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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49)화 (50/121)

제49화. 폐황후의 기적 (2)

이제는 정말 황성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에드먼드를 다시 만날 생각만으로도 가슴께가 답답해지는 기분이었지만, 현실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고서도 거의 다 완성되어 가니, 이제 남은 건 부지런히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소티스가 서류를 잘 말아서 조심스레 봉납하며 말했다. 촛농 녹는 냄새가 불쾌했는지 그녀는 연신 코를 찡긋거렸다.

레먼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그녀와 부지런히 나다닌 덕에, 혼돈에 대한 정보를 생각보다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소티스의 말대로 이만하면 단기간 내에 제법 많이 알아낸 셈이었다.

예상대로 혼돈은 베아툼에서 쫓겨나 멘데즈의 남부로 올라왔고, 그대로 길을 따라 수도 근처까지 서서히 올라왔다. 마녀의 목소리를 들었던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혼돈은 본래 베아툼과 멘데즈 사이의 바다 깊은 곳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 어두운 곳에 가라앉은 비탄을 먹고 자라난 혼돈은, 이 세상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해 먹이를 찾아 대륙을 어슬렁거린다고.

나이 지긋한 노인이 소티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들었어요. 혼돈은 피를 통해 강해진대요. 혼돈이 불행을 낳고, 그 불행이 자라서 다시 혼돈이 된다고요.”

그 이야기를 들은 레먼이 설명했다.

“마법사들의 혈통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힘은 후대에게 더 나은 것을 물려주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정제되어 유전될수록 그 힘은 더더욱 강력해지고 순수해집니다. 마법사들이 동류끼리의 결혼을 권장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레먼의 얼굴은 너무나도 절망적으로 일그러져 있어서, 그를 살피던 소티스는 제 마음마저 덩달아 어둡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소티스 님.”

물론 그 어둠은 영원하지 않았다.

레먼 페리윙클은 혼돈과의 대립을 통해 두려움만을 얻어 절망한 이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했던 이들이 제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명예를, 그리하여 힘겹게 거머쥔 어떤 평화를 기억했다.

그에게는 물러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고, 혼돈을 몰아내야 한다는 소명 또한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소티스에게 그가 다정히 말했다.

“……네?”

“저를 걱정하실 때마다 짓던 표정이셔서요.”

그녀가 놀라서 물었다.

“그걸 아신다고요?”

소티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이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니! 평생 마주친 황성의 사람들도 그걸 알지 못해 늘 제게 알기 어렵다며 푸념하곤 했는데.

“그럼요.”

“제가 알기 쉬우시던가요?”

레먼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소티스 님께 관심이 많은 거죠. 그러니 더 자주 살피는 거고…….”

“…….”

“……아, 죄송합니다.”

소티스가 무어라 하지 않았는데도 레먼이 겸연쩍은 듯 먼저 사과했다.

그는 최근 자신이 너무 느슨해진 나머지 실수가 잦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꾸만 노골적으로 튀어나오면, 소티스로서는 저를 불편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티스에게 사랑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고난의 이유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제 사랑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누구도 미래를 내다볼 수 없고, 사랑이 행복만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닐진대 어떻게 감히 장담하겠는가.

“저는 괜찮아요.”

소티스가 레먼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에는 레먼 페리윙클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그의 예상대로 소티스는 사랑이 싫었다. 정확히는 그 알량한 감정을 위해 한평생 감내해야 했던 모든 것이 힘겨웠다.

에드먼드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던 자유로움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죽는 날까지 누굴 마음에 들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삶에 레먼이 걸어 들어왔다. 자신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배려하고, 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이란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신기하고 얄밉다. 그런 그와 겨우 한 계절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소티스는 어느새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엔 다를지도 몰라.

그가 주는 사랑은 자유일지도 몰라.

그의 존재가 익숙해져서, 달가워져서, 그래서 조금씩 무언가 기대하고 싶어졌다고 하면…….

“고마워요, 레먼.”

그건, 그에게 너무 잔인한 일일까?

“제게 잘해 주셔서요. 저를 잘 알아주시고, 제 입장을 누구보다 생각해 주시는 것도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면 레먼은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당신의 미소만큼 제게 기쁜 건 없으니까요.”

소티스는 그 말에 무심코 그의 손을 끌어다 잡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계속 사랑해 달라고, 변치 않는 마음으로 제 곁에 머물러 달라고 하고 싶었다. 체념한 제 마음을 흔들고 이끌어 줄 수 있겠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속는 척이라도 하며 당신을 따라가 그 손을 잡겠다고. 무심코 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을 통째로 망가뜨릴 것이 나타났고, 그걸 외면할 수 없게 됐으니까.

“사람들이 소티스 님을 기적이라고 불러요.”

소티스가 침묵하는 이유가 불편해서라고 오해한 레먼이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소티스 님께서 애나를 구한 것으로도 모자라 치유 마법으로 사람들을 돌보시고, 장례식에도 신경을 쓰신다니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겸손하게 웃었다.

“과장이 섞였어요. 애나와 형제들이 소문을 내고 다녔다더라고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도요.”

누구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사는 것은 아닐 텐데,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한다.

그게 소티스답다는 것이다. 비록 돌아갈지언정 옳은 길로 가는 것. 생각해 보면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규율의 마법사에 걸맞은 존재기도 했다.

“황성에 가서 보고를 마친 뒤, 남쪽으로 내려가실 계획인 거죠?”

소티스가 단호하게 긍정했다.

“맞아요.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내려가야 해요. 혼돈의 움직임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더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요. 베아툼에 마탑이 있는 것처럼, 악령술사들에게도 근거지가 있을지도 몰라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추방 마법이 완전히 실패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죽이거나 무력화하지는 못했지만, 혼돈은 분명 상당히 약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마녀에게 힘을 실어 주거나, 다시 소환한 이가 반드시 존재할 거고요. 절대 혼자서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남쪽에서 움직인다면, 로즈우드 후작가의 도움을 조금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마리아네스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어요.”

소티스가 사뭇 의욕적인 태도로 이어 말했다.

“황성에서 할 일도 중요해요. 특히 지속적으로 빈민 구제 사업을 시행해야 해요. 국가 주도 사업으로 이어 갈 수 있게끔 협상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어렵다면 적어도 렉투스 상단에 진 빚이라도 갚아야 할 테니까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빚을 갚는 것은 물론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여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보석 몇 개만 가지고 무작정 떠날 일은 아니었다.

“정말 바쁘고 힘든 길이겠지만…….”

소티스가 머뭇거리다가 레먼에게 말했다.

“저와 함께해 주시겠어요? 페리윙클 마탑을 예상보다 더 오래 비우시게 된 점은 무척 죄송하지만요.”

두 사람은 어느새 같은 목표 앞에 서 있었다. 소티스는 자신의 고국을 위해, 그리고 긍지를 위해 혼돈을 막고자 했다. 레먼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모조리 앗아 간 혼돈에게 복수하고 진정한 평화를 손에 넣고자 한다.

레먼에게는 그녀를 돕고 싶은, 도울 수밖에 없는 숱한 이유에 더한 이유가 하나 생기기까지 한 셈이었다.

마법사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대로 소티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따스한 손등에 입맞춤을 남겼다.

마치 경배하듯 무거운 입맞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소티스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진심에 응답했다.

“믿어요. 레먼 페리윙클.”

***

황성으로 돌아가는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눈치 빠른 애나가 상단 측에 새 옷과 마차를 부탁해 두었던 덕에, 수도까지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갈 수 있었다.

“상단주님께서 소티스 공녀님을 위해서라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겠다더니, 정말이었네요. 드레스를 급하게 구해야 했던 건 아쉬워요. 허리가 남는걸요.”

애나는 소티스의 긴 머리를 연신 빗겨 주며 조잘거렸다. 소티스는 황후궁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시녀보다도 두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새 하녀에게 가만히 웃어 주었다.

“아까 마을을 떠나는데 사람들이 인사를 나왔더구나. 네가 내 이야기를 좋게 해 준 덕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따뜻한 배웅을 받은 것 같아. 고마워.”

애나가 조그만 손으로 소티스의 머리를 열심히 땋아 주며 말했다.

“무슨 소리세요? 다 소티스 님께서 따스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신 덕이죠. 저는 사실만을 전했을 뿐이에요. 안 그래요, 마법사님?”

건너편에 앉아 책을 읽던 레먼이 엷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조금 있으면 성문을 넘어서겠어요, 소티스 님! 공녀님께서 마법사가 되셨다는 소식에 폐하께서 과연 뭐라고 하실지…….”

그때, 별안간 마차가 멈추더니 누군가 창문을 억세게 쿵쿵 두드렸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창문 좀 열어 주십쇼.”

깜짝 놀란 소티스와 애나가 서로 바짝 붙자, 레먼이 굳은 표정으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렉투스 상단 소속 마차입니다.”

병사가 곤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하네요. 어제부터 시행된 황제 폐하의 긴급 명령 때문입니다. 후작이든 공작이든 상관없이 모두 검문 대상이십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죠.”

나갈 때는 그런 말이 전혀 없었는데, 긴급 명령이라니. 그새 황성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소티스는 제 양손을 꼭 잡은 채 불안한 시선으로 레먼을 응시했다.

“여기 계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레먼이 아예 마차 밖으로 나갔다.

“협조하겠습니다. 저는 베아툼의 마법사이자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님의 손님입니다. 혹시 검문의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수배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이봐! 여기로 와!”

창문을 두드린 사내가 외치자 십여 명의 병사들이 마차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마차 전체를 둘러싸는 것만 같아서, 그녀의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안에 계신 분이 누굽니까?”

레먼이 대답했다.

“전 황후, 소티스 메리골드 공녀십니다.”

짧은 침묵 후에 경비병이 외쳤다.

“수배자를 찾았다!”

스릉. 사방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소티스는 깜짝 놀라 애나를 제게서 떨어뜨려 건너편에 앉혔다.

“수배자를 순순히 넘겨주신다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와 주시지요.”

수배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소티스 메리골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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