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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48)화 (49/121)

제48화. 폐황후의 기적 (1)

소티스는 정말로 배우는 게 빨랐다.

평생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별로 없어 내심 걱정했던 레먼은 자신의 첫 제자가 소티스라는 사실에 몇 번이나 안심했다. 의식대로 마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지 약 사흘이 지나자, 소티스는 자신의 마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력을 이해했다고 해서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 불, 바람 같은 실질적인 속성이 아닌 추상적인 속성이 발현된 소티스에게는 이 과정이 유독 어려웠다.

그러나 소티스는 기어이 해냈다. 그녀의 능력인 ‘인도하는 힘’을 치유 마법으로 발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소티스 님께서는 실전에 강하시네요…….”

애나는 꽃 몇 송이를 든 채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 장미는 아이가 시장에 나갔다가 소티스를 위해 사 온 꽃이었다. 시일이 지나 누렇게 변하며 시들어 가던 것이, 소티스의 마법에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찾아 싱그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완전히 되돌린 건 아냐. 치유와 소생은 다른 거니까. 아마 이 장미는 이전보다 더 빨리 시들겠지. 치유력이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단다.”

소티스가 겸손하게 말하자 아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치유든 소생이든, 둘 다 대단한 거예요. 이대로 황성으로 돌아가면 난리가 나겠죠? 황제 폐하께서 이혼하신 걸 후회하시겠어요!”

아이의 말에 소티스가 쓰게 웃었다.

황제의 허락도 제대로 받지 않고 성을 나와서는 마법사가 되어 돌아간다. 게다가 황국 전체에 영향을 줄 법한, 골치 아픈 소식마저 함께라니.

에드먼드는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소티스가 멘데즈 최초의 마법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세상이 들썩거릴 텐데, 그 중요한 흐름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예우를 다하는 법을 배우실 기회는 되겠지요.”

레먼이 뼈 있는 소리를 하며 웃었다.

“어쨌든, 치유 마법은 규율만큼이나 유용하면서도 까다로운 마법입니다. 다행히도 소티스 님께서는 익히는 것이 빠르시고, 저도 잠시나마 치유 마법을 배운 적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쥐고, 그대로 날을 제 반대편 손등에 가져다 댔다.

“실전으로 연습하는 게 가장 효과적…….”

“자, 자, 잠시만요!”

그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레먼의 손을 잡았다.

“애나!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니?”

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를 힐끔 보더니, 곧 유순하게 대답했다.

“네. 오늘 렉투스 상단 사람들이 약을 가져다주시는 날이랬어요. 겸사겸사 물건 옮기는 일도 돕고 올게요.”

애나는 요즘 푹 빠진 ‘하녀 연습 놀이’에서 늘 하던 대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 보았다. 물론 집을 나설 때 즈음에는 그 또래 아이답게 뛰고 있었다.

아이가 나가는 걸 확인한 소티스가 레먼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레먼!”

“…….”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아는 레먼은 시선을 슬쩍 피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보기에 썩 좋은 풍경은 아니었죠…….”

“그게 아니죠!”

소티스가 깐깐하게 말했다.

“제가 나아지기 위해 레먼을 수단으로 쓰고 싶지 않은 거예요. 하물며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는 더욱요!”

그래도 치유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작게라도 부상이 필요하다. 실전 연습을 하는 데 흔히 쓰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라도 반박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소티스의 눈이 단박에 뾰족해졌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해요, 레먼. 이건 제 일이잖아요?”

그녀가 그의 손에 있던 칼을 홱 빼앗아 갔다. 그녀가 날을 쥔 까닭에 레먼은 손에 힘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소티스 님!”

“…….”

레먼이 안절부절못하며 소티스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죄송해요. 제가 경솔했어요. 다시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네? 이것 좀 놓아주세요.”

“정말이죠?”

그가 간절하게 대답했다.

“맹세하겠습니다.”

이내 소티스의 얼굴에서 그늘이 완전히 사라졌다. 맑은 미소는 방금 되살아난 장미보다 더 새하얗게 빛났다.

“레먼, 치유 마법에 실패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나요?”

“부상이 깊은 경우에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증을 치료하는 데는 딱히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오히려 마력 고갈을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마법사의 생명을 소모할 수도 있거든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그럼 밖으로 나가요.”

“……예?”

“굳이 상처를 만들어 낼 게 아니라, 이미 다친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요? 발품을 좀 팔아야겠지만, 뭐 어때요. 증상이 심하지 않은 사람 위주로 도움을 청해 보면 좋겠어요.”

레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멘데즈에는 마법사라는 개념이 생소하니, 인식이 썩 좋지 않을지도 몰라요. 다친 사람들이 저희를 믿어 주실지…….”

그때, 문가에 다닥다닥 모여 있던 애나의 형제들이 말했다.

“도와드릴게요.”

“저희 친한 사람 많아요!”

“맞아. 그리고 사람들도 좋아할걸요? 어차피 이 마을에는요, 의사도 약초꾼도 없어요. 가만히 앉아서 아픈 것보다 황후님을 도와드리는 게 훨씬 나아요.”

“저희 막내도 도와주셨잖아요? 벌써 소문이 자자해요!”

레먼과 소티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쩐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릴 듯했다.

***

소티스는 그야말로 하루를 열흘처럼 살았다.

그녀는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마법 연습을 하고, 그 감각을 잊기 전에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친 사람들을 돌보았다. 해 질 녘에는 무덤가나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을 찾아가 혼돈에 대한 정보를 모았으며, 밤이 되면 황성에 가져갈 보고서를 만들었다.

레먼은 고국의 마법사들에게 멘데즈의 상황을 알렸다. 혼돈과 규율이 이곳에 나타났으며, 새 마법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서신을 보내는 내내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소티스를 좋아했다. 아낌없이 베푸는 순수한 친절은 물론이고 그녀가 가져오는 반가운 소식, 미래를 위한 지원과 그 따뜻한 마법에 아낌없이 환호했다.

소티스가 마법으로 간단한 외상 정도를 치료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존경과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폐황후가 기적을 일으키고 있어.”

다만 그런 상황 속에서, 소티스는 또다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는 반짝이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레먼은 그 모습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말리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피곤하다는 푸념 한번 하지 않는 소티스가 너무나도 생기 있어 보여서. 제가 기적이라고 불린다면서, 살면서 그런 말을 들을 날이 올 거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다면서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어떻게 말릴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라는데.

“…….”

장작을 정리하고 들어오던 레먼은 조그만 책상 앞에 엎드린 채 잠든 소티스를 보고 살짝 웃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움직였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저녁으로 만든 채소볶음을 집집마다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대신하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꼭 눈도장을 찍어야겠다며 나서는 모습마저도 밝아 보여서, 황성에서는 그런 표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또 약해지고 말았다. 생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면, 낮게 땋아 내린 보랏빛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을 따라 느리게 흔들거렸다.

그 모습을 조금만 더 보고 싶어서,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래서 레먼은 언제나 그녀에게 물러지곤 했다.

“소티스 님.”

그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흔들며 속삭였다. 깊이 잠든 모양인지, 소티스는 나지막이 앓는 소리만 낼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레먼은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이렇게 책상 앞에서 엎드려 자는 날이면, 이튿날 꼬박 피곤해했던 것이 떠올라서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아주 가느다란 유리 세공품을 옮기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품에 기댄 그녀의 무게감이 한없이 가볍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저는요.”

그녀를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려는데, 잠에 취한 소티스가 그의 품을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레먼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녀에게 얌전히 붙잡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티스의 희미한 미소가 드러나자, 그는 꼭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서 요즘이 가장 행복해요…….”

희미하게 이어지는 목소리 뒤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이어졌다. 레먼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소티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허공을 어색하게 배회하던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매일 고된 일의 연속일 텐데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당신 덕분이에요.”

소티스가 웅얼거리듯이 말했을 때, 레먼은 울듯이 웃으며 그녀에게 고개를 가까이 숙였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듯,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가장 약하면서도 강한 것을 가슴에 품듯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소티스 님.”

레먼의 속삭임이 바람처럼 새어 나왔다.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이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지 당신은 몰라요. 레먼은 그렇게 속삭이며 이마를 맞댔다.

소중한 것을 모두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존재를 다시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그 마탑에서, 놓쳐 버린 것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해도 그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삶에 소티스 메리골드가 걸어 들어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오고 말 행복처럼.

레먼은 그의 신에게,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마음 깊이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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