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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7)화 (58/121)

제57화. 그리움과 외로움 (2)

그건 그가 한 번도 들어 보려고 했던 적 없던 소티스의 이야기였다.

“너는 소티스가 왜 영혼이 되었는지도 모르지. 너무 슬픈데, 네 옆이 아니면 머무를 곳이 없던 마음이 뭔지 너는 몰라. 사랑하는 너에게 외면당하고 나니 세상에서 붕 떠 버린 마음을 죽어도 모른다고.”

마리아네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소티스는 내가 분통을 터뜨릴 때마다 그래도 나더러 네 곁에 있어 달라고 했어.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네가 내 말은 들을 거라고. 네게는 너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

“황성을 나서면서는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한테 피니에 전하의 친구가 되어 달라더라.”

“……핀의, 친구가 되라고?”

“그래.”

그녀는 침착해지기 위해 숨을 서너 번 크게 내쉬었다. 그러다가도 열이 다 식지 않았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다 대고 손부채질을 연신 이어 갔다.

“아무리 사랑조차 못 받은 황후라지만, 서녀가 저를 밀쳐 내고 들어왔으니 사교계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 거라더라. 그 궁에서 혼자 있으면 쓸쓸할 테니까. 자매처럼 여길 수 없다면, 제 후계자처럼이라도 대해 달라고…….”

“…….”

“멘데즈가 나쁜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진심을 담아 조언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는데. 그런 것도 모르지.”

허공에 가만히 떠 있던 소티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그녀가 황성을 떠나기 전, 마리아네스를 조용히 불러 함께 산책하며 그런 부탁을 했었다. 하나뿐인 친구는 당연히 펄펄 뛰었지만, 소티스는 뜻을 굽히지 않고 거듭 애원했다.

마리아네스여야 했다.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티스가 휘청거릴 때마다 잡아 준 사람이 바로 마리아네스가 아니었던가.

핀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떠나서, 황성에 외로이 남을 그녀가 가여웠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고독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 화려하고 비정한 곳에서 마음 둘 곳 하나 없다는 건, 너무 공허하고 쓸쓸한 일이다.

“…….”

에드먼드는 고개를 숙였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또 이런 식이다. 소티스와 엮일 때면, 에드먼드는 자신의 밑바닥을 보곤 했다. 그게 소티스의 잘못은 아니었으리라. 그저 제가 못난 탓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간 말하지 않았지?”

숨을 고르던 마리아네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넌 내 친구의 호의조차도 무기로 쓸 사람이니까!”

“난…….”

“이제 인정해.”

그녀가 에드먼드의 말을 잘랐다.

“넌 소티스에게 끔찍한 인간이야. 평생 그랬어.”

에드먼드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알아.”

알고 있다. 자신은 그녀에게 좋은 남편도, 좋은 황제도, 하다못해 좋은 동료조차도 되지 못했다. 무정한 남편이었고, 가혹한 황제였으며, 저를 불행하게 하는 악당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라고 한평생, 매일 해가 뜨고 질 때마다 소티스를 미워하기만 했을까.

잘해 주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한 적도 있었다. 에드먼드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친해지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어.”

그에게서 반쯤 돌아서 있던 마리아네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뭘 했는지 들어나 보자. 변명이라도 들어야 이 속이 가라앉을 것 같으니까.”

마리아네스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뭘 했는데, 에드?

에드먼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티스의 생일이라기에…… 체리 파이를 보낸 적이 있었어. 마침 귀한 체리가 선물로 들어왔거든. 황실 요리사에게 그것을 보내 파이를 구우라고 했지.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그날 경제학 수업 일정이 당겨졌어. 그래서 할 수 없이 만나기로 한 것을 취소하고, 소티스에게 물건을 전해 주었지.”

소티스는 허공에 뜬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났다. 연회도 마다하고 황후궁에 틀어박혀 있었던 자신은 아침나절까지 울적한 기분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몰랐다.

어린 마음에 왜 연회를 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 섞여들고 싶었고, 일 년에 하루뿐인 생일을 떠들썩하게 보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황태자비가 된 소티스는 현실을 너무 빨리 알았다. 이 궁에서는 누구도 저를 온전히 반기지 않았다. 그녀가 마리아네스를 만나기도 전의 일이었으니, 그 넓은 황성 속에서 소티스는 오로지 혼자였다.

그랬는데 에드먼드가 만나자고 했다.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지만, 요리사를 시켜 구웠다던 파이를 전해 주었을 때 소티스는 날듯이 기뻤다.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눈에 담아 주려 노력은 하려나 보다.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면 우리도 꽤 괜찮은 친구 사이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튿날, 소티스를 찾아갔더니 몸이 좋지 않아 만나지 않겠다더군. 시녀들의 반응은 묘하게 차가웠고, 그 앞에서 기다렸지만 소티스는 나오지도 않았어.”

소티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오지 않은 게 아니다.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체리 알레르기가 있었다. 사실 저조차도 알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고 에드먼드가 준 음식을 먹었다가 쓰러졌던 것이다.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시녀들의 반응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저를 진심으로 챙기는 몇 안 되는 이들이었으니, 어린 황태자비를 자꾸만 속상하게 하는 황태자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쓰러진 사이에 다녀갔었구나. 그건 몰랐었는데.

알았더라면 그렇게 야속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을.

“소티스는 체리 못 먹어.”

에드먼드의 얼굴이 창백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군. 몰랐어.”

“또 말해 봐.”

“소티스를 메리골드 저택으로 보낸 적이 있었어.”

“뭐?”

소티스가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내려갔다.

아마 그녀가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한창 소티스의 몸이 약했을 때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손발이 차게 식으며 쓰러지곤 했었다. 황성에서의 생활이 맞지 않았던 탓이다.

그때 에드먼드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휴양인 듯하니, 당분간 생가에서 지내는 것이 낫겠다며 소티스를 메리골드 저택으로 보내 버렸다.

대귀족 회의에서 아예 그 이야기를 올려 버리니 공작이 따로 반기를 들 새도 없었다. 소티스 또한 에드먼드가 준비한 마차를 타고 맥없이 돌아갔었다.

제 얼굴조차 보기 싫어서 치워 두는 줄 알았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가족들이랑 지내면 좀 나을 것 같아서. 나는 소티스에게 잘해 주는 방법을 모르니까…….”

“하아…….”

마리아네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리아네스는 생가로 돌아간 소티스가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리아네스에게만큼은 소티스가 하소연을 했던 까닭이다.

그때 메리골드 공작이 얼마나 포악을 부렸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황후로서 쓸모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돌변했다.

그때 처음으로 소티스가 마리아네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차라리 내가 없었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화내시지는 않았을 텐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네스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정말 모르는 것 같다. 뭐가 소티스에게 좋은지. 그러니까 소티스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조롱하는 카드나 썼겠지.”

“뭐?”

“작년에 그랬잖아! 네 생일 연회에 소티스가 안 가겠다고…….”

기사들의 교대 시간이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마리아네스는 얼른 목소리를 낮추며 격식을 갖췄다.

“그래서, 폐하께서 드레스를 직접 보내 주셨잖아요?”

“그랬지.”

“그 드레스 때문에 소티스 님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지 아세요?”

마리아네스의 눈이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에드먼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분명히 아멜리아 양에게, 소티스에게 어울릴 법한 드레스를 골라서…….”

아멜리아라면 그의 정부 중에서도 가장 소티스를 싫어하고 욕심 많았던 정부다. 핀을 만나기 직전까지도 에드먼드는 툭하면 아멜리아를 만나러 다니곤 했었다. 소티스는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레스를 고른 게 아멜리아였구나. 소티스는 그제야 제게 도착했던 새빨간 드레스와 그 안에 든 조롱이 가득한 카드의 의미를 알아챘다. 아멜리아는 자신이 황제의 곁에 붙어 있고 싶었을 테니, 황후인 자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소티스는 그 드레스를 당연히 에드먼드가 보냈다고 생각했다. 의기소침해진 그녀는 그 드레스를 어쩌지도 못하고 옷장에 처박아 두기만 했고, 그로부터 며칠간 죽은 듯이 살았다.

그런 시간이었다.

[우리는 참 많은 시간을 서로를 오해하는 데 낭비했네요, 폐하.]

그냥 서로 탁자 앞에 앉아 몇 시간이고 떠들어 보았더라면, 적어도 입을 열고 목청을 높여 제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이것보다는 조금 더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었을까?

미련에서 비롯된 아쉬움은 아니었다. 소티스는 그저 시원섭섭한 감정만을 느끼며 웃을 수 있게 된 자신을 발견하고는 적잖이 놀랐다.

참 신기한 일이다.

한평생 에드먼드만을 사랑할 줄 알았는데.

“그래…….”

에드먼드가 넋이 조금 나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소티스에게 끔찍한 사람이었구나.”

“이제 좀 아시겠어요?”

“하지만 나는 핀을 선택했다.”

“그랬죠.”

마리아네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피니에 로즈우드 님을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폐하. 선택하셨잖아요. 뭐가 어떻게 됐든요.”

“……그건 여동생으로서 하는 말인가?”

“어머, 무슨 소리람. 제 생일이 더 빠르거든요? 그리고 언니로서 하는 말도 아니에요.”

“그럼?”

“소티스 님의 뜻에 따라 하는 말이죠.”

마리아네스는 소티스와 했던 대화를 가만히 떠올렸다.

“소티스 님, 왜 핀 님을 미워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보면 소티스 님의 남편을 유혹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정말 유혹이었을까요?”

“네?”

“……텅 비어 보여요. 저는 핀 님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람이 참 텅 비어 보이는구나. 그 공허함을 들여다보면, 마치 심연처럼 밑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것 같아요.”

“…….”

“그래서, 너무 외로워서 누구든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마리아네스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혼자 두지 마세요.”

“…….”

“사람은 혼자서 완벽해지지 못해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어도, 아무리 강한 사람이어도.”

그러니까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마리아네스는 처음으로 소티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로웠겠구나.

아무리 훌륭했어도, 아무리 강했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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