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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3)화 (54/121)

제53화. 무너질 운명 (2)

메리골드 공작이 향한 곳은 폐궁이었다.

아벨은 제 불쾌한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이 훤히 보이니 그나마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폐궁에 도착한 공작이 자신의 딸과 대화하겠다고 하자, 한참 고민하던 경비병들은 두 사람이 정원에서 잠시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벨은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막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 처음부터 온 적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기를 희망했다. 소티스의 일에는 웬만하면 직접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바람을 보란 듯이 짓밟았다.

“네가 기어코 아비 인생을 망치려고 들지!”

공작의 노성에 놀란 새들이 나무 위에서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저 죽은 듯이 지내는 것도 못 하고, 황제의 환심 사는 것도 못 하고, 황비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조차도 못 하고! 이제 이를 어쩔 테냐, 응? 이대로 가문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어야 속이 풀리겠어? 너 때문에 손해가 막심하다!”

그 이후로도 모욕적인 말들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공작은 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거나, 코앞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우악스레 쥐었다 놓기도 했다.

아벨은 메리골드 공작의 본성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소티스는 큰소리가 나거나 상대방이 손을 올리면 흠칫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행동이 반사적으로 나온다는 건, 누군가 그녀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손찌검하는 일이 잦다는 뜻이었다.

“그간 그래도 아비 얼굴에까지 먹칠을 하지 않아 내버려 두었건만, 이렇게 나오다니. 뭘 하는 게냐? 당장 황비에게 가서 빌어라, 소티스. 무릎 꿇고 애걸이라도 하라고! 너는 가지지도 못하는 그 빌어먹을 아기, 죽일 거라면…….”

공작은 말을 맺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차라리 죽일 거면 확실히 해치라고 하고 싶었겠지. 혹시라도 듣는 귀가 있을까 입을 닫는 모습이 퍽 비겁했다. 아벨은 삐딱하게 웃으며 나무 그늘에서 몇 발짝 걸어 나왔다.

소티스는 발끝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체념을 학습한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나무처럼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바람이 되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

아벨은 조금 아연해서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지척에 경비병들이 있다. 부녀의 대화를 뻔히 듣고 있지만, 참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병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그들이라고 사람의 마음이 없겠는가. 폭언 뒤에는 폭행이 따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끼어들 명분이 없는 것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공작이니까.

하지만 방법이 하나 있다.

도와 달라고 하면 된다.

한마디면 된다. 도와주세요. 누구 안 계세요.

그러나 소티스는 그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홀로 참았기에 도움을 청하지도 않게 되었을까.

“네가 셰릴처럼 맞아 봐야 정신을…….”

얼굴이 시뻘게진 메리골드 공작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소티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곧 얻어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아벨이 나섰다. 뒤에서 다가간 그는 공작의 팔을 잡아챘다. 악, 공작의 입에서 반사적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벨이 그 힘을 이용해 팔을 꽉 쥐고, 이내 공작을 떠밀어 버린 탓이었다.

“……대공 전하?”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으나 상대를 알아봐 버린 탓에 덤비지 못했다. 저보다 신분이 높은 이에게 언성을 높였다가는 일이 피곤해진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게 무슨 짓인지 묻고 싶군.”

“그건…… 부녀간의 대화일 뿐이었습니다.”

“요즘은 대화를 윽박지르고, 모욕하면서, 그리고 주먹을 들고 내리치면서 하는 모양이지?”

아벨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소티스가 눈을 천천히 떴다.

검은 눈동자가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등 뒤에서 내리쬐는 볕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검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짙은 눈동자는, 이상하게도 든든하게 느껴졌다.

“감정이 격앙되면…….”

“그래?”

아벨이 주먹 쥔 팔을 높이 올렸다. 소티스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구하러 올 레먼조차 없으니 묵묵히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테니까. 누구도 몰락하고 무너지는 이의 편에 서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러나 아벨이 나타났다. 평생 그녀를 외면하기만 했던 이였는데.

아벨은 메리골드 공작을 때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듯, 멸시 가득한 시선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팔을 내렸다.

“상식적으로 행동하시오, 공작. 이런 모습을 세간에 들켜 봤자, 당신이 대귀족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시간만 길어질 뿐이지. 안 그런가?”

아벨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이나 지위를 무기로 휘두르는 편은 아니긴 했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그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심기를 거슬러 봤자 좋을 게 없다.

메리골드 공작의 얼굴에 비굴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 그럼요. 대공 전하께서 잘만 말씀드려 주신다면야…….”

“난 위험 분자를 싫어해, 공작.”

아벨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작의 말을 잘랐다.

“내가 북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안전이지. 마수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성을 세웠으니 오죽하겠나? 가난한 이, 병든 이, 굶주린 이들을 돌보려면 절대적인 안전이 확보되어야만 해. 그러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평화를 해치는 이들을 제거해야 하지.”

“…….”

“특히나 제 새끼를 품을 줄도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이는 더욱 그래.”

“……전하.”

“이곳이 황성이라는 사실에 뼈저리게 감사하도록. 이곳이 내 땅이었다면, 공작은 지금쯤 마수의 간식거리로 전락했을 거다.”

서늘한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낀 공작이 몸서리쳤다.

“내가 무어라 했는지 이해했나?”

“예, 예. 그럼요. 상식적으로…….”

“그래. 어려운 일이겠지만, 모쪼록 힘내 보게. 내 변덕의 희생양이 되기 싫다면.”

“어렵다니요!”

메리골드 공작이 간절하게 말했다.

“쉽습니다. 예, 딸아이에게 다정하게 구는 게 어찌 어렵겠습니까? 다 걱정하는 마음에, 초조해서 나온 것들인걸요. 그렇지, 소티스?”

공작이 딸의 손을 찾아 쥐려는 순간, 아벨이 그의 손등을 철썩 때렸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쉬울 것 같았으면 딸을 이 불구덩이에 처넣지도 않았겠지.”

“…….”

“뭐 하나? 안 가고.”

공작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모욕감과 분노, 그리고 곤란함으로 엉망진창이 된 시선이 소티스를 한 차례 훑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 시선조차도 오래 두지 못한 채 도망치듯이 폐궁을 빠져나갔다. 소티스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나서셨어요?”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벨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냐니? 부당한 상황에 처한 이를 돕는 게 이상합니까?”

소티스의 물색 눈동자가 아벨을 곧게 보았다.

“전하의 호의가 제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고 하셨잖습니까.”

“…….”

“게다가 지금 나서서 제 아버지를 압박한다면, 추후 더 귀찮은 일에 휘말리실 수도 있고요.”

그녀가 자조적인 미소를 띤 채로 설명했다.

“아버지께서 정보상이셨다는 사실은 유명하지요. 실제로 공작께서는 아직도 타인의 비밀을 쥐고 흔드는 방식으로 우위에 서 계시려고 합니다. 대공 전하께 악감정을 가진다면, 다음 목표는 북부의 비밀을 폭로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

“그게 아니라면, 제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제게 추문이 생기면 아버지께서도 불명예를 피하실 수는 없을 테니, 저희를 지저분한 방식으로 엮지는 않으실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겠죠. 남편이 사라진 저를 어떻게든, 전하의 정부로라도…….”

“그만.”

아벨이 신경질적으로 소티스의 말을 끊었다.

“됐습니다.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메리골드 공작가와 힘겨루기를 한다면 지지는 않을 테지만, 그 계산조차도 하지 않고 팔이 먼저 나간 게 사실이었다.

“한 번쯤은 이러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면서도요?”

“꼭 좋아해야만 돕습니까? 그게 아니어도…….”

동경했으니까. 미안했으니까.

그동안 늘 외면하기만 했으니까.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황후께서 일전에 웰트 대공령에 지원 물자를 보내신 적이 있었습니다.”

“삼 년 전이었어요. 마수들이 대거로 습격한 데다가 전염병까지 퍼졌지요. 면역이 약한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황실의 이름으로 도착하긴 했지만, 북부의 일에 관심이라고는 없는 형님께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건 알았습니다.”

“…….”

“나는 왜 형님이 당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따라가기만 해도 최고의 황제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소티스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전하.”

“안 그래도 당신이 형님의 허락도 없이 황성 밖으로 나섰다고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나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나. 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게 어찌나 우습던지.”

“아하하.”

“그래도 이번에 어느 정도 무마했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해결하십시오. 이걸로 저는 제 마음의 빚을 털어 낼 겁니다.”

“……뭘 할 수나 있을까요?”

“글쎄요.”

아벨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

“네, 아벨 전하.”

“북부의 마수는 끈질깁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움직여, 상대를 기어코 죽여 놔야만 만족합니다. 숨통을 끊지 않은 승리는 진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갑자기 웬 마수 이야기일까. 그녀는 평생 살며 마수라고는 본 적도 없다. 소티스는 눈을 깜빡이며 아벨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 마수를 상대로 내내 피하기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건 마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의 숨통이 끊길 때까지 쫓아올 겁니다. 기어이 발목을 물어서 질질 끌고 가겠지요.”

“…….”

“이따금 맞서 싸워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전하.”

“맞서십시오. 그리고.”

아벨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상대에게 확인시키십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상대의 머리에 새겨 넣으십시오.”

“…….”

“싸움은 그래야 끝납니다. 완전히 죽여 버리든가, 아니면.”

“…….”

“완벽하게 압도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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