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1)
소티스는 에드먼드의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지? 그것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언짢은 건가? 그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다.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더 정확히는, 아쉬움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아쉬워한다고? 다른 일도 아니고, 소티스가 떠나는 일에?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만, 조만간 내려가야겠지요. 혼돈에 맞설 방법을 찾기도 해야 하고, 마법사로서 지원 또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베아툼은 배타적인 나라지만, 타국 출신이라도 마법사가 되는 순간 자국민처럼 대우하고 보호한다. 그 덕에 타지의 아이들이 마법사로서 발현하게 되면, 안전을 위해 베아툼으로 망명하곤 했다.
‘말이 그렇지, 실은 베아툼에 버려지는 거지만…….’
소티스는 쓰게 웃었다.
마법사가 되기 전의 어린아이들은 대개 이상 증상을 보였다. 그런 아이들은 불길하게 여겨지며, 베아툼의 국경 지대에 종종 버려졌다. 이후에는 아예 왕국에서 ‘스카우터’라고 불리는 이들이 건너와 타국과의 접경 지역에서 고아들을 살펴 데려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자라 베아툼의 왕실을 단단히 받치는 마법사가 되었으니, 타국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베아툼이 이제는 소티스를 인정하고 보호하려 하고 있었다.
“소왕국의 사절단이 나와 그대의 이혼을 따져 묻더군.”
에드먼드의 한숨 섞인 말에 소티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국교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제가 잘 말해 볼게요.”
그녀가 신중한 어조로 덧붙였다.
“저는 멘데즈의 국민이기도 하니까요.”
그 말에 에드먼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반대지. 그대는 멘데즈의 사람이다.”
마치 소티스를 힐난하는 듯한 말투였다. 소티스가 에드먼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멘데즈가 제게 따뜻한 보금자리였던가요?”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옳다. 멘데즈는 소티스에게 해 준 것이 없다. 심지어 자신은 그녀에게 다정한 남편도 아니었고, 자비로운 황제도 아니었다.
여태 모질게 굴기만 했으니, 이제 와 새삼스럽게 구는 꼴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래도.
왜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을까. 소티스는 죽어서도 멘데즈에만 있을 것 같았다. 꽃이 한평생 한 줌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듯이, 그녀도 늘 여기에 있을 것 같았다.
참 모순적인 생각이었다. 그녀가 제 인생에서 나가면 홀가분해질 거라고 여길 때는 언제고.
소티스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 저희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폐하께서 이혼을 제안하시고, 제가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요.”
아니, 처음부터 에드먼드는 함께 걷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소티스가 그 뒤를 부지런히, 그리고 묵묵히 따랐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미련한 이유로.
“저는 이제 제 삶을 살고, 폐하는 폐하의 삶을 사셔야지요.”
정적 속에서 차가 식어 갔다. 그림처럼 예쁘게 차려진 음식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애꿎은 시선을 받아 내기만 할 뿐이다.
소티스는 이내 신기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에드먼드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평온해 보이려 애쓰는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 사납게 보였다.
왜?
소티스는 저도 모르게 묻고 싶었다. 폐하. 왜 제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시나요? 저를 사랑하셨나요?
그건 아니겠지요. 그녀의 마음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럴 리가 없겠지. 그랬더라면 그녀에게 그럴 수는 없었을 테니까.
“책임감을 기억해 주세요, 폐하.”
소티스의 팔이 탁자를 건넜다. 그녀의 손이 화병에 꽂힌 꽃 한 줄기를 꺼내 에드먼드의 찻잔 옆에 놓았다.
알싸한 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히아신스였다.
‘겸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연보랏빛 꽃은 멘데즈 황실을 상징하는 꽃으로, 대대로 황제의 대관식 때 바쳐지는 꽃이기도 했다.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나라를 살피라는 뜻에서 비롯된 그 꽃을, 소티스가 건네며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청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를 이끄실 분이니까요.”
에드먼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내려온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히아신스 자체가 되어 버린 듯했다.
“책임감을 기억해 달라…….”
그가 소티스의 말을 느리게 반복했다.
“규율은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니까?”
소티스가 어렴풋이 웃었다.
“폐하께서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요.”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싱그러운 히아신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소티스가 작게 말했다.
“저는 줄곧 폐하께서 행복하시기만을 바랐어요.”
“…….”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돕고 싶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차라리 그가 바라는 것이 명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바람이 ‘황후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은 난해한 내용이었다면, 소티스는 평생 이 자리에서 어떤 보람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갔을 테니까.
그러나 에드먼드는 정당한 황제가 되기를 꿈꿨고, 황위에 대한 욕심이 각별했던 만큼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 소티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나라를 위해 애쓸 때마다 못 이긴 척 놔두곤 했다.
그 정도면 됐다. 소티스는 그렇게라도 그의 곁에 머물러서 좋았다. 이건 그저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다 보니 그녀도 나라를 돌보는 일이 보람차고 즐거웠다.
그러니 그가 제 손으로 나라를 망치지 않기를 바랐다. 최근의 에드먼드는 그답지 않았다. 핀을 만난 뒤로는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황실의 중요한 일도 하잘것없게 취급하곤 했다.
평생을 고대했던 일인 만큼, 후회하지 않았으면 했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을 테니, 후회라는 건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 중 가장 뼈아픈 감정이기에.
“이제 저는 폐하를 도와 드릴 수 없어요.”
소티스가 차분하게 속삭였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소티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래도 이 뒤뜰에 한 번쯤 들어오고 싶었는데…… 작은 소원이나마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옮겨, 에드먼드가 앉아 있던 자리를 지나쳤다.
에드먼드는 평화로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그 태도에 어쩐지 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했다. 불쾌하고 초조했다.
이대로 자신을 완전히 지나쳐 가면, 소티스는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겠지. 마치 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저를 사랑했던 마음은 까맣게 잊었다는 듯.
그는 소티스의 손목을 쥐었다. 퍽 다급하게마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소티스, 나를 사랑했었다고 했지.”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낮게 헝클어졌다.
“사랑이 뭐지?”
“폐하.”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 우습게 들리겠지. 나도 알아. 그저…….”
“사랑은.”
소티스가 에드먼드를 내려다보았다. 동정 어린 시선이었다.
“폐하께서 피니에 전하께 드렸던 것이 사랑이었겠지요.”
“…….”
“혹은, 제가 폐하께 한평생 드렸다 거두었던 것도 사랑이었을 거예요. 사실 이건 확실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저는 폐하가 아니니 그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제 감정은 이제는 떠난 마음이니 제대로 구분하는 것조차 새삼스러우니까요.”
“……”
“하지만, 폐하. 저…… 이제 이것만큼은 알아요.”
소티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제가 지금 레먼 페리윙클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리고 레먼이 제게 주는 것이 사랑이고요.”
에드먼드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로 천천히 일어섰다.
“소티스.”
“네.”
“소티스.”
“네, 폐하.”
“그대를 생각해.”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슬프거나, 아프거나, 마음에 짐이 될 만한 말을 들을 것 같을 때 으레 보이던 습관이었다.
에드먼드가 발을 옮겨 소티스의 앞을 다시금 가로막았다.
“매일 그대의 얼굴이 떠올라. 꿈에서마저도 봐. 그런데 항상 그대가 울고 있어. 언제나 슬퍼하고 있어서.”
“…….”
“내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해. 그때 외면했던 것들이 산처럼 쌓인 지금에야 직면한 거겠지. 소티스, 내가 그대에게 끔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나?”
그러길 바란 적이 있었으나, 정작 그렇게 되고 나니 조금도 홀가분하지 않은 걸까. 소티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건 제게 사랑을 구걸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저 인간적인 죄책감 때문이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티스가 담담하게 답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야만 했어요.”
그녀가 위로하듯이 웃어 보였다.
“제가 폐하의 곁에서 사라진다면 그런 혼란도 잠잠해질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폐하께서 마음을 편히 먹는다면 세월은 폐하의 손을 들어 줄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간 제 생각일랑 그만두세요.”
“…….”
“피니에 전하께서 무사히 아기님을 낳으신다면, 그분을 황후로 책봉하시고 곁을 지켜 주세요. 전하께서 쓸쓸하시지 않도록요.”
쓸쓸함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였지만, 소티스는 굳이 솔직해지지 않기로 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입지가 애매한 핀의 상황은 이전의 소티스보다도 나빴다. 그런 그녀가 황성에서 내쫓기지 않으려면 에드먼드의 사랑이 필요했다.
총애라도 받아야 사람들이 피니에 로즈우드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 테니까.
“전하와 아기님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셔야지요.”
“아기.”
에드먼드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사이에 아기가 있었다면 좀 달랐을까. ……몸이 약해 유산했다고 했던가?”
“아뇨.”
한때 그런 소문도 돌았지. 소티스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어깨를 살짝 틀어, 에드먼드는 그녀의 옆얼굴만을 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 귀족 회의에 안건을 올리러 갔던 소티스가 황후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던 날이었다. 그때 소티스가 하혈한 것을 본 시녀들이 혼비백산한 일이 주변에 알려지며, 암암리에 황후가 유산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더란다. 아마 그녀를 싫어하는 귀족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메리골드 공작이 한달음에 뛰어와 그녀에게 건강해야 한다며 닦달을 해 댔었지.
그때는 그저 지옥 같던 일들이 이제는 떠올려도 그리 아프지 않은 게 신기했다. 소티스가 엷게 웃었다.
“저는 유산한 적이 없답니다, 폐하. 아이를 가진 적조차 없는데 무슨 수로 잃겠어요.”
단순한 월경통이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을 때마다 유독 심해지는 탓에, 그 당시에는 달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티스는 제 손목을 쥔 에드먼드의 손 위에 자신의 것을 올렸다. 조그맣고 따스한 손이 제 손등에 닿자, 에드먼드가 흠칫 놀라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아기가 생겨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폐하. 저는 차라리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답니다.”
“…….”
“저야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아기에게는 죄가 없잖아요.”
에드먼드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손아귀에 힘을 푼 채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볼 뿐이었다.
이렇게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초조해할 거라면, 후회할 짓을 하지 않는 거였는데.
그녀의 말이 옳았다. 후회라는 건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 중 가장 뼈아픈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일에 후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