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65)화 (66/121)

제65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4)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레먼이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는 꽃다발을 갈무리해 화병에 담아 온 시녀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본격적으로 마법 수업에 들어갔다. 미리 준비해 왔다면서 각종 마법학 저서나 마법 관련 역사서를 꺼내는 손길이 퍽 바지런했다.

“이제 슬슬 복잡한 마법도 하나쯤 배워 볼 때가 되었어요. 소티스 님의 마력이 제 생각보다 빠르게 커지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레먼이 제자를 가르쳐 보는 일이 처음이라 저 또한 준비할 것이 많겠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러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의아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소티스 님?”

“…….”

“소티스 님.”

“……아, 네.”

소티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나요?”

레먼은 책을 옆으로 밀어낸 뒤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은데…….”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려던 소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긴 소파에 나란히 앉은 레먼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사실 조금 피곤해요. 요즘 자는 시간이 계속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두통도 자주 느끼고요. 못 참을 것 같을 때는 약을 구해 먹긴 하지만…….”

그가 머뭇거리다가 소티스의 이마를 살짝 쓸어 주었다.

“약을 찾으실 정도인가요?”

“가끔은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손이 살짝 움직였다. 그녀는 길게 내려온 레먼의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제가 도맡아 하던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인계받을 수 있도록 서류로 정리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양이 꽤 되더라고요. 까다로운 일도 많고요.”

“그만큼 소티스 님께서 그간 많은 걸 해내고 계셨다는 거겠죠.”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걸요.”

“아하하.”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예전부터 준비해 둔 것도 있어요. 아마 폐하의 탄신 연회 이후로, 며칠만 더 노력하면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소티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조금 뿌듯한 듯 웃음기를 머금고 있기까지 했다.

좋은 마무리라는 건 때로는 성과보다도 중요했다. 어떤 일의 끝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남는다.

그러니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모두에게 좋은 황후로 남을 수도 없고, 더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떠나기를 바랐다. 어떤 이야기가 행복하거나 후련한 결말이 담긴 온점으로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오로지 그녀 자신을 위해서.

“저를 위한 일이에요.”

레먼이 다정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저도 좋아요.”

짧은 침묵 후에 소티스가 말했다.

“예전에는 그 일들이 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쓸모 있는 황후. 현명한 안주인. 그것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고, 사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 새장이 얼마나 비좁게 느껴지던가. 자신이 평생 해냈던 일 또한 물론 가치 있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글자가 아닌 현실로 나아가 세상을 만나고, 바꾸고,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변화가, 이 모든 놀라운 흐름이, 마치…….

“기적 같아요.”

소티스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레먼, 당신을 만난 이후 제가 선택하고 해낸 모든 일이 꼭 기적처럼 느껴져요.”

레먼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손끝에 낱낱이 입을 맞추며 웃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소티스 님께서는 기적 같은 분이시니까요.”

온화한 침묵이 흘렀다. 두통을 느낀 소티스의 말수가 줄어들자 레먼은 오늘 수업은 여기서 그만두는 게 낫겠다며 휴식을 제안했다. 그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리자, 레먼은 소티스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 시선을 맞추었다.

오묘한 호박색 눈동자였다. 동공은 광물 같은 광택을 지녔고, 전체적으로 이질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독특했다. 소티스도 처음에는 이 눈이 무척 낯설고 어색했다. 실제로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시선을 슬쩍 돌린 적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남들은 여전히 어려워한다던 그 한 쌍의 눈이 제게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눈동자가 저를 얼마나 다정히 살피는지 알고 있으니까. 행복하거나 때로 감정이 사무치는 순간, 그 눈동자에서 얼마나 투명하고 따뜻한 눈물이 흐르는지도 알고 있으니까.

레먼의 손길이 소티스의 얼굴 곳곳을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두통 때문에 찡그려진 미간은 물론이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듯한 눈매, 보드라운 뺨, 미미한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와 턱에서 귀로 이어지는 경사를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이윽고 그 흐름에서 어떤 고요하고 절실한 부탁을 읽어 낸 소티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맞춤을 허락하듯 미동 없이 연인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머뭇거리면서도 점차 다가갔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아서,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내렸다.

소티스가 그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살짝 얹고 눈을 가늘게 떴다. 물빛 눈동자에 그의 얼굴만이 가득 맺혔다.

그렇게 막 입술이 맞닿으려 했을 때.

똑똑.

“…….”

시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은 불에 덴 듯 놀라 떨어졌다. 레먼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고, 소티스는 가슴께에 손을 얹고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소티스 님, 오늘 베아툼의 사절단이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성루에서 보았으니 앞으로 두 시간도 안 걸리겠어요.”

베아툼의 사절단. 그 말에 레먼이 가까스로 평정을 찾았다.

“알베스 님께서 오시려나 봅니다.”

“알베스 님…….”

“예, 제 스승님이시지요. 마법사로서 가장 오래 함께 지낸 분이기도 합니다.”

문득 소티스는 저나 시녀들이 아닌 다른 이들이 레먼을 공석에서 ‘페리윙클’이라고 자주 부르던 사실을 깨닫고 물었다.

“베아툼에 알베스 마탑이 있나요?”

레먼이 빙그레 웃었다.

“맞습니다. 베아툼에서 가장 오래된 마탑인 알베스 탑의 주인이시지요. 조화와 정돈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는 시녀를 통해 베아툼의 마법사들이 공식 행사 때마다 입는다던 마법사복을 준비시켰다고 한 뒤 설명을 이어 갔다.

“스승님께서는 현재 대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마탑을 지키신 분입니다. 그래서 본명을 아는 이가 거의 없지요. 물론, 스승님께서 그 본명을 무척 싫어하신다는 이유도 큰 몫을 했지만요.”

“그럼, 그냥 알베스 님이라고만 불러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충분해요.”

키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쉬웠지만, 더 중요한 일이 생겨 버렸다. 두 사람은 머뭇거리지 않고 떨어져 사절단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애나를 시켜서 레먼 님의 의복도 가져오라고 할게요. 이쪽에서 함께 움직이시는 게 어떠세요?”

조금이라도 오래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시녀의 제안에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좋아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그마한 황후궁에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빈틈없이 차올랐다.

***

처음 입는 옷은 어색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편했다. 허리를 졸라매는 코르셋이나 위태로울 만큼 높은 구두를 신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주홍색 실로 자수를 놓은 흰옷은 걸친 것만으로도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법사를 상징하는 목장을 쥔 소티스는 레먼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알아챈 레먼이 소티스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안심됐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소티스는 이내 한 점 두려움 없이 베아툼의 사절단을 맞이했다.

“알베스 마탑의 주인이 멘데즈의 땅을 밟아 마땅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립니다.”

선두로 들어선 가장 큰 마차에서 정정한 노인이 내렸다. 그가 에드먼드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멘데즈의 태양,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 폐하를 뵙습니다.”

목깃을 덮을 정도로 긴 잿빛 머리는 부스스해 보였다. 멀끔하면서도 깐깐한 인상의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 예리한 시선에 본궁 앞에 나와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기껏 평온을 찾았던 소티스 또한 동요하여 주먹을 꼭 쥐었지만, 그래도 황후로 살며 귀빈을 자주 맞이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이내 조금이나마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에드먼드, 핀, 레먼, 마리아네스를 살펴보며 인사를 남기던 알베스가 걸음을 옮겨 소티스의 앞에 섰다.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

“……네.”

그의 앞에 서자 별안간 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표정이 구겨지면 안 되는데. 소티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작게 대답했다. 눈을 보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고개를 얼른 들었다.

최대한 웃어 보였는데, 그 표정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알베스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끝이 올라간 회색 눈썹 때문에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소티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게 집중된 시선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두어 걸음쯤 물러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발꿈치에 최대한 힘을 주고 견뎠다.

“베아툼은 타국의 마법사를 자국민처럼 지원하고 보호하오.”

“고맙습니다.”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을 통해, 그대가 ‘규율’이 되었음을 들었습니다. 원로회의 진정한 주인이신 국왕 전하께서도 새 마법사를 뵙고자 하십니다.”

어차피 베아툼에 한 번은 가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명료한 말투로 대답했다.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요청을 받듭니다. 또한, 혼돈으로부터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한 숙명을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그렇다면 마탑의 주인으로서 대마법사의 숙명 또한 마땅히 받들겠소.”

알베스가 소티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베아툼의 사절단이 모두 그 뒤에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내내 그녀의 옆을 말없이 지키던 레먼 역시 목장을 내리고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베아툼의 마법사들이 새로운 규율을 뵙습니다.”

“베아툼을 보호하신 가장 위대한 마법사의 후손을 지키기 위해.”

“규율을 위하여.”

마법사들이 입을 모아 소티스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규율을 위하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