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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1)화 (52/121)

제51화. 폐황후의 기적 (4)

소티스는 핀을 바라보지 않았다.

핀의 복잡한 심경이 시선에 고스란히 담긴 채 제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핀을 마주 보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핀을 원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소티스는 아예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지금 바라보면, 핀을 속절없이 미워하겠지. 혹시 당신도 그 혼돈과 동류인 것은 아니냐며 성급하게 생각해 버릴지도 모른다.

각자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우리가 적이라고 속 편하게 믿고 싶어지겠지. 당신을 미워하는 일로 내 마음을 떠넘겨 버리는 것만큼 쉬운 게 없으니까.

“용서를 빌지 않을 건가?”

에드먼드가 말했다. 그는 마치 소티스가 제 황비에게 질 나쁜 복수라도 하려고 했다고 믿는 사람처럼 혀를 찼다.

“폐하께서 제게 했던 모든 일에 사과하신다면, 저 또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무얼 했지? 소티스, 설마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잘못인가?”

그가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공녀. 그대가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뿐이야.”

“설마 제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복수심을 가지고, 폐하를 사랑한 일을 후회했을까요.”

소티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치 그의 악의 같은 건 너무 하잘것없어서, 하나하나 발끈할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그녀를 깎아내리려 혈안이 되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지만, 예전처럼 심장을 저미는 듯한 아픔은 없었다.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폐하께서 나쁜 분이 아니라는 건 제가 가장 잘 알아요.”

“…….”

“제게 성실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제외하면 좋은 군주셨고요.”

그래서 침묵했다. 그가 자신을 바보로 만들 때도, 매정하게 굴 때도, 남들 앞에서 황후는커녕 정부만도 못한 취급을 할 때조차 조용히 감내했다.

제게 모질다는 점을 제외하면 에드먼드는 좋은 황제였으니까. 적어도 소티스가 그 시야 안에 들어서지만 않는다면,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퍽 이성적인 황제였으니까.

그러나 피니에 로즈우드를 만난 이후로 에드먼드는 변했다. 그 유혹적인 여인을 사랑한다고 믿은 뒤로부터, 그 남자는 자신의 평판이나 이성을 쉽게 내려놓았다. 언제부터인가 소티스를 모욕하고 치워 내는 일만이 그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는 것처럼 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

소티스의 목소리가 슬픔으로 가라앉았다.

“평소의 폐하셨다면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셨겠지요. 제게 이렇게 찾아오실 게 아니라 보고서를 정리하시고, 재판을 여신 다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일을 해결하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유산이 위기에 그쳤을지언정, 황족 시해죄는 중죄니까요.”

그녀가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

“제게 이혼을 제안하실 때와 비슷한 거죠. 의심스러운 정황만 있을 뿐, 마지막 증거가 없는 거잖아요.”

에드먼드가 이렇게까지 과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폐황후가 되어서도 나랏일을 도와, 다시 황비가 될지도 모를 소티스를 최대한 요란하게 쳐 내야만 피니에 로즈우드를 다음 황후로 올리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핀이 하혈하고 쓰러졌다는 사실조차 동정표를 얻을 근거로 사용해서, 잡음을 최대한 줄이려는 속셈이겠지.

그러려면 눈에 보이는 사건들이 필요했다. 소티스가 핀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불명예 속에서 핀에게 직접 권력을 내놓고 사라지는 여자가 되어 줄 테니까.

이기적이고 비겁한 계산이다.

“설령 부족하다 하더라도 만들면 그만이다.”

에드먼드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게 싫다면, 굳이 돌아갈 것 없이 공표하면 그만이겠지. 그대가 복수심을 가지고 핀을 해치려 했다고. 내 명령을 우습게 알고 황성 밖으로 나갔음을. 그리고 그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핀이 정당하게 누려야 할 것을 직접 넘겨주겠다고.”

“전 무단으로 황성 밖으로 나간 게……!”

소티스가 고개를 홱 돌려 핀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분명히 성 밖으로 나설 때 경비병에게 외출 허가서를 건넸다. 그건 핀이 주었던 것으로, 절대로 위조할 수 없는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핀의 눈이 가늘어졌다. 건조한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기 어려웠다.

“아, 무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외출 허가서를 냈으니까. 그리고 그건 핀을 협박해서 빼앗은 것이고. 안 그런가?”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소티스가 입을 살짝 벌린 채 핀을 바라보았다.

아니잖아요. 그녀가 속으로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아니잖아요, 핀. 그런 게 아니잖아요. 당신이 직접 주었잖아요. 저는 당신에게 이 자리를 넘겨줄 테니, 나라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고요.

조용히 사라져 준 것으로는 부족했던 건가요? 그렇게 해서는 제 존재가 지워지지 않던가요?

왜 이렇게 모질게까지.

왜.

그리고, 소티스의 시선을 받던 핀이 느리게 대답했다.

“……예.”

핀이 무감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황비 자리를 편히 지키고 싶다면, 황성 밖으로 나가는 일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폐하께 직접 받은 허가서를 내어 드렸고요.”

소티스가 작게 웃었다.

저 말이 황당한 거짓말이라는 걸 에드먼드는 알까? 하긴, 안다고 하더라도 제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언제든 소티스를 초라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호박색도 검은색이라며 우길 수 있는 남자였다.

새삼 그녀가 한평생 좇았던 것이 허상에 가까웠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게 다 뭐라고…….”

사랑조차 못 받던 황후 하나 쫓아내는 게 대체 뭐라고.

“폐하께서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시는 동안,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어요. 귀족의 횡포며 끝없는 가난, 그리고 기근에 혼돈까지…….”

에드먼드의 뒤에 숨어 있던 핀이 움찔했다.

“더 급한 문제가 저렇게 산처럼 쌓여 있는데, 폐하께서는 황비를 황후로 만드는 일에만 주력하고 계셨군요.”

“황비는 다음 대 황제를 낳을 거요. 아기를 위한 것이 하찮다는 말인가?”

“급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황후가 없으니까요.”

그건 급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도 아니다. 그저 다 가진 사람들의 명분 싸움에 불과했다.

그 유치하고 치사한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시들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그런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그들을 돌보는 일이 황실의 명예에 도움이 될 때만 직접 움직이겠지.

소티스는 허탈해졌다. 자신이 보았던 사람들의 처절한 삶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에드먼드의 모습에, 이 황성의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에게 백성이란 뭘까? 체스판 위에서 쫓겨난 수백 개의 폰보다는 가치가 있을까?

“얼마나 후회하시려고 그러세요, 폐하. 혼돈이 나라를 통째로 삼키고 나면 후회하시겠어요?”

돌아오자마자 할 말이 정말 많았다. 도움을 구할 것도 많았고, 자신이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리고 싶었다.

그녀가 더는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일 필요가 없었다. 그 사실에 에드먼드도 기뻐할 줄 알았다.

핀이 황후가 되든, 황비가 되든, 그녀가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상관없었다. 한쪽이 행복해지기 위해 상대가 꼭 불행해질 필요가 없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랬는데, 에드먼드는 여전히 어떻게든 소티스를 내칠 생각뿐이다. 왜? 그녀를 보면 죄책감을 느껴서? 소티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대의 처우를 결정할 회의는 며칠 뒤에 열릴 테니, 그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 것을 명령한다. 황명을 어길 시 더욱 엄중한 벌로 다스릴 것이며…….”

그의 새카맣고 싸늘한 눈동자가 소티스에게 내리꽂혔다.

“예외가 있다면 단 하나겠군. 마음이 바뀌어, 핀에게 용서를 빌고 싶어지거든 문 앞의 경비병에게 말하도록. 언제든지 내보내 줄 테니.”

“…….”

소티스는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손마디가 새하얗게 도드라졌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멈추었다. 그녀를 팽팽하게 채웠던 나쁜 감정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은 파도와 같다. 느린 듯하나 반드시 흘러간다. 밀려 들어왔다면, 이내 빠져나갈 것이다. 간직할 필요 없는 마음은, 그대로 그 흐름에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보내 주자. 내 몫이 아닌 것은, 그대로 흘려보내 주자.

“폐하께서는 여전히 저를 힘들게 하시네요.”

에드먼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여태껏 진심으로 화 한번 내지 않는 그녀가 내심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화내지 않는다면 차라리 울기라도 할 줄 알았다. 진흙탕 싸움에 발이라도 담글 줄 알았다. 그렇게 떨어뜨려야 끈질긴 메리골드 공작이 제 딸의 복위를 포기할 테니, 소티스가 돌아오거든 최대한 그녀를 흔들어서 엉망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그런데 소티스는 보란 듯이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황성 밖에서 무엇을 보고 겪은 것인지 더욱 단단해져서 왔다.

그녀는 기어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그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가 저를 힘들게 한다며 울던 그 여인보다도 강해졌다. 거북할 정도로.

“그래도 여전히 저는 폐하를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설령 저도 모르게 그런 감정이 든다고 하더라도, 그러지 않으려 노력할 거예요. 왜인지 아세요?”

“…….”

소티스가 고개를 들어, 에드먼드가 아닌 핀을 바라보았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건 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떤 마음도 내어 줄 것이 없어요. 낭비일 테니까.”

“…….”

“부디 마음껏 하세요.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리고 하고 싶은 것들을.”

소티스가 핀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밑바닥까지, 저는 같이 가지 않을 테니까요.”

핀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려, 제 배 위에 얹은 손을 응시했다.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무엇도 의미가 없을 것을 알았으니까.

“가요, 폐하. 배가 뭉쳐서 오래 서 있기 힘들어요.”

에드먼드는 그 말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핀의 어깨를 감싸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폐궁에 쥐새끼 하나 드나들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라. 네 명의 병사가 문을 지키고, 황명을 거역하는 이가 있다면 무력을 행사해도 좋다.”

“예, 폐하.”

“아. 그리고 저 창문에는…….”

에드먼드가 침실에 난 커다란 창문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빗장을 걸도록.”

쿵, 쿵, 쿵.

못이 판자를 뚫고 들어와 창문을 막아 버리는 소리가 울릴 때까지, 소티스는 그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 소리가, 에드먼드를 볼 때면 항상 느꼈던 그 불안한 심장 소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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