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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4)화 (55/121)

제54화. 무너질 운명 (3)

소티스 메리골드는 해가 뜰 무렵부터 본궁의 정원에 무릎을 꿇은 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을 경비병들이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키고 있었고, 지나가는 하인들이나 교대하러 가는 기사들이 힐끔거리며 시선을 던졌다.

지난 저녁, 소티스는 핀에게 그녀가 유산할 뻔한 일을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핀은 개인적으로 받는 사죄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며, 소티스에게 중앙 본궁으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

피니에 로즈우드의 의도는 투명해 보일 정도로 명확했다. 전 황후인 소티스가 새 황비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을 세상에 널리 보이고 싶은 거다. 힘의 흐름을 더 많은 이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소티스를 더욱 철저하게 내쫓기 위해서.

소티스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아벨의 말이 옳았다. 등 돌리고 도망치거나 눈 감고 모른 척한다고 해서 그만둘 이들이었다면,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보여 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맞설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방식이 무엇인지도.

“저기…… 메리골드 공녀 아니야?”

“그러게. 그 왜, 며칠 전에 황제 폐하께서 수배령을 내리셨잖아.”

“황비에게 낙태약을 먹였다고?”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궁지까지 몰리면 사람이 평생 안 하던 짓도 하려나…….”

“그러게. 모진 짓은 못 하는 사람이었지?”

오전 열 시가 되었다. 중앙 본궁을 드나드는 이 모두가 소티스를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각종 회의나 행사, 귀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귀족들도 모두 정원을 지나가다가 소티스를 발견했다.

그녀는 꿋꿋하게 핀을 기다렸다. 핀이 일부러 늑장을 부려, 그 덕분에 자신이 황성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이미 각오한 일이다.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다면, 마음의 준비가 된 오늘인 게 낫다.

동쪽에서 나타난 흰옷의 여인은 해를 등지고 앉아 침묵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렸으나, 이상하리만치 경건해 보이는 그녀를 감히 비웃지는 못했다.

“소티스 님.”

핀은 아주 느린 걸음으로 소티스에게 다가왔다. 붉은 머리의 여인은 어느덧 제법 부른 배를 쓸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었건만, 핀은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놀랍게도 피니에 로즈우드는 비참해 보였다.

“제게 잘해 주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소티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배신당할 일이 두려워서 나쁘게 굴 수는 없었어요. 저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랍니다.”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가 붉은 머리의 황비를 차분하게 응시했다.

“전하께서 나아지길 바랐답니다. 그게 제 진심이었어요.”

핀이 고개를 들었다.

“저도 알아요.”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핀은 문득 이 모든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저들은 이 장면을 보고 뭐라고 떠들어 댈까. 표독스러운 새 황비가 기어이 폐황후를 무릎 꿇렸다고 할까? 아니면,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지 확인하며 혀를 내두를까?

누군가는 소티스를 지독하다고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핀을 지독하다고 할 것이다. 셈이 끝난 사람들은 더 가엾은 이에게 꽃을, 더 화려한 이에게 돌을 던지리라.

“당신이 무너져야 제가 설 자리가 생겨요.”

핀의 표독스러운 말에 소티스가 평화롭게 화답했다.

“그래요, 여기 서세요. 저는 다른 곳에 설게요.”

소티스는 이제 무엇이 자유로운 삶인지 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안다. 그 정답은 에드먼드의 곁에는 없었다.

이제 핀이 탐내는 그 어떤 것도 욕심나지 않았다. 그러니 기꺼이 양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려 줄 것이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무엇도 쉽게 넘겨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요, 핀 전하.”

소티스가 핀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번 선택은 양날의 검이다. 소티스가 공개적으로 망신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일찍 나왔다. 정원사와 하녀, 경비병, 하다못해 물건을 나르는 상단 인부들마저도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장식 하나 달리지 않은 드레스 차림으로 꿇어앉은 소티스를 보며 그들은 저도 모르게 가엾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소티스가 핀의 아이를 해치려 했던 의혹이 퍼지더라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누구에게도 모진 말을 하지 않던 전 황후의 무릎 꿇은 모습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핀의 비정함을. 다음 희생자는 자신이 될 수도 있음을.

정말로 잡음 없이 황후가 되고 싶다면, 용서하는 시늉을 해서 동정표마저도 챙겼어야 했다.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 황성에서 여인이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무결하거나, 잔인하거나.

“저를 밀어내는 건 괜찮아요. 그러나 제 자유를 억압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충분히 다른 길로 향할 수 있어요.”

“동정표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핀이 미간을 구겼다.

무심코 그녀를 일으킬 뻔했다. 핀은 숨을 차분히 골랐다. 하마터면 그녀의 어깨를 쥐고 일으키며 말을 걸 뻔했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소티스 님, 저 따위에게 웃어 주지 마세요. 당신이 그렇게 웃으면 가슴 한구석이 자꾸 아파요.

“그래도.”

소티스가 속삭였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저를 더 건드리신다면, 저는 혼자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

“저와 싸우는 게 아니더라도, 자멸적인 선택을 하지는 마세요. 자신을 갉아먹어서까지 이루어야 하는 소원은 너무 슬프잖아요.”

“모든 것에는 대가가 필요해요.”

핀이 쏘아붙였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전하와, 그분의 아이를 걸었나요?”

“…….”

“시간을 조금만 더 들이면 해결될 문제들이에요. 아이를 낳고 나서 황후가 되어도 돼요. 어차피 폐하는 전하를 사랑하시잖아요.”

“저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이해도, 조언도 필요 없으니 됐어요.”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피니에 로즈우드가 말했다.

“때로는 시드는 게 가장 완벽한 운명인 것이 있어요.”

그 말의 의미는 무척이나 모호해서, 소티스는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으며 뜻을 헤아렸다. 제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였다.

“이제 일어나세요.”

소티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잔디밭 한가운데에 꿇어앉은 채였다. 마치 그곳에 뿌리라도 내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핀이 당황하여 재차 말했다.

“이만하면 됐다고요. 돌아가세요.”

“아뇨.”

소티스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제 사죄는 끝나지 않았답니다. 에드먼드 폐하를 불러 주세요.”

“소티스 님!”

“아기님의 아버지시잖아요. 사과를 받으실 권리가 있어요. 그리고, 이 모습을 누구보다 기다리신 분이시고요.”

소티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꺾이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

본궁 앞에서 숨죽이던 귀족들 모두가 그녀의 음성을 들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 폐하를 기다리겠습니다.”

태양을 닮은 여자였다.

황제의 사랑을 받지 않고도 황성에서 이십 년도 넘게 버틴 여자. 검 한 자루 없이, 독을 품은 혓바닥조차 없이.

오로지 한낮의 볕처럼 내리쬐는 원칙으로, 원칙과 규율로 모두와 싸워 이긴 여자.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

***

“……소티스가 정원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무릎 꿇고?”

에드먼드가 시종장을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 그것이, 해 뜰 무렵부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이다. 그가 허, 하고 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내게 사죄하라고 한 기억이 없는데. 핀에게나 잘하라고 전해라.”

“황비 전하는 이미 만나셨답니다. 공녀께 들어가라 하셨다지만, 기다리시겠다고 하며…….”

“하아.”

에드먼드가 이마를 짚었다. 일이 꼬였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힘의 흐름을 적당히 과시하는 건 좋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 특히 소티스처럼 유약하고 도덕적인 부류의 이를 상대할 때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청문회를 열거나 곧장 처벌을 내리는 건 효과가 없었다. 적당한 사죄를 통해 풀어 주고 나쁜 소문과 함께 쫓아낼 셈이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그는 애꿎은 서류만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상황 자체가 짜증스러워서, 눈앞에 있는 것을 죄다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소티스를 상대할 때면 늘 이런 식이다. 그래서 에드먼드는 그녀가 거북했다.

그래. 매일 그녀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동정하기도 했고, 공감하기도 했고, 이 감정의 골을 메우려 나름대로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메리골드 공작의 딸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보면, 소티스는 생각보다 괜찮은 여인이었다. 소담한 듯 아름다웠고, 현명했으며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력가였다. 그녀는 에드먼드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고, 그의 마음을 사는 게 아니라 그의 미움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불편했다. 동경과 동정이 과해지자 미움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볼 때면 에드먼드는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 초라한 죄책감이 지긋지긋했다.

차라리 그녀가 사라진다면.

소티스가 무너져 버린다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는데.

“…….”

그렇지 않았다. 정말 잘못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일에 온종일 무릎을 꿇고 있다는데도 후련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더 답답해지기만 했다.

에드먼드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소티스에게 향했다.

***

“일어나라.”

에드먼드가 소티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소티스가 고개를 들었다. 정오의 볕을 받은 그녀가 에드먼드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복수를 다짐하지도 않았다.

그저 동정하듯이 물었을 뿐이었다.

“이제 충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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