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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2)화 (53/121)

제52화. 무너질 운명 (1)

아벨 폰 세턴 멘데즈는 이 상황이, 어떤 거대한 ‘혼돈’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친부였던 선황제부터가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 선황후는 입이 닳도록 그 부분을 불평했다. 황후의 뒷배 덕에 황권을 안정적으로 잡았는데도 정부를 줄기차게 들인 것이 괘씸하다는 게 제 모친의 의견이었다.

그래도 선황후는 에드먼드를 황태자로 만드는 것을 대가로 선황제를 견뎌 주었다. 그 정도면 값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벨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 에드먼드가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납득하고 말았다.

“너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황실의 핏줄이니 어디 가서도 잘 해낼 거잖니, 아벨. 네 형은 달라. 에드에게는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격이 중요해.”

그 당시의 아벨은 그 말의 의미도 모를 만큼 어렸다. 에드먼드의 비밀을 모를 때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먼드와 싸우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렇게까지 황위가 욕심나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숙부를 따라 웰트 대공령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에드먼드가 지었던 표정을 기억한다. 에드먼드는 후련해하고 있었다. 만일 그와 대적하게 되면 자신을 제거해야 하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사실에 안도한 까닭이리라.

그래. 부딪치지 말자.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이다. 그런 그와 부딪쳐 봐야,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더 많을 터였다.

“형님. 뭐가 됐든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부탁했다.

자신이 북부로 떠날 테니, 이 나라를 잘 보살펴 달라고.

사적인 욕심에 따라 함부로 하기에는 여기에 너무 많은 이들의 삶이 달려 있으니, 그 사실을 잊지만 말아 달라고.

에드먼드는 성군까지는 아니었어도 똑똑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황위를 지켜 내기 위해서라도 나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비효율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에드먼드의 곁에는 소티스가 있었다. 에드먼드는 그녀를 무척 싫어했지만, 황가의 치부를 쥐고 있는 메리골드 공작의 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왜 소티스를 미워하는지는 몰라도, 황후로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에드먼드가 권력에 휘둘릴 때마다 좋은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벨의 예상대로 소티스는 제 몫을 썩 잘 해냈다. 에드먼드가 그녀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고, 몸이 약한 소티스가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게 그럭저럭 괜찮게 흘러갔다.

변화가 시작된 건, 피니에 로즈우드가 나타난 이후였다.

평소 소티스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에드먼드에게 핀은 예기치 못한 사랑, 그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그는 피니에가 소티스를 밀어낼 유일한 기회인 것처럼 굴었다.

핀을 정부가 아닌 황비로, 그로도 모자라 황후로 올리려 하는 내내 에드먼드는 멘데즈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을 밀어 두었다. 어쩌면 멘데즈를 돌보는 일이, 소티스처럼 되는 일이라 여겨 외면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즈음의 에드먼드는 한심했다. 이런 꼴이나 보려고 황위를 양보했나 싶을 만큼.

***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께서 피니에 로즈우드 황비 전하를 협박하여 출입 허가 문서를 갈취했다고요.”

회의장에 선 아벨이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저는 이 일로 전 황후를 처벌하는 일에 반대하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에드먼드가 불쾌함이 역력한 음성으로 비꼬았다.

“대공 전하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이유로 폐황후를 두둔할지 실로 궁금해지는군. 말해 보게.”

아벨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무표정하게 말했다.

“멘데즈 황국의 기본 법령에 따르면, 정당한 이유 없이 국내외의 귀족과 그의 아랫사람을 황성에 가둘 수 없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출입 허가증은 으레 귀족들이 개인적인 손님을 오가게 할 때 검문을 대신하는 용도로 사용되거나, 귀족들이 제 신분을 숨기고 나갈 때 사용하지 않습니까.”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이혼한 황후가 왜 황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 황비를 괴롭히기까지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의 허가가 필요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해 의아하던 참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가문의 인장이 찍힌 마차만 타고 얼굴만 비쳐도 충분할 일이었다.

“폐하께서 원칙을 지키셨다면 이런 일이 벌어나지 않았을 테니, 그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시기를 간청드리는 바입니다.”

에드먼드가 낮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벨은 그의 도발에도 여전히 차분했다. 아벨의 검은 눈동자가 에드먼드를 조용히 힐난했다.

“규율은 어떤 상황에서든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폐하.”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소티스를 벌하려면 그녀를 구금한 황제의 입장 표명 및 그에 따른 사과나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에드먼드는 미간을 구겼다. 소티스를 최대한 ‘황후답지 않았던 여자’로 만들어야 하는 지금, 그녀에게 사과하게 되면 그림이 어그러진다.

그래, 이건 넘어가는 게 좋겠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하나쯤은 포기하고, 자신이 아량 넓게 넘어가는 척해도 될 일이다.

게다가 핀의 말을 완전히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쉬운 소리 한번 못해서 번번이 황후궁에 처박혀 몰래 울기만 하던 여자가 협박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소리기는 했다.

“좋다.”

에드먼드가 오만하게 말했다.

“여인들의 사소한 다툼이었을 테니, 내가 끼어들지 않는 게 모양이 좋겠지. 그렇다면 다음.”

에드먼드가 손짓하자 시종장이 문밖으로 나가 한 여인을 들였다. 핀을 위해 새로 고용된 의사였다.

“그대는 황비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 자리에서 똑똑히 말하라.”

의사가 떨리는 눈으로 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며, 며칠 전 핀 전하께서 하혈하며 쓰러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전에도 전하께서는 주기적으로 복통을 호소하셨는데요, 시기적으로는 소티스 님께서 추천하신 기력술사들이 약을 올린 이후였습니다.”

“독약이 아니었어요!”

제 아버지인 로즈우드 후작 옆에 앉아 있던 마리아네스가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그 기력술사들은 제가 소티스 님을 위해 불러 왔던 사람들이었어요. 공녀님께서 피니에 전하를 위해 그분들을 본궁으로 보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따로 불러서 잘 챙겨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고요. 신원은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소티스가 분명히 아기를 해치려 했을 거라며 우기려던 로즈우드 후작의 얼굴도 흙빛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마리아네스가 끼어들게 되면 서녀를 위해 적녀를 내치는 꼴이 된다. 이래서 폐황후와의 우정 같은 건 포기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황비 전하의 몸이 상하셨지요.”

의사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리아네스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기력술사들이 권한 약초는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임산부에게 위험할 것 같은 약은 모두 저희 선에서 걸러 냈거든요.”

“…….”

“그러나, 그 약초들은 본궁에서 식사하실 때마다 후식으로 나오는 차와 배합이 좋지 않았습니다. 몸의 열을 과하게 올렸던 것이지요. 모든 먹을거리에는 득이 되는 배합이 있고, 독이 되는 배합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때문에 피니에 전하께서 아기님을 잃으실 뻔했고요.”

마리아네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티스가 그것을 알 리 없다. 그녀는 황후가 되고도 본궁에서 살지도 못한 채, 황자비 때부터 지냈던 곳을 황후궁으로 바꾸어 생활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평소에 무슨 차를 마시는지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제대로 된 만찬에 참석한 것조차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까!

덫이라기에는 너무 얄팍하고 노골적이었다. 더 억울한 건, 저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 해서 결과가 달라지나? 아니, 의도하지 않았다면 더욱 놀라서 사과하는 게 도리에 맞겠지. 하지만 메리골드 공녀는 그러지 않았다. 여전히 폐궁에서 침묵하고 있다. 그 의중을 누가 장담한단 말이지?”

황제의 곁에 앉아 있던 피니에가 말을 보탰다.

“약을 먹고 나서부터 속이 메스꺼워지는 일이 잦았습니다. 팔다리에 열이 몰려 화끈거릴 때도 있었고요. 그게 본궁의 차와 합쳐져 낙태를 유발하는 줄 알았다면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을 겁니다.”

“소티스 님께서는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마리아네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사람은 모르는 거지.”

에드먼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아네스의 말을 잘랐다.

“입장이 사람을 변하게 하기도 하지, 로즈우드. 의도를 장담할 수 있나?”

“……폐하.”

“그대의 여동생이기도 한 황비의 배 속에는 다음 대 황제가 될 이가 들어 있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겠지. 원한과 복수심에 휘둘릴 만한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래.”

그는 이번 사건을 그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이 일을 부풀려 소티스와 메리골드 공작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제 비밀을 폭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설령 이제 말한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제 어머니가 황후가 된 지 삼십 년이 넘었고, 자신에게는 아이도 생겼다.

해묵은 비밀로 황가에 줄을 한번 댔으면 그만이다. 그마저도 약해 빠진 줄을 댔으니 알아서 끊어져 나간 거지. 에드먼드는 속으로 비죽거리며 의사를 내보냈다.

“이 일로 나는 폐황후와 메리골드 공작을 신임할 수 없게 되었소.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메리골드 공작 가문의 귀족 회의 참석을 금하고자 하는데, 이의 있는 사람이 있나?”

아무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소티스의 이혼 이후 몰락만이 정해진 공작을 편들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제 눈을 피하기만 하자 메리골드 공작은 분이 나 씨근거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티스. 이 모든 건 소티스 때문이다. 한평생 착하게 자라 황후 자리를 잘만 지켜 주나 싶더니, 예고도 없이 이런 짓이나 저지르고 황성 밖으로 나가다니!

귀족 회의가 끝나자마자 공작은 어깨에 힘을 단단히 주고 가장 먼저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쿵쿵거리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를 아벨이 조용히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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