드먼드였다. 그 남자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채 소티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아니, 못마땅한 듯 그녀를 아래위로 뜯어보던 평소의 시선과는 어딘가 조금 달랐다.
……마치 그녀의 안색을 살펴보는 듯했다.
“안색이 좋지 않군. 일이 많은가?”
황당해진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소티스는 잠시 멍한 얼굴로 에드먼드를 올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괜찮습니다.”
에드먼드의 표정에 미묘한 불쾌감이 어렸다.
“그대는 항상 괜찮다고 하더군. 하지만 괜찮지 않을 때가 더 많았지.”
“…….”
“새삼스럽다는 표정 지을 것 없어. 이제 깨달을 뿐이니까. 아마 황성에서 이 사실을 가장 늦게 안 사람이 바로 나인 것 같더군.”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람의 마음이었겠지. 에드먼드는 조그맣게 읊조리며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소티스의 얼굴이 보였다. 새삼 보니 너무 작고 희어서 위태로워 보였다. 잔뜩 경직된 얼굴 때문에 더욱 창백하게 느껴졌다.
식사는 제대로 챙기는 건지. 그때도, 뒤뜰에서 불렀을 때도 실컷 음식을 차렸건만 손도 대지 않았다. 어디 그때만 그랬던가? 과거 황후로서 어딘가에 참석해야 할 때도 예의상 먹는 시늉만 했을 뿐 제대로 배를 채운 건 아닌 듯했다.
그간 어떻게 외면했는지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뇌리를 어지럽게 채우는 장면 속 소티스는 언제나 슬픈 표정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무언가를 감내하고 있었으며, 고요히 절망하고 있었다.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담겼다.
“나는…….”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소티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 굳어진 어깨는, 어떤 말이 들려와도 상처받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네게 그런 사람일까.
나는 너를 아프게만 하는 사람일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반증이라고 내보일 것이 없어서, 놀랍게도 그 사실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몰랐어.”
에드먼드의 작은 목소리에 소티스가 평온히 대답했다.
“아뇨, 폐하.”
고통을 삼키는 모습이 익숙해 보여서, 그는 속이 절로 꼬이는 기분이었다.
“모르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 말은 가시처럼 날아와 에드먼드의 속에 아프게 박혔다.
소티스의 말이 옳았다. 알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무언가를 견뎌야 했을 때는, 대개 에드먼드의 옆에 있었을 때였으니까.
소티스는 그에게 기대 있다가, 그 어깨 너머로 저를 바라보던 핀과 눈이 마주쳤다.
핀은 에드먼드를, 그리고 소티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부른 배 위에 손을 얹은 핀은 어쩐지 조금 슬퍼 보였다.
“소티스 님.”
알베스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상황을 늦게 파악한 레먼이 소티스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에드먼드가 여전히 못 미더운 표정으로 소티스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자, 레먼은 반대편에 선 채 어딘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드먼드는 소티스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레먼이 저를 상대로 질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소티스의 안색이 여전히 나빴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레먼이 무어라 말할 말을 찾을 때였다.
“폐하. 배가 뭉쳐서 아픈데, 별궁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먼발치에서 바라보고만 있던 핀이 나섰다.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에드먼드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소티스에게서 떨어졌다.
“배가 아프다고? 입덧도 잘 안 하더니.”
“아무리 속을 안 썩이는 아기라고 해도 열 달 내내 편할 리가 없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에드먼드에게 쏠렸다.
황실의 첫아기였고, 어떤 세력도 없이 황비가 된 여인이었다. 거절하기에 모양이 좋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알겠다고 하자마자 레먼이 다가와 소티스의 어깨를 감쌌다. 어딘가 간절하면서도 불안해 보이는 눈길에 그녀가 살짝 웃어 주었다.
“스승님, 제 거처까지 부축해 주시겠어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소티스는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레먼의 손을 잡았다.
비 맞은 강아지 같다. 이제 와 에드먼드가 저를 사랑해서 데려가려고 할 리도 없을 텐데,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그러는 건지.
하지만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을 잃을 어떤 순간을 가정하며 쉽게 불안해지는 일이겠지. 이 또한 레먼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큰 이 남자가 퍽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두통이 갈수록 심해지시는 것 아닙니까? 의사를 부르는 게 좋겠어요. 일도 조금 줄이시는 게 좋겠고…….”
황후궁에 도착하자마자 레먼이 답지 않게 잔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목장을 옆에 두고, 그녀를 침대에 앉혀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정말 괜찮아요.”
소티스가 옆에 앉아 달라는 듯 침대가를 가볍게 두드렸다.
“한 번씩 어지러운 것뿐이에요. 어쩌면 긴장해서 더 크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보통은 어지럽지 않은 게 정상이잖습니까.”
“……지금은 정말 괜찮은데.”
“제가 없을 때 아프실 것이 걱정돼요.”
“그럼 그런 순간을 줄이면 되겠네요.”
말뜻을 알아차린 레먼이 붉어진 얼굴로 소티스를 내려다보았다. 연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정말 안 앉으실 거예요? 레먼.”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당장에라도 앉고 싶었지만, 그녀는 지금 불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신 다음에 마저 이야기해요. 괜찮으시다면…….”
그가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소티스 님께서 잠드실 때까지 곁에 있고 싶어요.”
소티스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는 동안, 시녀들이 여분의 옷을 가져와 레먼에게 내밀었다. 레먼이 소티스에게 다정한 것을 알기에 시녀들도 그를 기껍게 여기는 편이었다.
“주무시고 가시나요?”
시녀 한 명의 순진한 물음에 레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 아닙니다! 소티스 님께서 잠드시는 모습만 확인하고 바로 돌아갈 겁니다!”
“어머나.”
“마법사님, 얼굴이 사과 같아요.”
“두 분께서 함께 계시는 게 이상한 일인 것도 아니고…….”
문 너머에서 재잘거리는 소리에 소티스의 뺨까지 화끈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시녀들에게 장미 향유까지 빌려 온 레먼은 소티스에게 돌아왔다. 침대가에 앉은 그는 소티스에게 잠시 돌아앉으라고 한 뒤, 향유 몇 방울을 제 손바닥에 떨어뜨리고는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얹었다.
“서류 보실 때 고개를 앞으로 너무 숙이지 마세요, 소티스 님. 목에 나빠요.”
“……습관적으로 자꾸 그렇게 돼요.”
소티스가 작게 웃으며 제 머리를 손으로 빗어 앞으로 넘겼다. 레먼은 드러난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폐하께서 소티스 님을 봐요.”
“그런가요?”
“줄곧 소티스 님을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는 폐하를 떠난걸요.”
레먼이 투정을 부리듯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소티스를 가볍게 껴안았다.
“소티스 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저라는 걸 압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고요?”
“……어떻게 좋아하겠습니까?”
“후회하시는 거겠지요.”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드먼드는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소티스는 레먼의 어깨에 턱을 괸 채 가볍게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사람으로서의 마음일 테니까.”
레먼이 재차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더 밉습니다.”
“네?”
“사람으로서의 마음이라면, 진작에…….”
진작에 잘해 주었어야지. 그녀에게 조금만 더 살뜰했더라면, 다정했더라면, 그녀가 해냈던 것을 응원해 주었더라면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차라리 에드먼드가 그런 사람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의 비겁함을 보고 만다. 그가 그런 사람이어서, 그래서 제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좋은 남편이자 황제였다면, 소티스는 죽는 날까지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였을 테니까.
“제 마음은 당신의 몫이에요.”
소티스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조그만 손으로 레먼의 뺨을 감싸고 이마를 맞대더니,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포갰다.
“저는 제 마음을 잘 알아요. 흔들리지 않을 자신도 있어요. 설령 에드먼드 폐하께서 아주 뒤늦게, 다시 저를 사랑하시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하면서도 참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기다렸던 에드먼드의 마음을, 소티스는 이제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그의 사랑 같은 건 그녀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에드먼드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응당 사람으로서 품어야 할 마음일 뿐,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가 에드먼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은, 제가 레먼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레먼이 저를 이렇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다.
그와 주고받고 싶은 것, 그리고 그와 함께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다.
거기에 에드먼드는 없었다.
“제가 에드먼드 폐하를 사랑할 일은 없어요.”
레먼이 꼭 울 것처럼 웃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소티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살짝 웃자 실바람 같은 숨결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 열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