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베아툼의 대마법사 (2)
성벽 앞 광장을 포위한 사람들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여든 이들이 성문 앞에 꽃을 바치며 소리치고 있었다.
“소티스 메리골드야말로 세상을 구할 사람이다!”
“멘데즈에 새 마법사가 나타났어!”
“폐황후야말로 가난한 사람을 챙기는 진짜 황후라고!”
“왜 이혼한 거야? 정말 소티스 님이 원하신 건 맞겠지?”
“그럴 리가 있나. 세상에 폐하께서 황후를 싫어했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나!”
“소티스 님을 쫓아내지 마!”
“사과해!”
사람들이 온종일 모여서 목청을 돋우고 꽃을 뿌린다는 이야기에 에드먼드는 그야말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이렇게까지 된 거지.
핀이 유산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퍼질 때까지만 해도, 소티스를 웬만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밀어내야 그 자리에 피니에가 앉을 것이고, 곧 태어날 아이가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으니.
그 아이가 자신의 자리에 한 점 의문을 가지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소티스를 희생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소티스는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뿌리라도 내린 듯 더욱 굳건해졌다. 심지어 밀려난 것은 자신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에 가슴께가 답답해지기만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폐하.”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복위……까지는 조금 그렇겠지만, 황비 책봉식을 간략하게나마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두 분께서 합의 후에 이혼하셨다지만, 사람들은 그 사정을 잘 모르니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갑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마법사라니요. 대륙 최초로 베아툼과의 친교를 다질 기회입니다. 세톤느 왕국과의 국교는 로즈우드 공녀가 이어 준다면…….”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답니다.”
긴급회의에 참여한 마리아네스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디까지나 조건부 약속이었답니다. 폐하께서 약속을 어기셨으니, 저 또한 결혼할 의무가 없어요. 그뿐인가요? 저는 일이 정리되면 로즈우드 영지로 아예 내려갈 생각이었는걸요.”
마리아네스의 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하나뿐인 제 친구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는데, 제가 무엇을 믿고 이곳에 머무르겠어요? 뭐,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님께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으신다면 다시 한번 고민 정도는 해 보겠지만…….”
“대우요? 모욕이나 당하시던걸요.”
고집스럽고 당찬 목소리에 귀족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렉투스 상단주의 옆에 앉아 있던 보랏빛 단발머리의 여인이 표독스러울 정도로 톡 쏘아붙이는 말투로 말했다.
“제 언니가 광장에서 온종일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지금은 황비 전하시라지만, 그래도 제 언니는 한 나라의 황후였으며 공작 가문의 여식이었는데도요. 이는 메리골드 공작가를 욕보인 것과 썩 다르지 않다는 것이 저와 아버지, 그리고 상단주의 뜻입니다.”
에드먼드는 셰릴을 가만히 보았다. 소티스와 닮은 듯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연보랏빛의 곧은 머리카락과 흐린 물색 눈동자를 가졌는데도, 마치 전혀 다른 색처럼 보였다.
“그리고, 제 언니가 그렇게 모욕당한 것은 폐하의 지시라 하셨더군요. 게다가 죄의 책임을 물어 황후궁을 폐궁으로 만들고, 병사를 시켜 감시하고, 창문에 빗장을 걸어 못질하고……. 왜 저희 가문의 사람들이 이렇듯 전례도 규율도 없는 일을 겪어야 하지요?”
“……태어날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마리아네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피니에 전하께서는 무척 건강하시다더군요. 쓰러지기 이전에 비하면 훨씬 더 몸이 따뜻하시고, 기력이 좋아지셨다고요. 다른 이도 아니고 폐하께서 붙여 주신 의사의 소견이랍니다.”
마리아네스의 말이 시작점이라도 된 듯, 다른 귀족들도 의견을 보탰다.
“이번 처사는 조금 과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아무리 메리골드 공녀를 싫어하신다고 하여도…….”
“렉투스 상단의 일은 어쩌실 것입니까? 맨몸으로 나라를 돌보고 계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수배령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공녀께서 베아툼으로 망명하신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레먼 페리윙클 대마법사에 대한 존중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친황제파 귀족들도 물러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외출 허가증을 빼앗아 간 것은 사실입니다. 황비 전하께서 하혈하신 것도 거짓이 아니잖습니까? 그 약이 원인이기도 하고요!”
“두 분이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은 것을 온 세상이 아는데 황비를 모시자고요?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럴 거면 피니에 전하의 황후 책봉을 먼저 하시죠! 후사는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리고 렉투스 상단의 빚은, 말 잘하셨습니다! 세상을 위한 일이라면 그렇게 경우도 없이 저지르고 봐도 된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이 귀족 회의에는 뭐 하러 있답니까? 보고도 올리지 않은 단독 행동이었어요!”
“빚이 어디 한두 푼입니까? 그렇게 내어 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정말 마법사가 맞기는 합니까? 확인해 보자고요!”
귀족들이 말을 보탤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에드먼드는 결국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곧이곧대로 빚을 갚아 주고, 소티스를 황비 자리에 앉혀야 조용히 하겠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또 황실이 우스워졌다고 할 테지!”
그때, 내내 조용했던 이가 나섰다.
“그럴 필요 없다.”
아벨 폰 세턴 멘데즈였다. 회의장의 한 자리를 차지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관망하기만 하던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어떤 결의가 어렸다.
“그 빚은 내가 갚도록 하지. 전액에 이자까지. 향후 필요한 모든 지원은 웰트 대공령에서 부담하겠다.”
“지, 진심이십니까?”
“왜 그렇게까지…….”
아벨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최소한의 양심이 아닌,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함이지.”
“…….”
“내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나?”
에드먼드는 아벨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벨은 소탈하고 분란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책 한 줄을 볼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좋다고 하였고, 에드먼드가 즉위한 이후로는 수도를 떠나 북부 대공령에서만 지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조건이 있다. 렉투스 상단이 웰트 대공령에 지부를 세우고 교역을 도맡아 주었으면 좋겠군.”
상단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좋습니다. 상단의 이름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상황을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언짢은 기분이 울컥 치밀었다.
그러나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제가 나서면 꼴이 더 우스워질 뿐이다. 그대로 아벨이 이 일을 가져가도록 하는 게 그나마 나았다.
“곧 폐하의 탄신 연회를 맞이하여 세톤느 제4왕자가 오시기로 하셨지요.”
귀족들의 시선이 마리아네스에게 쏠렸다.
그녀는 숱하게 쏟아지는 시선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추궁하듯이 에드먼드를 한 차례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로 소티스에게 더한 죄를 지을 거냐고 묻듯이.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듯이.
“소티스 메리골드에게 어떤 죄를 묻지 않고 전 황후로 예우하겠다.”
***
레먼 페리윙클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의 눈은 한여름 낮의 하늘처럼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상기된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고, 성급하게 뛰어가는 몸은 다급하다 못해 어색하게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소티스 메리골드가 정말 놀라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슬프게 했다. 초조하게 했고, 억울하게 했고, 울고 싶게 했고, 불안하게 했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그를 행복하게 했다. 웃게 하고,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고, 기다리게 하고, 기쁘게 하고, 설레게 했으며 삶을 걸어 나갈 수 있는 희망을 알려 주었다.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소티스 메리골드를 사랑한 일이리라.
“소티스 님.”
레먼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티스 님.”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강인하며 찬란한 것이 당신의 기적을 모아 빚어낸 것처럼 느껴져요.
당신을 생각할 때면, 세상 무엇도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은 저를 한없이 약하게 하고, 무엇보다 강하게 만들어요.
“레먼 님, 조금만 기다리시면 사람들이 올 텐데…….”
“괜찮습니다. 비켜 주세요.”
한달음에 황후궁까지 달려간 레먼은 빗장을 손으로 쥐고 뜯어냈다. 수도 없이 못질을 한 바람에 꿈쩍도 않을 때 레먼은 잠시간 에드먼드를 원망했다.
그러나 이깟 판자 몇 개가 소티스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바라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그저 아침이 되면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소티스 메리골드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자유를,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다.
레먼은 이를 악물었다. 손끝으로 마력이 모여들더니 판자가 부서졌다. 영혼 마법이 아닌 다른 마법을 웬만해서 쓰지 않는 저에게는 썩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이곳에 그런 진실을 아는 이가 없어 다행이었다.
“소티스 님.”
레먼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팔을 벌렸다.
그 너머에는 그가 가슴 깊이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초여름의 바람에 나부끼는 보랏빛 머리카락, 눈물을 뭉쳐 만든 듯한 물빛 눈동자. 하얀 뺨에 어린 부드러운 홍조.
그리고 태양 같은 미소. 그저 볕 같은 그 미소.
“……안녕하세요, 대마법사님.”
소티스가 웃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레먼에게 안겼다.
방향 없이 불어온 바람에 갈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머리카락이 뒤섞여 날았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하게 웃고 서로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이어진 바람 같은 입맞춤으로, 서로는 자신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