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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64)화 (65/121)

제64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3)

소티스 메리골드는 그저 ‘소티스 메리골드’였다.

그녀는 공작의 딸도, 황제의 아내도 아니었다.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점차 소티스 메리골드 자신으로 거듭났다.

유약하지만 끝없이 다정한 여인. 눈부시고 현명한 사람. 감정적이지만 인정을 베풀 줄 알고, 어떤 위기 속에서도 단 하나의 희망을 짚어 알려 주는 이.

“소티스 님, 귀빈 맞이에 필요한 정산서인데 계산이 틀린 곳이 있습니다.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공녀님! 아이고, 경비병들의 물자 보급이 뚝 끊겼습니다. 가격 인상을 해 주지 않으면 면포 한 장도 더 대지 못한답니다. 도와주십시오!”

“저어, 며칠 전에 옮겨 심은 화초들이 다 죽어 버렸어요. 좋다는 영양제는 다 뿌려 준 것 같은데 차도가 도저히 없어서…… 소티스 님께서는 화초를 정말 잘 돌보신다지요. 혹시 비결을 알려 주실 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황후궁을 찾았다. 그들은 마법사가 된 소티스에게 연신 선물을 나르면서도 눈치를 살피며 해답을 구했다.

“그깟 꽃이 다 뭐랍니까? 국무가 먼저지!”

“어머? 무슨 염치로 귀족들의 책무를 떠넘긴답니까? 소티스 님은 황후가 아니신걸요? 자작님께서 해결하셔야죠!”

“연회! 연회가 당장 사흘 앞입니다. 석찬이 엉망이 되고 있다고요. 제발 살려 주십시오! 멘데즈의 위신이 엉망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그녀는 언제 황성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세상 모두가 그녀에게 눈부신 날개가 있음을, 그것을 펼쳐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족들은 그녀가 국무에서 손을 떼자 나라가 얼마나 엉망진창이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소티스가 그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해냈던 일들이 멘데즈를 어떻게 떠받쳤는지 깨닫고 나자, 그들은 소티스를 소심하고 약하다고 은근하게 비웃었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소티스가 에드먼드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 긴 시간은 이제 누구에게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황제가 그녀에게 어떤 적대감도 드러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드디어 에드먼드조차도 그 현명한 여인을 몰라본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며 고소해하기도 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요한 건 소티스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기쁘게 사람들을 맞이했고, 고민이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했으며 제가 도맡았던 일들을 성심껏 도왔다.

“소티스 님.”

그렇게 부르는 게 좋아서,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웃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도 자연히 기뻤다.

“……그동안 죄송했어요, 정말로요.”

이제는 그 말에 괜찮다고 웃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소티스는 사실 황성의 일을 돕는 것이 즐거웠다. ‘소티스 메리골드’가 이 나라에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은 제가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 주는 부목과 같았다. 그러니 황후가 아닌 지금, 어떤 의무나 책임도 감히 저를 얽매지 못하는 지금조차도 그 일들을 기꺼이 해내 주는 것이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황성에서의 무탈한 하루를 보낼 때면, 소티스는 그 평화로움에 몇 번이고 위로받곤 했다.

그러니 해낼 수 있는 일은 해내야지. 기꺼이 선택한 일이니까.

그러면서도 소티스는 마법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일과의 홍수 속에서도 꿋꿋하게 마력 운용을 연습하고, 마법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연습을 했다.

황성 안에는 아무래도 다친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아픈 사람들을 상대로 치료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아름답지 않다고 버려지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황성 곳곳을 장식하다 철이 지나 버려진 꽃들이 황후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소티스는 그 꽃들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돌려주는 연습을 했다.

“이제는 빛 마법도 제법 쓰실 수 있는 것 같아요.”

“빛과 불 마법은 비슷한 거예요?”

“……죄송해요, 소티스 님. 저희가 너무 번거롭게 해 드렸다면 어떡하죠. 아무래도 마법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다 보니, 신기한 마음을 감출 방법이 없네요.”

소티스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녀의 손끝에 조그마한 빛이 맺히더니, 레먼이 선물했던 향초의 심지에 불이 붙었다. 곧 은은하면서도 나무 타는 듯한 향이 연기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티스는 동그란 물방울을 얼려 음료수 위에 조약돌처럼 작은 얼음을 네댓 개 띄워 보기도 했다. 투명한 얼음이 잘그랑거리며 유리잔을 채우자, 시녀들이 탁자 주변에 몰려들어 눈을 빛냈다.

“시원하겠다!”

“소티스 님, 직접 마셔 보실 건가요?”

“아뇨. 차를 많이 마셔서 그다지……. 누구 마셔 보고 싶은 사람 있어요?”

“저요!”

“저, 저도요!”

“제가 마시면 안 될까요?”

“저도…….”

시녀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며 자신이 마셔 보겠다고 하는 틈바구니에서, 애나 역시 조그만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애나가 마실래?”

시녀들이 손을 내리며 가장 어린 애나에게 음료수를 양보했다. 소티스는 작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유리잔을 애나의 앞으로 옮겨 주며 조잘거리는 모습에는 망설임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래, 오늘 예법 연습한다고 고생도 많이 했잖아.”

“배고프지? 과자도 가져다줄까?”

“마셔 봐. 자.”

애나는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올리고 드레스를 입은 애나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음료수를 마셨다. 꼬마 요조숙녀처럼 보이는 행동에 시녀들이 손뼉 쳤다.

“많이 늘었죠, 소티스 님?”

“아무래도 소티스 님께서 곁에 자주 두실 것 같아서, 하녀가 아니라 시녀처럼 가르치고 있답니다.”

소티스는 고맙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와 하녀는 엄연히 다른 직책이다. 소티스의 시녀들은 적어도 지방 귀족들이나 수도 근방 소귀족의 딸이었으며, 제 집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평민 출신의 아이를 저들과 같은 시녀로 인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오로지 소티스의 선택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표현이었다.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그나저나, 소티스 님. 레먼 님과는 어떻게 되어 가는 건가요?”

레먼 페리윙클로 주제가 옮겨 가자 소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연신 손부채질하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레먼과 연인이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어느새 그에게 기울어 버린 마음은 자각하고 난 뒤에는 너무나 커져 있어서, 문득 그 감정을 꺼낼 때마다 놀랄 정도였다.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명백했고, 함께 걸을 때면 가슴이 뛰었고, 가까이에 있는 손을 끌어다 쥐면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만 애석한 것은, 거기까지였다는 점이다. 그 설레는 과정을 만끽하기에 소티스와 레먼이 너무 바쁜 탓이었다. 레먼은 사절단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연일 보고서를 쓰거나 혼돈에 관련된 방책을 마련하고 있었고, 소티스는 황성의 일을 돕고 담당자가 없어 엉망이 되어 가는 석찬 준비에 힘을 보탰다.

이틀에 한 번은 얼굴을 볼까, 그리움마저도 느낄 시간이 많지 않을 만큼 바쁜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하지 못하고, 레먼과 연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져오는 어색함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레먼 님이 예전부터 소티스 님을 좋아하셨던 거죠?”

“보면 몰라? 첫눈에 반했을걸. 호호.”

“어머, 안목이 있으시네요! 솔직히 황성에 소티스 님만 한 분이 얼마나 있겠어요?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만요, 폐하께서 안목이…….”

“그건 맞아!”

“게다가 레먼 님께서 소티스 님을 보호하기 위해 제자로 삼으셨다지요? 마법사들은 평생 제자를 몇 명 들이지 않으신다던데.”

“어떡해, 너무 낭만적이에요!”

새처럼 재잘거리는 시녀들 사이에서 소티스만이 얼굴의 열을 식히느라 연신 곤혹스러웠다. 부끄러우면서도 싫지 않은 기분인 것을 보니, 그녀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레먼에게 푹 빠져 버린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바쁘기만 한 건 싫은데.

소티스는 문득, 그와 만날 시간이 너무 적어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신기하다. 통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그 사람의 곁에 머무르고 싶어지니까.

“어라.”

창밖을 보던 시녀 한 명이 작게 감탄하며 말했다.

“저희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요? 소티스 님, 레먼 님께서 오고 계세요.”

“정말?”

“어디 봐!”

시녀들이 얼른 창가에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더니, 이쪽으로 걸어오는 레먼을 발견한 듯 기쁜 기색으로 웃었다. 그러고는 차를 새로 내어 오겠다며 탁자 위에 있던 것들을 재빨리 치우기 시작했다. 어찌나 의욕적으로 굴던지, 그리 작지 않은 원형 탁자 위가 순식간에 말끔해졌다.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던 소티스도 결국 못 이긴 척 밖을 내다보았다. 조그맣게 보이기는 하지만, 착각할 여지 없는 레먼이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줄 선물인 듯 커다란 꽃다발까지 품에 안은 채였다.

그저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화병을 준비해야겠어요!”

애나가 명랑하게 말했다. 시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궁에 경쾌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5분쯤 지나서 레먼이 그녀의 방 앞에 도착했다. “스승님이 오셨어요.” 하며 말하는 시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웃음이 가득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소티스는 그저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싫으면서도, 도저히 침착하게 굴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서성거리며 손등으로 제 뺨을 쓸고,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빗으며 단장하는 사이 레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똑같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레먼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기까지 서둘러 와서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눈동자는 자잘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먼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가,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을 만지작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다시 들어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봄이 되어 꽃이 만개하듯, 그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마법 연습을 도와드리러 왔어요.”

“그, 그래요.”

“그리고…….”

레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함께 있고 싶어요, 소티스 님.”

소티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함께 있고 싶어요, 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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