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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5)화 (56/121)

제55화. 무너질 운명 (4)

에드먼드는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몇 차례 소리 없이 벙긋거리기만 할 뿐, 결국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소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제가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해져야 만족하시겠어요?”

“…….”

“처음엔 궁금했어요, 폐하.”

그녀가 차분하게 웃었다.

“대체 무슨 비밀이길래 폐하께서 저를 이렇게 싫어하시면서도 끝내 내치지 않으셨는지. 천상 군주셨던 분께 그깟 비밀이 다 무슨 의미일까, 싶기도 했고요.”

“소티스.”

“말 안 해요.”

소티스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덧붙였다.

“아버지는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분이지만, 적어도 저는 안 그래요. 폐하의 인생에서 말끔하게 사라져 드릴게요. 그럴 수만 있다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요.”

당신의 기원대로, 그리고 내 소원대로.

내가 사라져서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러니까 이걸로 만족해 주세요.”

에드먼드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협박하는 건가?”

“아뇨. 부탁드리는 거예요. 하지만 부탁을 드렸는데도, 이런 일로 공연히 저를 붙잡으신다든가 제 선의를 모욕하신다면…….”

그녀의 얼굴에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는 협박도 불사하겠지요. 저는 이제 폐하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해요.”

“…….”

“그렇게 밑바닥까지는 가지 말아요, 우리. 사랑은 없었다지만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잖아요.”

“……그게 옳은 거니까?”

“네, 그게 옳은 일이니까요.”

에드먼드가 한참 만에 말했다.

“……알고 있나? 소티스. 그대는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준 적이 없어. 나를 사랑했다지만, 언제나 규칙 앞에서는 엄격했지. 한번은 그대에게 친절해 보려고 세톤느의 왕자에게 보석을 받아 목걸이로 만든 적이 있었어. 그랬더니 그대가 말했지.”

소티스는 기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의 말을 입술 끝에 올렸다.

“폐하, 세톤느의 광물은 모두 마석 감정을 받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한 일로, 원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건 그대가 태어난 날에 발견되었다던 보석이었어. 상등품을 감정하면 그대가 보고서를 읽게 되지. 그 선물의 용도조차도 알게 되고.”

그녀가 한숨을 쉬듯이 대답했다.

“그게 서운하셨어요? 폐하의 편이 되어 눈감아 드리는 게 아니라, 원칙을 지켜서요?”

귀한 보석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면 됐다. 하다못해 그가 그녀를 슬프게만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몇 년 전, 그 일로 마음이 단단히 상한 에드먼드는 이후로 마석 감정에 관련된 업무를 다른 귀족에게 일임해 버렸다.

돈으로 지위를 산 남작이 일을 건성으로 처리하는 탓에, 그해 겨울 마석 폭발 사고가 벌어졌다. 어린아이가 다쳤고, 그에 관련된 일을 처리하느라 결국 소티스가 진땀을 흘렸다.

“그래도 저는 그랬어야 했어요.”

소티스가 에드먼드의 그늘진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진저리를 치시더라도, 저는 옳은 길만을 걸었어야 해요.”

“대체 왜…….”

“왜겠어요, 폐하?”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야 제 자리를 지키니까요. 사랑했던 이에게 따뜻한 시선 한번 받지 못해도, 적어도 그 옆자리에는 앉을 수 있었으니까요. 거기가 아니라면 어디에도 제 자리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폐하.”

“…….”

“이혼당한 제가 공작가에 돌아가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요? 오로지 황후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키워 낸 아이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아버지께서는 곧장 받아들이셨을까요? 아뇨, 끝없는 손찌검이 기다렸겠지요. 아버지께서 셰릴을 때리며 키우셨다는 소문을 폐하께서는 못 들으셨던가요?”

들었던 것도 같다. 그에게는 그리 중한 일이 아니라 그저 흘려들었던 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넘겼던 일은,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한 과거이기도 했다.

“어떤 결함도 없이 살아야 그나마 덜 우스꽝스러워져요. 폐하는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보신 적 없었겠지만, 제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어요. 폐하께서 융통성을 발휘해 달라고 말씀하시는 동안, 저는 그걸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지켜 냈고요.”

“…….”

말문이 막힌 에드먼드에게 소티스가 속삭였다.

“올바른 사람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당신은 죽어도 모르겠지.”

에드먼드는 눈물이 가득 차오른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를 보았다.

죄책감이라는 알량한 이기심 뒤에 숨어 외면했던 그녀의 슬픔을, 절망을, 아픔을, 그 날것의 감정들을 처음으로 오롯이 직면했다.

아무 말도 없이 넘어갈 때마다 괜찮은 줄 알았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화를 내지도 않는 거라고 속 편히 여겼다. 이상할 정도로 초연한 것조차도 타고난 침착함 때문이겠거니 했다.

그건 얼마나 안일한 착각이었나.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 같은 건 없었을 텐데도.

“포기하지 그랬어.”

그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소티스, 왜 나를 포기하지 않았지? 그냥 미워하면 편해지잖아. 그대도, 나도, 서로 사랑 같은 건 그만두고 돌아서서 각자의 삶을 살면…….”

“없었어요.”

소티스의 뺨으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그럴 방법이 제게 없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당신 없는 삶이 제 머릿속에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어요. 당신의 옆자리만이 제 삶의 유일한 목표인 것 같았다고요.”

“…….”

“알아요. 미련하죠. 제 잘못이에요. 누군가를 삶의 이유로도, 중심으로도 삼아서는 안 됐어요. 그런데요, 저는 황후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였는데…… 황후가 아니라면, 그럼 저는 뭔가요?”

말해 줄 수 없었다. 에드먼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외면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깨달았다.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죠.”

소티스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저 동경이거나, 이기심이거나, 자기연민이거나, 그 외의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홀로 견뎌 내야 하는 이 현실이 너무 외로워서, 괴로워서. 뭐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붙들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녀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가장 밑바닥의 진심을 쥐어짰다.

“그래도 미워하진 못했어……. 당신을 미워하면, 그런 사람에게 인생을 통째로 걸었다는 게, 너무 슬퍼지니까…….”

“…….”

“이제 포기할게요. 원하는 만큼 무너져도 봤고, 이젠 넌더리 나니까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게요.”

언젠가는 원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이 비수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에드먼드는 제 가슴께에 손을 얹어 보았다. 기분 나쁜 욱신거림이 전해졌다.

제가 무신경한 말을 할 때마다,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 때마다, 외면할 때마다, 냉대할 때마다.

그녀는 이 고통을 수십 번씩 느끼며 살았던 걸까.

왜 몰랐을까.

왜, 몰랐을까.

“저를 자유롭게 해 주세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에드먼드는 소티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도대체 어쩌다가.

“소티스 님!”

그때, 귀빈용 건물 쪽에서 마리아네스가 달려왔다. 그녀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전력 질주한 탓에, 그들의 곁에 도착하자마자 허리를 숙이고 헉헉거렸다.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황후궁으로 돌아가요. 네?”

“……마리아네스.”

마리아네스의 녹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아무 데서나 무릎 꿇지 마, 소티…….”

마리아네스는 소티스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일으켰다.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탓에 마른 몸이 휘청거렸다.

마리아네스는 그 모든 게 그의 잘못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에드먼드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더 하실 게 남았나요?”

에드먼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네요.”

톡 쏘아붙인 마리아네스는 소티스를 얼른 부축했다. 뾰족한 시선은 온데간데없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소티스를 살피며 치맛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살뜰하게 털어 주기까지 했다.

“아니다. 이럴 게 아니라 제 방으로 가요, 네? 거긴 창문에 대고 못질이나 해 둬서 제대로 볕도 들지 않잖아요. 시녀들도 없고요. 안락한 제 방으로 모실게요.”

소티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괜찮아요. 제 궁으로 가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잠잠히 있기로 약속해서, 따로 만나지 못할 줄 알았어요.”

“아, 그게요. 제가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마리아네스가 소티스를 이끌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레먼 님의 전언이에요. 베아툼 왕국에서 공식 사절단이 출발했답니다. 국왕 전하의 친서를 가진 대마법사께서 직접요.”

“……직접?”

“네, 그렇다니까요. 전령이 이제 도착했으니, 내일쯤 국경을 넘어오겠네요. 접경 지역이 저희 영지 쪽이라 잘 처리해 뒀어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소티스 님. 미리 이야기하면 폐하 쪽에서 진위를 의심하실까 봐 때를 기다리신 거죠? 레먼 님께서 여태 잠자코 있던 점을 용서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소티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괜찮아요. 두 분께서도 낙태 미수 건에 가담한 건 아닌지 따로 조사를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저 때문에 공연히 고초를 겪으셨네요. 죄송해요.”

소티스의 사과에 마리아네스가 코웃음 쳤다.

“나 참, 그게 어디 소티스 님의 잘못인가요? 폐하 때문이지.”

“아하하.”

“저도 이제는 못 참아요. 폐하께서는 이번 일을 단단히 후회하시게 될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라고요.”

“……네?”

마리아네스가 소티스의 손을 꼭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두고 보세요. 폐하께서 아주 뼈저리게 후회하시는 모습을 보시게 될 테니까요. 여기서 며칠만 잘 기다리시는 거예요. 알겠죠?”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쌩하니 돌아가 버린 친구의 뒷모습에 소티스가 짧게 웃었다. 막막하고 서글펐는데, 그나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아직 빗장을 뜯어내지도 않은 폐궁은 어둡고 추웠다. 소티스는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이마를 댔다.

조금이면 된다. 온전한 자유를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다.

아는 데도.

“보고 싶어…….”

지금 이 순간, 레먼 페리윙클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황제가 되고 싶었다.

다른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오로지 그 자리만을 꿈꿨고, 자신이 황후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무한히 감사했다. 황위를 물려받을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도 달게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에드먼드의 삶에, 그야말로 ‘훌륭한 사람’이 나타났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황후감이었다. 제가 평생 익히려 애쓰던 것들을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당연하게 해냈다.

에드먼드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동경이었다. 오만하고 비열한 메리골드 공작과는 달리 맑고 또렷한 그녀가 신기하고 부러웠다. 화려한 매력은 없었으나 분위기가 부드러워 함께 있기 편안했다. 저를 보며 미소 짓는 얼굴조차 순수해 보여서 좋았다.

그러나 곧, 그녀와의 약혼이 강제되었다. 소티스와 결혼하지 않으면 황위를 물려줄 수 없다고 했다. 약점을 잡혔기 때문에 그녀의 눈 밖에 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에드먼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존심이 상했다. 제 세력이 안정될 때까지만 비위를 맞추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친모의 당부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얄궂다. 누군가 그의 감정을 강제한 순간, 찬란한 동경은 치졸한 열등이 되었다. 떨쳐 내지 못하는 여인의 훌륭함은 그의 결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지 말지. 날 사랑하지나 말지. 차라리 날 미워하고, 내게서 도망가 버리지.

에드먼드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다. 소티스가 포기하고 나가떨어지기만을 바라며 일부러 더 모질게 군 적도 있었다. 그녀가 제 통제하에 있기만을 바라는 마음과, 반대로 그녀를 완전히 밀쳐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열하게 충돌했다.

그냥 소티스가 에드먼드를 포기하면 될 일이었다. 그가 싫어 죽겠다고 외치면 그만일 일이었다. 훌륭한 소티스는 그와 달리 약점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처럼.

그렇게 생각하던 에드먼드는 문득 어떤 의문에 사로잡혔다.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을까?

긴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사랑했기에 애를 썼고, 누군가는 사랑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뒤, 비로소 누군가의 사랑이 끝났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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