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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8)화 (59/121)

제58화. 그리움과 외로움 (3)

소티스는 모두가 떠난 정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쩐지 쓸쓸하고 허무한 기분이었다. 마리아네스와 에드먼드가 떠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건 안다. 기왕 영혼이 되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으니, 레먼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에드먼드의 기세가 주춤한 지금, 보고서를 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벨 대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는데…….

왜 이렇게 기운이 나지 않는 건지. 왜 이렇게 허탈한 건지. 그간 슬프고 서운했던 과거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혼돈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래, 그 일이 있었다. 그녀는 혼돈을 찾아낼 것이고, 자신이 마법사가 된 이 운명을 용기 내어 마주 볼 것이다.

대대로 규율의 마법사가 혼돈을 제거하기 위해 생겨난다고 했던가. 예상보다 빠르게 부활하고 있는 혼돈 때문에, 그리고 여타 다른 이유로 인해 자신이 규율의 마법사가 된 듯했다.

영혼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선물이라도 받은 느낌이었다.

문득 레먼이 슬퍼하며 말했던 목소리가 떠올렸다.

“규율의 마법사들은 거의 혼돈과 함께 죽었거든요. 초대 규율도 그랬고, 선대 규율이셨던 제 옛 스승님도 그랬습니다.”

함께 사라질 운명.

소티스는 그 운명이 슬프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그저 숨을 쉰다고, 눈을 깜빡이고 생각한다고 하여 다 사는 것이 아니다. 삶에는 목표가, 의미가, 성취가, 혹은 어떤 명예가 필요했다. 모든 이의 삶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소티스의 삶은 그랬다.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의미 있게 사라지는 게 나아.

소티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반투명한 그녀의 몸이 땅에 소리 없이 내려앉고, 이내 정원의 한중간에 하릴없이 주저앉은 채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를 본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때, 조그마한 아이 한 명이 멀리서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애나?]

주변을 둘러보며 살금살금 움직이는 꼬마는 바로 애나였다. 소티스가 깜짝 놀라 엉거주춤 일어났다.

애나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소티스를 발견하지 못하고, 반투명한 그녀를 지나쳐 버렸다. 아이는 소티스를 통과할 무렵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그녀의 바로 뒤에 쪼그려 앉았다.

“이거 예쁘다.”

아이는 화단에 꾸며진 하얀 장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등을 맞댄 것 같은 모양새여서, 소티스는 살짝 뒤를 돌아보기만 했다.

“소티스 님이 좋아하셨을 텐데…….”

그 말을 듣자 소티스의 가슴께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 들었다.

조그만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진심에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그녀를 떨리게 했다.

“마법사님이 황성의 꽃은 함부로 꺾으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레먼 님께 알려 드려야겠다.”

[애나.]

“소티스 님이 얼른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는데…….”

[……애나.]

“나는…….”

애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소티스 님께 행복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

[애나.]

소티스가 울먹거리듯이 대답했다.

[넌 지금도 나를 행복하게 해.]

네 마음이 나를 혼자 있지 않게 해.

네 마음이 나를 절벽 아래 같은 절망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막아 줘.

너를 구해서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모르지.

소티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만 볼 수 있는 투명한 눈물이 잔디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고마워. 애나, 고마워.]

그녀의 진심 어린 인사를 듣지 못한 애나는 꽃을 한참이나 보다가 돌아갔다. 자다 깨서 나왔는지 연신 하품을 하는 모습이, 산책 겸 꽃을 보고 싶어서 잠시 밖을 들렀던 모양이었다.

소티스는 여전히 그곳에 앉아서 애나가 보고 갔던 새하얀 꽃을 보고 있었다. 소담스레 핀 그 꽃송이들이 모두 아이가 남기고 간 선물처럼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티스 님.”

레먼 페리윙클이 나타났다.

그는 마법처럼 나타났다. 다 묶지 않아 풀려난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나부꼈고, 그녀를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는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티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레먼이 허둥대면서 말했다.

“애나가 잠시 바람을 쐬러 다녀오더니, 소티스 님을 닮은 꽃을 보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마침 소티스 님 생각이 났는데 그렇다고 늦은 시간에 소티스 님이 계신 곳까지는 갈 수 없어서요. 잠깐 걸으면서 생각만 조금 할까 하고…….”

소티스가 살짝 웃었다.

[네, 레먼.]

“……왜 이렇게 나와 계세요? 그것도 영혼으로요.”

[그게…….]

적당히 대답하는 게 좋을까,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소티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가만히 휘어 웃었다.

한평생 상황에 맞추어 적당히 대답하는 삶을 살았다.

이제는 용기를 가지고, 솔직하게 살아갈 차례다.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

[그래서 나왔는데, 생각하다 보니 어쩐지 자신이 없어서 여기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어요.]

레먼이 제 양손을 맞잡은 채 간절하게 말했다.

“저를, 보고 싶으셨다고요.”

[네.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소티스 님께서요.”

[안 되나요?]

“……아뇨!”

그의 얼굴에 점점 열이 올라서, 이내 멀리에 있는데도 붉어진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홍조가 떠올랐다.

“당신을…… 안고 싶어요. 저는 너무 이기적일까요…….”

[……아뇨.]

소티스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레먼이 충격받은 얼굴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소티스가 그를 바라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발짝 다가갔다. 소티스가 달처럼 웃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걸음 가까워졌다. 소티스가 팔을 살짝 벌렸다.

꿈인가, 싶어 뺨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그러자 소티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바람결에 스치는 그 작은 목소리는 그가 아는 바로 그대로라서, 레먼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티스 님. 그의 부름에 소티스가 속삭이듯이 말한다. 네. 소티스 님. 네, 레먼. 소티스 님.

[저 여기 있어요.]

그 말이 꼭 제게 와 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세차게 뛰었다.

사랑은 괴로운 거구나. 레먼은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이 떨림이 너무 실감 나서 죽을 것 같아요, 소티스 님. 저는 왜 이렇게 소티스 님을 사랑할까요. 저는 어쩌다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소티스 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갔는지도 모를 만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해요.

레먼의 열렬한 시선에 소티스가 가만히 그에게 기울어졌다.

그는 허공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실바람을 가닥가닥 찾아 품에 가두듯이 조심스럽게 팔을 말고, 그대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맑게 반짝이는 소티스의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가볍게 스쳐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이내 잡히지 않는 소티스가 레먼의 이마에 키스했다.

[당신을 좋아해요.]

레먼은 그 말에 기어이 울고 말았다. 호박색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꿈일 리가 없다. 어떻게 감히 그런 꿈을 꾸겠는가. 그러니 현실이다. 그 사실이 너무 이상해서, 신기해서, 기뻐서, 감격스러워서…….

“소티스 님…….”

레먼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사랑이, 소티스 님께 자유가 될 수 있을까요?”

소티스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아닐지도 몰라요.]

소티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들의 머리 위를 수놓는 새벽처럼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자유가 되어 주실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 말이 꼭,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

에드먼드는 속이 답답해졌다.

마리아네스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 가슴에 돌 하나가, 아니, 집채만 한 바위 하나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가슴을 몇 번이고 치던 에드먼드는 하릴없이 궁 밖을 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중앙 본궁의 앞에 오자 에드먼드는 자신은 절대로 그 돌을 내려놓을 수도, 내던져 버릴 수도 없을 거라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소티스가 무릎 꿇었던 곳.

“제가 더 초라하고 비참해져야 만족하시겠어요?”

사랑 때문에 불행해졌다던 여자.

“소티스가 너를 한평생 사랑했다고.”

그러면서도 한평생 저를 사랑했다던 여자.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 했을까.

사실 알고 있다. 이유가 없으니까 사랑이다. 사랑은 다만 실감할 뿐,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제 와 소티스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에드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핀에게 주었던 게 사랑이다. 그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에게 저도 모르게 끌렸던 게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소티스를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어떤 감정인지 에드먼드는 몰랐다. 나이가 서른을 넘었건만 제 마음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저는 당신이 좋아요, 소티스 님. 저는 당신이 좋아요.”

그 순간,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레먼 페리윙클을 보았다.

처음에는 허공에 대고 말을 하는 듯한 그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남부 왕국의 마법사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내쫓았을 것을, 차마 외국의 귀빈이니 그러지도 못하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게다가 조만간 왕국의 친서를 직접 전달하겠다나.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그의 존재만으로도 갑갑한데 저 꼴을 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속이 터질 것 같다.

“알아요. 그냥 꿈결 같아서 그럽니다. 하하, 아니에요. 조만간 직접 뵐 수 있다면 좋겠는데요.”

처음에는 미쳐서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대화하는 모양새였다. 마치 허공에 그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을 본다고 했었지.

그럼 지금 저 남자의 곁에는, 영혼 상태의 소티스가 있는 걸까.

한평생 저를 사랑했다던 여자. 제 마음을 갈구하다가 시들던 여자. 한때나마 아내였던 여자.

알고 있다. 그가 사랑하지 않았을 뿐,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 사실은 사랑해 마땅한 사람이다. 아름답고, 소담스럽고, 현명하며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줄도 안다.

그렇다면 나를 선택하지 말지.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꼬일 필요가 없었는데.

소티스, 당신은 나를 초라하게 해. 에드먼드는 애꿎은 그녀를 탓했다. 왜 당신이 멀어진다고 느낄수록 공허해질까.

“소티스 님은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에요.”

그 말에 누군가는 행복해지고, 누군가는 서글퍼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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