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2)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외면하며 살았는지 깨달았다.
불현듯 찾아온 그 깨달음은 다소 충격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덕분에 에드먼드는 뒤통수를 한 대 거하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멍해지기까지 했다.
소티스가 그렇게 뒤뜰을 떠나고, 에드먼드는 잠시간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수 분 전, 그가 말했듯 그저 그녀의 생각만을 할 뿐이었다.
이내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에드먼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잡아야 해.”
소티스를 잡아야 한다. 앞으로 이럴 기회조차 거의 없을 테니, 그녀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때 조금이라도 제 쪽으로 끌어당겨야 했다.
사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그 자신도 잘 몰랐다. 그토록 밀어내고 싶었던 메리골드 공녀를 새삼스럽게 사랑하기라도 한 건 아닐 터였다.
다만 마음이 쓰였다. 지나간 시간 동안 무정했던 자신을 깨닫자, 부끄러워서라도 그것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었다. 아주 작게나마 오해가 있었다면, 그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치졸하고 이기적인 후회일지도 모른다. 제 마음 하나 편해지자고 부리는 추태라는 것도 안다. 이번에야말로 소티스가 지긋지긋하다며 화를 내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울지 마, 소티스.”
이제 그녀의 우는 얼굴은 그만 보고 싶었다.
어찌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겠는가. 그저, 마지막만큼은 그렇게 끔찍한 인간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뒤뜰을 나섰다. 마치 그 자체가 혼돈인 양 뒤엉킨 마음속에서 태양처럼 떠오른 단 하나의 이름을 위해 나아갔다.
소티스 메리골드.
소티스. 우리는 너무 늦었을까? 무엇이 우리를, 아니, 나를 이렇게까지 뒤늦게 했을까.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너를 사랑하기 싫었다. 그러니 이건 절대로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저 네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해.
네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간이 있었다는 게 놀랍고 괴상하게 느껴질 만큼.
“알아. 나는 엉망이야, 소티스.”
혼란스러운 내게 네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규율이 되어 줄 수는 없을까.
에드먼드는 어느새 중앙 본궁 앞 정원에 도착했다. 지나치게 서두른 탓에 숨을 가볍게 몰아쉬고 있었다.
이윽고 에드먼드는 초여름의 정원에서, 그의 히아신스를 발견했다. 꿈결처럼 어른거리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에드먼드는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
소티스는 다른 사람의 곁에 있었다.
그 남자는 베아툼의 대마법사, 레먼 페리윙클이었다. 그는 소티스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평소에는 서늘하고 이질적으로만 보였던 호박색 눈동자가 생기 넘치게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선 모습을 본 에드먼드는 속이 불쾌하게 뒤틀리는 감각을 느꼈다. 소티스의 얼굴에 떠오른 해사한 미소가, 그는 평생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무어라 다정스레 속삭이던 소티스가 레먼의 손을 쥐었다. 부드럽고 긴 손가락이 단단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 들며 깍지를 꼈다. 무척 따뜻하고 기꺼워 보였다.
에드먼드는 정말로 혼란스러웠다. 왜 그녀를 상대로 갈증 같은 아쉬움을 느끼는 걸까?
사랑이 아닌데. 사랑일 리가 없는데. 사랑이어서는 안 되는데.
사랑은 피니에 로즈우드에게 어울렸다. 핀에게 느꼈던 것만이 진정한 격정이며 불타는 듯한 사랑이라고 에드먼드는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왜 핀이 아니라 소티스에게 시선이 갈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제 선택이고, 그녀와 이혼한 것 역시 제 선택이었는데도.
동정? 죄책감?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에드먼드는 점점 작아지는 소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그녀가 없었던 삶이 없었기에 자신이 허망하고 혼란스러운 것이라 여기며, 신기루처럼 멀어지는 그 모습을 살필 뿐이었다. 까닭 모를 이 아쉬움에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폐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에드먼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메리골드 공작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부탁드리고픈 것이 있습니다.”
“말하도록.”
“곧 폐하의 탄신 연회이지 않습니까.”
공작의 웃는 낯은 다소 비열하게마저 느껴졌다.
“연회의 전날 석찬에 저희 딸아이를 초청하여 주십시오.”
황제의 탄신 연회 전날, 특별 석찬에는 연회에 참석할 이들 중에서도 귀빈으로 손꼽히는 이들이 초대된다.
올해 초대된 이는 국내외 귀족을 포함하여 모두 스물한 명으로, 스무 명에 피니에 로즈우드가 더해졌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공교롭게도 그 초대장을 모두 보낸 이튿날 베아툼에서의 전령이 도착했던 것이다.
베아툼의 사절단 대표로 오기로 한 대마법사, 레먼 페리윙클, 그리고 마법사가 된 소티스 메리골드까지. 세 사람은 특별 석찬에 초대될 자격이 충분했다. 오히려 그들을 귀빈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에드먼드의 국제적인 입장이 난처해질 지경이었다.
다만 이혼한 황후를 초대하여 식사하는 것이 겸연쩍을 뿐이다.
“그러지.”
에드먼드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메리골드 공작이 부탁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다만, 석찬을 진행할 탁자에는 스물네 명이 앉을 수 있네. 나를 제외한 스물세 명이 모일 수 있다는 뜻이지. 초대해야 하는 이가 베아툼의 대마법사, 레먼 페리윙클, 그리고 소티스 메리골드라면…….”
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공작의 자리를 반납하게. 그 자리에 그대의 딸을 앉히는 게 옳지 않겠나?”
공작의 웃는 낯에 실금 같은 균열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지요. 퇴물이 될 저보다는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옳을 테니까요. 아비가 되어서 어찌 자식의 앞길을 막겠습니까.”
에드먼드는 메리골드 공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서신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선황후가 선황제와 혼약을 맺기 전, 황가와 인연을 맺지 못할 것 같아 다른 남자를 만났으며 그 사이에 아이가 생겼음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했다. 그것을 중간에 가로챈 것이 메리골드 공작이었으며, 제 지위를 회복할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당시 황가의 아이는 에드먼드뿐이었으니, 그 서신 하나가 밝혀진다고 해도 황위 계승권을 완전히 박탈할 수는 없다.
다만 잡음은 생겼을 것이다. 황후의 세력을 다지는 데도 썩 좋은 영향은 주지 않았겠지. 아벨이 태어난 뒤로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황제를 쏙 빼닮은 차남이야말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황가의 적자였으므로.
다행히도 공작은 속 좁은 기회주의자였다. 에드먼드가 황태자가 되고, 제 딸을 그 약혼녀로 들이게 되어 황성을 드나드는 것으로 만족했다. 제 명성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황실의 혼란보다는 안위를 바랄 자였다.
안정적인 황실에서 자리를 잡아야만, 그의 명성이 최대한 오래 유지될 테니까.
“기뻐 보이는군.”
요즈음의 메리골드 공작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소티스가 쓰러졌을 때나 이혼한 뒤로는 내내 손에 닿는 건 뭐든 집어 던지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다니더니, 퍽 자애로운 척 웃는 꼴이라니.
에드먼드의 비웃음에 공작이 웃었다.
“딸에게 희소식이 찾아왔으니 좋을 수밖에요, 폐하.”
소티스가 멘데즈 최초의 영혼 마법사가 되었으니, 그 명성은 기대해 볼 만하다. 이혼했더라도 당분간 쫓겨나지는 않을 테니 만족하겠다는 건가.
에드먼드가 눈썹을 좁혔다. 불쾌감의 표시였다.
공작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진심 어린 감동이나 기쁨이 아니었다. 그건 기회주의자의 쾌감에 가까웠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자에게 소티스는 그저 도구에 불과했구나.
“그래서 그랬군.”
마리아네스가 제게 했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공작의 앞에서 에드먼드는 소티스가 아픈 것 같으니 돌보라며 본가로 보내 버린 것이다. 공작은 제가 드디어 아내를 내쳤다고 생각했고, 쓸모가 없어진 소티스에게 분개했을 것이다.
문득 그때의 소티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랐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소리 없이 벙긋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었다.
역겹다. 그는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메리골드 공작이 무어라 묻는 것 같았으나,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속에 세워 두었던 높직한 둑 하나가 무너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러는 거다.
공작이 돌아간 뒤에도 에드먼드는 자꾸만 소티스를 생각했다. 끝없이, 끝없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이 그녀가 끼어들었던 시절의 기억을 들추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중 어떤 것도 번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끝나 버린 이야기처럼, 단 한 줄도 고쳐 쓸 수 없는 과거에 불과했다.
제가 놓쳐서, 놓친 지 너무도 오래되어서, 되돌릴 수 없는 일들뿐이다.
“떠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에드먼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 말대로였다. 소티스는 사과조차 바라지 않았다. 다만 보란 듯이 그를 떠났다. 어떤 시정도, 책임도, 사죄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것 따위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모든 것이 낡고 삭을 운명에 처한 지금.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소티스.”
그가 정적 속에서 그녀를 불렀다.
“소티스.”
소티스 메리골드. 제 손에서 떠나보낸, 히아신스를 닮은 여인.
손에서 놓을 적에는 그저 시든 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꽃 피우는 법을 몰라 영원히 겨울 속에 버려져 있을 것만 같았는데.
“소티스.”
그대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지 말걸. 그랬다면 우리도 행복할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후회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후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더는 돌이킬 수도 멈출 수도 없을 때가 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