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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0)화 (51/121)

제50화. 폐황후의 기적 (3)

소티스는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결백했다. 한평생 그렇게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누굴 해치려고 한 적도 없었고, 진심으로 미워서 어쩔 줄 몰랐던 적도 없었다. 자신의 진심 같은 건 한 번도 알아주지 않던 에드먼드도, 투자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를 일삼던 메리골드 공작도, 저를 툭하면 조롱했던 에드먼드의 옛 정부들조차도.

그런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야 수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소티스가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상황이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꾸물거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배령이 내려진 이유를 듣고 싶어요.”

그녀가 침착하게 나오자 병사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밧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협조적인 이를 함부로 묶어 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명예 없는 자리였다지만, 상대는 전 황후였다.

“황족 시해죄입니다. 피니에 로즈우드 전하와 아기님을 해치려 하신 정황이 발각되어, 어제부로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피니에 로즈우드…….”

소티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또 무슨 함정을 파 두었을까, 전남편은. 그는 눈 밖으로 아예 걸어 나간 저를 여전히 미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폐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마법사님은…….”

병사들은 검을 집어넣으며 난색을 표했다.

본래는 일행도 가담자일 수 있으니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외국의 마법사를 잘못 잡아들였다가는 국제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도 아니고, 타국에게 배타적이기로 이름이 높은 그 베아툼이 아닌가.

상대하기에 부담스러운 이들만 있다. 병사들은 흙빛이 된 얼굴로 저들끼리 시선만 힐끔힐끔 주고받았다.

소티스가 침착한 음성으로 그들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그저 두셔도 됩니다. 어차피 베아툼에서도 곧 연락이 올 거고, 황성에서 대기하실 예정이시거든요. 이 길로 곧장 성으로 가실 테니, 무슨 일이 있거든 황실 근위대에게 맡기시면 되겠어요.”

“그게 거짓말이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폐하께 고하십시오.”

소티스의 엷은 미소가 차갑게 빛났다.

“그럼 제게 죄목 하나를 더 얹을 수 있으니,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 뭐…… 그럼.”

병사 중 한 명이 아직 마차 안에 있는 애나를 힐끔 보자, 소티스가 표정을 더욱 굳히며 말했다.

“모르는 녀석이에요. 성 밖에서 마주쳤는데, 마차도 못 보고 뛰어들길래 성문 안쪽에서 내려 줄 생각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무어라 할까 봐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얘. 부탁한 대로 황성까지 데려다줬잖니? 이제 네 길을 가렴. 앞으로 마차 앞에 달려들지 말고.”

애나는 소티스의 차디찬 목소리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일부러 이러는 거다. 일행으로 엮이면 괜히 불이익을 당할까 봐. 저라도 보호하려고.

애나는 레먼의 뒤로 살짝 숨어 어깨를 움츠리더니, 최대한 힘없고 불쌍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 해요. 제가, 배운 것 없이 무식해서 공작 가문 아가씨도 못 알아뵙고 겁도 없이……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공녀님. 죄송해요…….”

소티스는 그대로 병사들에게 이끌려 레먼과 애나를 지나쳤다.

레먼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자, 소티스가 고개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잠깐 헤어지는 것뿐이에요, 레먼.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혼돈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하신 다음 베아툼에 도움을 요청해 주세요. 꼭이요.”

“저는…….”

레먼의 호박색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꼭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멀어지는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없었다. 해낼 수 있을까. 그녀를 보호하고, 그녀에게 필요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덫으로 가득한 이 구덩이를 잘 건너올 수 있을까.

혹시라도 소티스가 저번처럼…….

“사라지지 않을게요!”

그녀가 레먼에게 외쳤다.

“저를…….”

레먼은 어느새 말을 잇지 못하고 멀어진 소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찰나에 불과한 봄처럼 무정히도 멀어지는 그 모습에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남기려던 뜻이 무엇이었을까.

혹시, 구해 달라는 말이었을까?

레먼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새하얗게 질려 있던 손바닥에 가까스로 혈색이 돌며, 초승달 같은 손톱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중한 것을 잃기만 하는 건 지긋지긋하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는 해답은 소중한 것을 다시는 만들지 않는 게 아니다.

이제는 안다. 알게 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낼 것이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애나.”

아이가 단호한 표정으로 레먼을 바라보았다.

“네, 마법사님.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세요.”

***

당신은 도저히 변하지 않는구나.

몇 달 만에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를 본 소티스가 새삼스럽게 느낀 감상이었다.

그는 변하는 법이 없다. 좋은 의미로도, 그리고 나쁜 의미로도.

에드먼드는 소티스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정 한 조각 없는 것은 물론이고, 싸늘한 경멸마저도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소티스는 이유를 알면서도 물었다.

“이번에는 저를 어떤 이유로 미워하실 건가요?”

에드먼드가 대답 대신 비아냥댔다.

“마치 내가 그간 어떤 이유도 없이 그대를 미워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이유를 굳이 나서서 만드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흠과 실수를 누구보다도 고대하셨던 분이라는 건 압니다. 이제는 어떤 이유든 만들기 위해 약간의 수고 정도는 감내하실 것 같기는 하네요.”

그가 발끈해서 대꾸했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건가? 메리골드 공녀.”

소티스는 대답 대신 에드먼드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화를 낼 수는 있어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그게 그를 더욱 초라하고 치졸해 보이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이번에는 명백한 그대의 잘못이다.”

에드먼드가 그녀를 비웃었다.

“증거도, 증인도 명확하지. 미리 말해 두지만, 나는 그대를 절대로 황비 자리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황실 업무를 돕겠다고? 사양하지. 세상을 위한다는 핑계 뒤에 숨어 무슨 계략을 꾸밀지 누가 알고?”

“…….”

“이 사건 덕에 지긋지긋한 그대의 부친도 쫓아낼 수 있겠군. 너무 멀리도 돌아왔어.”

꼿꼿하게 앉은 소티스가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얹으며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수배령이 내려진 지 이틀 만에 제 발로 들어온 걸 보면 눈치가 없진 않은 모양인데…….”

“폐하.”

소티스가 에드먼드의 말을 느릿하게 잘랐다.

“황성에도 없었던 제가 피니에 전하를 무슨 수로 해쳤다는 말씀이신가요?”

“약!”

에드먼드가 적개심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핀에게 약을 먹였잖아, 소티스!”

“……약.”

“그래. 그대가 악랄한 마음으로 준비한 그 약 때문에 핀이 하혈하며 쓰러졌다. 유산의 위기가 스쳐 지나간 것만 해도 당장 그대를 묶어 매질해도 모자라. 아이가 다치지 않았다는 말로 핀이 말려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고 있는 것이니.”

그가 사납게 속삭였다.

“나를 도발하지 않는 게 좋겠군, 폐황후. 그대는 그래도 그렇게까지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잖아?”

소티스가 허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에드먼드가 삐딱하게 웃었다.

“핀의 자비에 감사하도록 해. 치졸한 원한에 사로잡힌 그대와는 다르니까.”

소티스는 에드먼드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허탈해졌다.

그녀가 황성을 떠나기 전에 핀을 위해 준비한 약은, 당연하게도 낙태를 유발하는 약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내내 손발이 찼던 피니에의 몸 상태가 아이를 지키기에 적절치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쓰여서, 그래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영양을 잘 흡수할 수 있도록 기력술사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지 않았던가.

“제게 잘해 주지 마세요.”

그 말이, 제게 칼을 겨눈다는 뜻이었을까.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시잖아요? 소티스 님. 저는 제게 다정하게 대해 주신다고, 그 은혜를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해 갚는 여자가 아니에요. 저는 곱게 자란 여자도 아니고, 당신처럼 마음이 곱지도 않지요. 제게 잘해 주셔도 아무 소용 없어요.”

당신은 결국…….

기적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말하는 ‘놀라운 일’이 아니라, ‘서로 엇비슷하게 맞서는 적수’ 말이다.

소티스는 이 현실이 핀과 저를 더는 양립할 수 없게만 만든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그녀를 구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황제 폐하.”

문 바깥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피니에 로즈우드 전하께서 잠시 이곳에 들어오시기를 청했습니다.”

에드먼드가 놀라 물었다.

“핀이 이곳에 왔다고? 괜찮다더냐?”

“예. 어떻게 말씀드릴까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어떤 대답을 찾기라도 하는 듯이.

“핀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고려하겠다.”

“진심으로 사죄한다고요…….”

소티스의 얼굴에 허무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여전히 제가 에드먼드와 핀을 원망한다고 믿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복수심 때문에 앙갚음했다고 한다면, 그 알량한 죄책감을 덜 수 있기 때문일까.

“폐하.”

당신이 한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더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적어도 한 번쯤 곱게라도 봐 주었다면.

아니, 차라리 동정이라도 했다면. 그래서 내 이야기를 단 한 번만이라도 들어 주었다면 우리는 좀 달라졌을까요.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지나온 길을 후회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저는 폐하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정말 부끄러워요.”

소티스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삼켰다.

에드먼드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는 수많은 감정이 떠오른 얼굴로 소티스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뗐다.

“……핀을 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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