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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6)화 (57/121)

제56화. 그리움과 외로움 (1)

소티스 메리골드의 사랑은 그리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레먼과 함께 있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느새 제 삶에 스며든 그가 너무도 커서, 따뜻해서, 그만큼 중요해서.

그가 없는 삶이 싫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듯했다.

“…….”

그렇게 레먼을 생각하다가 얼핏 잠들었을 때였다.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있던 그녀는 그대로 힘이 빠져서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잔뜩 옹송그린 제 몸이 퍽 작아 보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

그러니까, 제 몸이 보였다. 마치 타자의 시선으로 가늠하듯이 자신을 살필 수 있었다. 소티스는 깜짝 놀라 손을 뻗어 보았다.

반투명한 손이 보였다. 그 너머로 동그랗게 웅크린 제 몸이 얕게 들썩이며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영혼과 몸이 분리되었다.

[…….]

소티스는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가볍게 사뿐사뿐 걷듯이 방을 한 바퀴 돌아 보고, 살짝 날아올라 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큼 자유로웠다.

영혼이 분리된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분리되기 직전의 감각을 곱씹어 보니 더욱 그랬다.

처음 쓰러졌을 때는 어땠더라. 끝도 없는 깊은 슬픔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진다면 그런 기분이었을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 버린 것처럼, 절대 저 육신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잠들기 전 레먼 페리윙클을 생각했다.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간의 눈을 피해서, 되도록 자유롭게.

그 의지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지금쯤 주무시려나.]

소티스의 몸이 작아졌다. 점차 흐려지고 작아지다가 이내 한 마리의 나비가 되었다. 파르스름한 날개를 파닥이며 소티스는 창문을 넘어갔다. 실체가 없으니 못질한 빗장을 스쳐 지나가는 날갯짓이 한없이 가벼웠다.

무엇도 그녀를 가로막을 수 없었으니, 소티스는 온전히 자유로웠다.

그녀는 중앙 정원을 가로질렀다. 낮까지만 해도 저기서 무릎을 꿇고 앉아 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비가 되어 어둠에 잠긴 풍경을 바라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일 때였다. 어디선가 언성 높여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둘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했다. 소티스의 몸이 자연히 기울었다.

“폐하를 위해 어떤 것도 해 드리지 않을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마리아네스였다.

그녀는 씨근거리며 에드먼드에게 연이어 소리치고 있었다.

“황실 직속 피아니스트? 그만둘 거예요. 연주를 들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껏 쳐야 하는데, 폐하의 얼굴만 보면 속이 답답해서 건반이 보이지도 않아요. 세톤느 제4왕자와의 약혼이요? 꿈도 꾸지 마세요!”

소티스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세톤느 제4왕자와의 약혼이라니? 마리아네스에게는 다른 약혼자가 있었을 텐데!

“감정적으로 굴지 마, 마리아네스.”

에드먼드가 핀잔하듯이 말했다.

“추문까지 있었던 그대가 이보다 더 좋은 혼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하! 더 좋은 혼처!”

마리아네스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필요 없거든요, 폐하. 결혼 안 하면 누가 덜컥 죽어 버리기라도 한대요? 그리고 우리,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죠. 그 추문을 누가 만들었는데요? 제 전 약혼자가 갑자기 폐하의 새 황비에게 눈이 뒤집혀서 사랑이니, 유혹이니 헛소리를 한 게 제 흠인가요?”

소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성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역시나 마리아네스 로즈우드의 일이었다. 애당초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이치고는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그녀의 약혼자가 마리아네스에게 줄곧 피아니스트 일을 그만두고 영지에 가서 자신의 일을 도우라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랑조차 없는 결혼에 자신의 직업까지 희생할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고, 그럴 거라면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강하게 나오기까지 했다.

그렇게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던 도중, 그 약혼자가 피니에 로즈우드에게 반했다며 황비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일이 벌어졌다. 저를 정부로 삼아달라 청하는 모습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에드먼드가 그를 불러다 다그치자, 약혼자는 피니에가 저를 먼저 유혹했다면서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서녀라지만 같은 로즈우드 가문의 여인들이다. 정략혼 때문에 정부 제도를 암암리에 눈감아 준다지만, 그래도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라는 게 있었다.

로즈우드 후작은 마리아네스의 파혼 요청을 들어주었다. 핀이 그를 정부로 받아 주지 않은 거야 당연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좋다고 했잖아!”

에드먼드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세톤느 제4왕자와 마리아네스의 약혼을 주선한 건 에드먼드였다. 아무리 의도한 것은 아니라지만, 서녀 때문에 적녀의 결혼이 틀어졌으니 에드먼드가 중간에 나서서 중재해 주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다. 안 그래도 핀 때문에 마리아네스의 처지가 우스워졌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오던 참이다. 그 적녀가 황제의 유일무이한 소꿉친구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랬다.

어중간한 귀족 가문의 자제로는 안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외국의 왕족이었다.

멘데즈의 북동부에 위치한 세톤느 왕국은 어마어마한 재력을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제4왕자는 광산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서, 멘데즈의 황제보다도 부유하다는 말이 세간에 심심찮게 나돌 정도였다.

게다가 세톤느는 예전부터 혼약을 통해 멘데즈와 친교를 다지고 싶어 했다. 피니에가 황후가 된다면 로즈우드는 황제의 외가가 된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국제적으로도 나쁠 것 없는 소식이었다.

마리아네스는 소티스의 외출 때문에 에드먼드가 길길이 날뛸 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 친구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 조건으로, 그가 주선한 결혼을 수락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앞뒤 따지지 않고 소티스를 잡아들였다. 마리아네스에게도 그 약혼을 지킬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약속했잖아, 마리.”

에드먼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넌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며. 어렸을 때 그랬잖아.”

“맞아, 난 그랬어.”

마리아네스가 보란 듯이 코웃음 쳤다.

“하지만 넌 아냐, 에드!”

“…….”

“넌 약속을 우습게 알았잖아. 나랑 한 약속만 안 지켰어? 아니지! 소티스의 약속은 애들 농담만도 못한 것처럼 취급했잖아. 매번 그랬어. 그러면서 사람들이 네게 성실하길 바라지.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니야?”

그녀의 직설적인 말이 따박따박 쏟아졌다.

소티스는 깜짝 놀라 주춤거리며 조금 물러났다. 평소의 마리아네스도 똑 부러지고 제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이지만, 이렇게까지 뾰족하게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리아네스는 달랐다. 그녀는 에드먼드를 당황하게 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 폐하. 눈이 있으면 제 친구에게 한 짓들을 좀 돌아보세요. 오늘 낮에 무릎 꿇고 있던 소티가 기억도 안 나세요?”

“…….”

“너 그렇게 살면 벌 받아, 이 나쁜 자식아. 에드, 너 뭐라고 했어? 내가 다 그만두고 로즈우드 영지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 너한테 친구는 나뿐이니까 곁에 있어 달라고 했잖아? 소티스의 친구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네 편도 되어 달라고 했지?”

“……그래.”

“내가 널 언제까지 참아 줘야 해?”

마리아네스가 씩씩거렸다.

“백번 양보해서 소티스가 싫다고 하자. 난 네가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연애결혼이나 꿈꾸는 바보 같은 낭만주의자인 줄은 몰랐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소티스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강짜를 부리는 거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려고 했어. 그런데 넌 그걸로 끝나지 않았어. 툭하면 소티스를 괴롭혔잖아!”

“……그러면 소티스가 그만두면 되잖아!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잘해 줄 수는 없어!”

“핑계 대지 마!”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이 고함쳤다.

“그거 알아? 에드먼드. 넌 네게 잘해 주는 사람을 꼭 바보로 만들어. 사람을 그런 식으로 진저리 나게 만든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걸 못 해서, 사람을 바짝바짝 말려서 괴롭히고…… 그렇게 다 쳐 내고 나면 네 곁에는 누가 남아? 피니에 로즈우드?”

에드먼드가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마리아네스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좀 잘해 주지 그랬어!”

그가 멈칫했다. 마리아네스가 눈물까지 글썽였던 까닭이었다.

“너라도 좀 소티스에게 잘해 주지 그랬어, 에드먼드. 소티스는 너 하나만 보고 거기까지 왔는데. 소티스한테는 돌아갈 길도 없었는데. 황제가 외면한 황후가 뭘 할 수 있겠어? 평생 조그만 궁에 틀어박혀 지내는 게 전부였잖아. 회의에 참석할 때가 아니면 본궁에 얼씬도 못 한 채 그 조그만 데서만 지냈다고.”

“……숫기가 없어서 그런 거 아냐? 난 사교계에 나가서 교류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었어.”

마리아네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퍽이나 나갈 수 있었겠다. 네 잘난 정부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지 않았어? 오로지 소티스를 모욕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을 거 아냐? 황후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황제가 정부 편을 들 텐데, 그 여자들이 거리낄 것이나 있었겠어?”

“내 정부들이 그랬다고?”

“당연하지! 힘을 과시하고 싶을 테니까!”

에드먼드는 조금 놀라서 주춤거렸다.

그는 소티스가 그저 내성적이고 사람을 대할 줄 몰라서, 사교계 하나 휘어잡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고 생각했다. 늘 울적해 보이는 얼굴로 조그만 정원이나 돌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녀를 조금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소티스는 여럿이 모이는 자리뿐만 아니라 두어 명이 모이는 자리도 잘 견디지 못했다. 게다가 에드먼드의 정부들이 소티스가 사교 모임이라면 다 피하니 친해질 방법이 없다면서, 차라도 한잔 같이 마시고 싶다고 하기에 그 말을 전해 준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소티스는 꼭 흙이라도 먹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에드먼드는 그 조그만 사회성조차도 발휘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돌이켜 보니 그게 다 소티스를 곤란하게 하기 위한 정부의 계책이었다. 마음도 사지 못한 황후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다 지나간 일이니 새삼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덮어 두고 소티스의 탓으로 돌린다면 편했으니까.

그녀를 밀어내면 후련해질 것 같아서. 무엇도 감히 에드먼드를 강제하고 휘두르지 못할 것 같아서. 소티스의 훌륭함에 치졸한 마음을 품는 자신을 보고 자괴감을 느끼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 사실을 깨달은 에드먼드는 그저 망연해졌다.

왜?

그는 몰랐다지만, 그녀는 알고 있지 않았나.

소티스는 도대체 왜 그 모욕을 버티고 있었나?

사랑이라면 그럴 수 있나?

“너를 사랑했잖아.”

마리아네스가 에드먼드를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듯 이를 갈았다.

“소티스가 너를 한평생 사랑했다고.”

“…….”

“이 나쁜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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