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베아툼의 대마법사 (3)
“요즘은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져요.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런지, 정신을 차릴 틈도 없다니까요.”
소티스 메리골드는 시녀들의 말에 동조하듯이 짧게 미소 지었다.
“황성은 원래 이렇게 정신없나요?”
막내 하녀, 애나의 질문에 시녀들이 으스대듯이 대꾸했다.
“그럼! 그런 편이지. 황성이 얼마나 치열한 곳인데!”
“너, 소티스 님께서 데려오신 아이라고 했지? 그게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인지 넌 절대 모를 거야.”
“알거든요!”
“그래?”
시녀들이 애나를 둘러싸더니 눈을 빛냈다.
“그거 잘됐다! 그럼…… 우리 소티스 님을 부족함 없이 모셔야겠지?”
그들의 대화를 듣던 소티스가 곤란하다는 말투로 “어린아이에게 너무 부담 주지 마세요.” 하고 말하려던 때였다.
“당연하죠!”
애나가 의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많이 알려 주세요! 뭐든지 배울게요!”
그러자 시녀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어쩜, 또랑또랑한 거 봐!”
“우리 가문 막내보다 어린데, 눈치도 좋다니까요? 예뻐 죽겠어!”
“역시 소티스 님께서는 보는 눈이 있으시다니까. 걱정하지 마. 황실 예법은 우리가 책임지고 가르쳐 줄 테니까!”
말릴 필요 없겠네. 소티스가 가만히 웃어 보였다.
시녀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 덕에 황후궁의 분위기는 연일 화사했다.
애나의 말대로였다. 요즈음의 멘데즈 황실은 정말이지, 어수선하기로는 대륙 제일인 듯했다.
레먼 페리윙클과 베아툼 왕국이 혼돈의 부활을 알리자 에드먼드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레먼과 소티스에게 일임했다. 황제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소티스를 베아툼의 관계자로 인정해야 핀과의 문제를 유야무야 덮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레먼 페리윙클은 자신이 대마법사가 되었음을 세상에 알렸다. 그로도 모자라 그는 소티스 메리골드를 하나뿐인 제자로 들이겠다고 공표했다. 그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다.
덕분에 멘데즈의 누구도 소티스를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황후도, 정부 출신 황비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던 초라한 여인도 아니다.
미래를 바꿀 힘을 쥔, 재앙을 막을 운명을 타고난 영혼 마법사.
소티스는 자신이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사람들의 뇌리에 누군가의 아내나 딸이 아닌, 온전한 자신으로 각인된다는 사실이 꼭 꿈만 같았다. 무언가를 배울 수 있고, 눈부신 성취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소티스 님!”
마리아네스가 요란스레 들어왔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외쳤다.
“빈민 구제 사업을 아벨 대공작께 일임하셨다고요!”
소티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되다뇨? 두 사람이 소티스 님의 공을 홀랑 가로챈 셈이라고요. 너무 억울해요! 그간 어떤 고생을 해 가시며 수도 근처에서…….”
“마리아네스.”
소티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고마워요.”
“저는 안 괜찮아요!”
“그래서 더 고마워요.”
무어라 더 따지려던 마리아네스가 멈칫했다.
“……네?”
“그냥요, 새삼스럽게…… 마리아네스가 절 위해 얼마나 애써 줬는지 알 것 같아서요.”
자신이 괜찮다는 말 뒤에 숨어 체념하고 도망치는 동안에도 끝내 목청을 높여 주던 이였다. 오로지 저만을 위해 그토록 화내고 따지던, 단 한 명뿐인 친구였다.
정치적으로 제대로 된 힘을 갖지 못한 로즈우드 공녀로서, 뭐라도 해 보겠다며 아득바득 귀족 회의에 끼어들려 애썼던 것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을 자처하는 이가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소티스는 안다. 한평생 마리아네스가 제게 알려 주었다.
“어제 렉투스 상단주님을 뵙고 계획서를 전달해 드렸어요. 제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랍니다.”
마리아네스가 무어라 하기 전에, 소티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제가 모든 일을 책임질 수는 없어요. 빈민 구제 사업은 장기적으로 살펴야 하는 사업이니, 아벨 대공작이야말로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에요.”
책임감을 알고 견디는 이는 강하다. 다른 이도 아닌 그라면, 북부의 굶주리고 병든 이를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거라고 믿었다.
게다가 아벨과 렉투스는 소티스에게 호의적이다. 그들은 소티스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 못해 과분했다. 그녀는 선선히 웃어 보였다.
“게다가 그 사업을 제가 계속 맡고 있으면, 황성을 떠날 수 없는걸요.”
옆에서 조그맣게 속삭이며 수다 떨던 시녀들이 조용해졌다.
다들 소티스가 이혼한 김에 황성을 나서서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라면서도, 그녀에게 정이 든 나머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차였다.
“어, 어디로 가실 건데요? 소티스 님.”
“역시 베아툼이겠죠…….”
“하아…… 부모님께서 외국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실지.”
애나가 천진하게 물었다.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소티스 님?”
아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당당하게 덧붙였다.
“절 책임지셔야죠!”
“푸흡.”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소티스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데, 데려갈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좀…….”
“와!”
“뭐, 뭐야. 부러워! 소티스 님, 저도요!”
“저부터요! 제가 제일 오래 곁을 지켜 드렸다고요!”
“저도 빠지기 싫어요. 어떻게든 집안의 허락을 받아 올 테니까요!”
어느새 밀려난 마리아네스가 억울하게 외쳤다.
“나만 못 가! 내가 제일 친한데!”
그렇게 한참을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을 때였다.
“저, 소티스 공녀님께 황제 폐하의 전언을 전해 드리고자 왔습니다.”
소녀처럼 까르르 웃던 시녀들이 순식간에 차가운 눈길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차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던 와중, 마리아네스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의 전언?”
문 너머에 있던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소티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무슨 일이라고 하시던가요?”
“그게…… 잠시 본궁에서 뵙자고 하십니다.”
“저는 용무를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잘…….”
시종이 곤란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며 보고했다.
“다만, 뒤뜰로 오라 하셨습니다.”
“뒤뜰…….”
내내 평온했던 소티스의 표정이 잠시간 무너졌다.
뒤뜰은 황제가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선대 황제와 황후도 그곳에서 정을 쌓았다고 했다. 황제인 에드먼드의 침실과 바로 연결된 곳이기도 했다.
그는 주로 그곳에서 정부를 만나거나 식사하곤 했다. 때때로 뜰에서 꺾은 꽃을 정부들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소티스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곳. 에드먼드가 그녀를 청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소티스조차도 그곳이 제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상상으로도 가 본 적 없는 곳이기도 했다.
“뒤뜰로 전 황후를 청하셨다고요.”
마리아네스가 또 무어라 잔소리할 것 같아서, 소티스는 제 옆에 앉은 친구의 미간을 검지로 꾸욱 눌러 주었다.
“그래요. 가겠습니다.”
“소티스 님!”
시녀들의 외침에 소티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는 주눅 들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폐하께 사랑을 구걸할 필요도 없고, 황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할 이유도 없어졌잖아요.”
“그건 그렇지만요…….”
“잘 다녀올게요.”
사람이 평생 초라해져야 하는 할당량 같은 게 있다면, 아마 소티스는 에드먼드 앞에서 그걸 다 쓰고 말았을 거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아네스는 레먼을 만나러 가겠다며 애나와 함께 황후궁을 나섰고, 시녀들은 이참에 이불 빨래를 해야겠다며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소티스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 시종을 따라 걸어갔다.
이제 에드먼드의 냉대에도 작아지지 않는다. 그는 그 정도로 제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중요한 사람은 따로 있지.
소티스는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자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 온화한 미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차분해지며 미소가 떠올랐다.
레먼을 사랑하는 일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도, 그녀 자신이 강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쪽입니다. 소티스 님께서 오신다면, 홀로 들어오시라고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처음으로 열어 보는 뒤뜰의 문이었다. 하얀 금속으로 장식된 문이 너무도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폐하.”
그 너머에는, 당연하게도 에드먼드가 있었다. 새하얀 탁자 앞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은 무료함과 실망감, 권태감, 그리고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후회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지루한 얼굴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에드먼드는 소티스의 등장에 조금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소티스.”
아마 그녀가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듯했다. 그가 황망히 건너편의 의자를 빼서 소티스가 앉을 수 있게 했다. 그러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듯 허둥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주변에는 잔시중을 들어 줄 이가 없었고, 에드먼드는 평생 소티스에게 무언가를 제대로 챙겨 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차를 직접 따라 주려는 에드먼드의 손길을 저지한 소티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폐하.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래.”
“왜 부르셨나요?”
소티스가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탁자 위는 화려했다. 생화를 가득 꽂은 큼직한 화병, 세 단씩 올라온 간식거리와 찻잔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마치 그녀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해 둔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 일로 제게 이런 것을 보여 주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이곳에 들이길 싫어하셨잖아요.”
에드먼드가 쓰게 웃었다.
“그랬지.”
“그런데 왜…….”
“소티스.”
“…….”
짧은 침묵 후, 그가 물었다.
“베아툼으로 떠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