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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9)화 (60/121)

제59화. 베아툼의 대마법사 (1)

이튿날, 멘데즈 황성이 발칵 뒤집혔다.

“새, 새가…… 독수리입니다, 폐하!”

“독수리?”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회의장의 상석에 앉자마자 술렁거리는 소리가 바깥에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문을 노크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들어온 시종장이 소리친 것이다. 사색이 된 그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팔을 허둥거리며 휘젓고 있었다.

“황금 부리의 독수리 말입니다! 새, 새하얀 깃털의!”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황금 부리의 백독수리. 대륙에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지고한 마법사의 나라, 철옹성처럼 닫힌 남쪽의 소국. 베아툼 왕국의 전언이 도착한 것이다.

“어찌 기별도 없이!”

그러자 시종장의 뒤에서 작은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바닥까지 끌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꼬마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베아툼의 심부름꾼, 애나가 지고하신 멘데즈의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애나가 또박또박 말했다.

“베아툼의 마법사, 레먼 페리윙클 님께서 급히 알현을 요청합니다.”

앳된 아이의 목소리였건만 누구도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에드먼드조차도 그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아이를 내쫓지 못했다.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시종장이 말하는 백독수리가 환시가 아니라면 더욱 그랬다.

베아툼은 숱한 역사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은, 긴 역사를 자랑하는 소국이었다. 한 나라에서는 한 명도 있기 힘들다던 마법사들이 사단을 이룬 것은 물론이며 대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원로회의 힘은 그 어떤 나라도 감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격식과 절차마저 무시할 만큼 중요한 일이겠지.”

에드먼드의 낮은 목소리에,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신관처럼 흰옷을 입은 남자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주홍색 실로 자수를 놓은 흰 마법사복은 그의 이국적인 인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레먼 페리윙클은 한쪽 손을 가슴팍에 얹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경건하고 엄숙해 보여서, 귀족들은 숨소리조차도 죽이며 레먼을 바라보았다.

“베아툼 왕실의 공식 사절단이 황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안의 심각성 때문에, 왕실의 전언을 먼저 보내고자 합니다.”

에드먼드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말하라.”

레먼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던 그가 팔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삐이익, 높게 우는 소리가 들리며 새하얀 새가 날아들었다. 사내의 팔뚝만 한 몸집을 자랑하는 독수리가 거대한 날개를 쭉 펼치더니, 긴 탁자를 따라 날아와 에드먼드의 앞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내 백독수리의 황금빛 부리가 열리며,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아툼 왕실이 멘데즈 황실의 주인,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마법으로 기록한 목소리에 귀족들이 낮게 탄식했다.

[직접 만나 뵙지 못하고 이렇듯 전령을 보낸 것에 심심한 사과를 보냅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직접 움직일 수는 없으나, 원로회 소속의 대마법사 두 명과 전언을 함께 보냅니다. 수일 내로 자국의 대마법사, 알베스를 필두로 한 공식 사절단이 도착할 것입니다.]

에드먼드는 그것이 일종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독수리가 고개를 숙이며 이어 말했다.

[‘혼돈’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멘데즈에서 혼돈은 그리 유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귀족 중에서 고작 서너 명만이 인상을 찌푸리거나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독수리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그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발언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절망과 비탄을 먹으며 자랍니다. 베아툼은 ‘혼돈’으로 인해 멸망의 위기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에드먼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검은 눈이 달싹이는 금색 부리를 쏘아보았다.

[자국에서 가장 뛰어난 대마법사 두 명을 보냅니다. 베아툼은 멘데즈와 세계의 안녕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신의 명예에 걸고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대마법사들과 사절단은 보호하시고 협조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새가 잠시 침묵했다. 회의장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에드먼드는 이상하게도 그것이 폭풍 전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충격을 동반하는 침묵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멘데즈를 빛낼 마법사의 등장에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자국의 마법사, 레먼 페리윙클이 새로운 마법사의 비상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으로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동요하지 않는 것은 오직 애나와 레먼뿐이었다.

레먼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베아툼의 대마법사는 몇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저는 최근 그것을 모두 달성하여, 베아툼의 여섯 번째 대마법사가 되었음을 에드먼드 폐하께 알립니다.”

베아툼에서 대마법사는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러니 에드먼드는 그를 이웃 나라의 왕족처럼 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그 사실에 어떤 감상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멘데즈를 빛낼 마법사.

“그 새로운 마법사라 하면…….”

왜 불안한 기분이 드는지. 그리고 그 불길한 느낌이, 왜 맞아떨어질 것만 같은지.

레먼이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은 마치 에드먼드를 힐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떤 도전장을 던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베아툼의 대마법사가 말했다.

“소티스 메리골드 님입니다.”

***

오후가 되자 회의장뿐만 아니라 황성 자체가 들썩거렸다.

소란을 읽은 시녀들이 황후궁으로 얼른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소티스 님, 소티스 님! 밖이 아주 난리가 났어요!”

시녀들은 차마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경비병들을 뾰족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뭐예요? 아직도 지키고 계시는 거예요? 소티스 님은 황후 전하께 사죄도 드렸는데요!”

“그게, 폐하의 명령이…….”

“그러니까 이유도 없이 사람을 가둬 두라고 명령한 거잖아요?”

“맞아. 마리아네스 님과 레먼 님의 무결함도 밝혀진 데다가, 오히려 타국의 대마법사님을 경우 없이 대했다는 말이 퍼지는 와중에!”

“비켜 주세요!”

시녀들이 와글와글 모여 떠들자 병사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어두워졌다.

사실 그들도 에드먼드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티스가 썩 괜찮은 사람이며, 그녀가 피니에 로즈우드를 해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었다. 아직도 에드먼드는 소티스가 지내던 황후궁을 폐궁이라고 불렀고, 그곳의 감시를 거두라 이르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문 너머에서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들이 경비병을 밀치더니 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소티스 님!”

“소티스 님, 보고 싶었어요.”

“문 열면 안 돼요? 이건 너무 부당해요…….”

바람결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실렸다.

“금방 다시 만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셨어요?”

“말도 마세요, 소티스 님! 소티스 님께서 구해 주셨다던 하녀 아이가 알려 줬는데요…….”

시녀들은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새끼 새처럼 재잘거리자, 문에 이마를 대고 서 있던 소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베아툼 왕실의 전언을 담은 백독수리가 도착했다. 그가 말하기를, 베아툼 원로회의 대마법사가 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레먼 페리윙클은 자신이 대마법사가 되었음을 알렸다. 소티스 메리골드가 영혼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들이었다. 소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먼이 대마법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생각보다 일러서 놀랐지만, 이 또한 그의 입지를 다져서 저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식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렉투스 상단주께서 찾아오셨어요. 그때 메리골드 공작님의 얼굴을 소티스 님께서 보셨…… 아, 그래도 아버님인데 이런 말씀은 조금 그런가요?”

“하지만 공작님께서 소티스 님께 어떻게 대하셨는데! 전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요.”

“맞아요, 정말 그랬어요!”

렉투스 상단주가 찾아와? 그 말에 소티스는 문을 벌컥 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조금만 참자. 얼마 남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가기 시작했다면, 에드먼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병사를 물릴 것이다.

짧으면 몇 시간, 길어도 며칠이다. 조금만 버티자.

소티스는 참는 일만큼은 잘했다.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상단주께서 무어라 하시던가요?”

시녀들이 신이 나서 말해 주었다. 몇 번씩 헛기침하며 눈치를 주던 병사들조차도 슬쩍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소티스 님께서 상단에 거액의 빚을 지셨다고 하셨어요. 돈과 물건을 빌려 가시면서 ‘나라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기에, 상단주께서는 그 빚의 탕감을 폐하께 직접 요청하기로 하셨다는 거예요.”

“왜…….”

정말 인내심이 떨어져서 온 건가? 소티스는 렉투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텐데…….

“귀족들이 저를 많이 탓하셨겠네요.”

“맞아요.”

“……마리아네스 님!”

마리아네스가 나타나 시녀들의 옆에 자리를 잡더니, 등에 기댄 채 말했다.

“기회를 잡았으니 맹렬하게 항의하더라고요. 더는 황후도 아닌 소티스 님께서 무단으로 나라의 이름을 팔고 명예를 실추시키셨다면서요.”

메리골드 공작을 싫어하는 다른 귀족들이나 친황제파 귀족들이 그녀를 싫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늘 그렇지 않았던가.

소티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보고서를 준비하셨어요.”

“……보고서?”

“네. 소티스 님께서 황성 밖에서 행하셨던 ‘빈민 구제 사업’과 ‘영혼 조정 사업’의 현황 보고서를 가져오셨더라고요. 그리고 이건 나라의 일이 맞는데, 어째서 황제가 이 모든 것을 돌보지 않고 폐황후가 해내고 있는지 물으셨어요.”

“그건…….”

소티스가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원래 제가 하던 일인걸요.”

“맞아요. 그래서 메리골드 공녀께서 항의하셨죠.”

“네?”

소티스는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항의라니?

마리아네스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소티스는 스스로 그 말의 진짜 뜻을 깨달았다.

메리골드 공녀라면, 메리골드 공작의 딸을 이르는 말.

그리고 메리골드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다.

“말도 안 돼…… 셰릴이 내 편을 들었다고?”

소티스가 중얼거리자 마리아네스가 웃었다.

“그것뿐인 줄 아세요?”

문 너머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소티스 님을 찾아왔어요. 황성 앞 광장에 바글바글하게 모였다고요. 모두가 소티스 님의 이름을 불러요. 소티스 님이 일으킨, ‘폐황후의 기적’에 대해 떠들고 있다고요.”

소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 건넸던 모든 호의가, 그녀가 기울였던 노력의 결과가, 그리고 이 모든 시련의 값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서글펐던 만큼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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