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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47)화 (48/121)

제47화. 인도하는 빛 (4)

소티스는 마법이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운 학문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특수한 경우라 유독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이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거든요. 마력 운용이나 마법에 관련된, ‘여섯 번째 감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터득하는 거죠. 우리가 말하는 법이나 걷는 법을 새삼스럽게 배우지 않았던 것처럼요.”

소티스는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치 못한 듯 눈썹을 찡그린 채였다.

조급하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초조해졌다. 해야 할 일이 그녀의 뒤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쫓아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서 쓸 만한 마법사가 되어야 하는데.

혼돈에 대한 정보도 더 모아야 하고, 사람들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레먼이 베아툼 왕국 쪽으로 서신을 보내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온다면, 그때는 국가 차원에서 베아툼과 협상을 맺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소티스는 작은 마법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해낸다던 마력 불빛을 만들어 내는 것은 고사하고, 제 마력의 흐름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몸을 직접 쓰는 게 아니라면 뭘 배워도 적당히 괜찮게 했었는데. 그녀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만 더 알려 주세요. 외출하기 전에 연습해 보고 싶어요.”

레먼은 의욕적인 소티스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곁에 앉아, 요청할 때면 언제든 이마를 맞대고 자신이 아는 것을 전해 주었다.

“심장에서 뻗어져 나오는 힘을 손끝으로 데려오는 겁니다. 네, 그렇게요. 지금 무척 좋았어요. 그 상태에서 그걸 이 현실로 데려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제일 어려워요…….”

“차분하게 해 보세요. 힘은 충분히 모였습니다. 아뇨, 소티스 님. 그게 아니에요. 마력이 오히려 흔들리고 있어요!”

레먼이 그녀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멈추세요. 그렇게 하면 오히려 해를 입게 됩니다.”

소티스가 찬물에 빠진 것처럼 퍼뜩 놀라며 눈을 떴다.

“감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여섯 번째 감각을 나머지 오감의 영역으로 데려오고, 소티스 님의 영혼 안에만 존재하는 힘을 세상에 녹여내야 해요.”

그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망설이거나 흔들리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습니다. 소티스 님이 자신을 믿어 주지 않으면, 그 마력은 기회가 아니라 함정이 됩니다.”

소티스가 힘없이 대답했다.

“죄송해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 마법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움직일지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럼…….”

레먼이 다시 눈짓하자 소티스는 얼른 눈을 감았다.

이내 두 사람의 이마가 가볍게 맞닿고, 체온이 섞이며 소티스의 뇌리로 레먼이 전해 주는 장면이 떠올랐다.

레먼 페리윙클이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남자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채였는데, 긴 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가린 통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던 소티스는 곧 이상한 것을 느꼈다.

“…….”

레먼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어둠이 그를 조금씩, 조금씩 타고 올라오며 갉아먹고 있었다. 검게 물든 그의 몸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 돼.

소티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게 현실이 아니며, 그저 레먼이 제게 보여 주는 환상이라는 것은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위기감만이 자신을 지배하는 듯했다.

레먼이 사라지도록 그저 둘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소티스는 몰랐지만, 이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마법사들에게 일종의 위기 상황을 준 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 확인하여 적성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마력 운용도 서투른 소티스에게는 이른 감이 다소 있었으나, 그녀는 생각보다 실전에 강했으니까. 그래서 레먼은 소티스를 믿기로 했다.

애나를 구한 것도 소티스의 힘이었지 않은가. 그녀의 마법 때문이었든, 간절함 덕분이었든, 어쨌든 그것이 소티스에게서 비롯된 능력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신은?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도 좋았다. 불을 피울 수도 있고, 공간을 일그러뜨릴 수도 있다. 소리를 치거나, 얼음을 날릴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믿음만이 섭리이며 법칙이니, 모든 것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림자를 얼리려 할까? 반대로 태울까? 아니면 레먼이 첫 시험 때 그랬던 것처럼, 빛을 불러내어 길을 만들고 어둠을 몰아낼까?

무의식이 만들어 낸 공간. 그 건너편에 소티스 메리골드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연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느슨하게 땋아 늘어뜨린 여인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레먼을 가만히 응시했다.

소티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해냈다.

그곳에는 불꽃도, 빛으로 만든 구체나 물방울, 바람 줄기 같은 건 없었다. 무언가 생기거나 사라지거나, 흔들리거나 일그러지지 않았다. 소티스는 어떤 변화도 빚어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몸이 옅은 햇빛을 둘러싼 것처럼 반짝였다. 제 이름처럼, 메리골드 꽃잎 같은 색이 마른 몸을 겹겹이 둘러쌌다.

그 빛은 단순히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만 했다. 어떤 목적이나 형태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단순히 물에 탄 잉크처럼 흩어지기만 했다.

태양이 뜨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자연히 밝아지듯이.

그러자 레먼의 몸을 거의 절반이나 삼켰던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뻗어져 나온 소티스의 힘이 어떤, 무형의 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녀의 힘은 그릇된 것의 앞을 막고, 다른 길을 제시해 그것이 옳은 방향으로 흐르도록 했다.

인도하는 힘, 그리고 고쳐 내는 힘.

강력하지만 추상적인 힘이었다. 이제 겨우 마력의 존재를 실감하고 어떻게든 그 흐름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그녀가 어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드디어 소티스의 적성을 깨달았다. 그러나 레먼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삿된 것을 물러나게 하고, 더 옳은 길과 훌륭한 길을 알려 주는 능력.

질서를 일깨우는 힘.

규율.

“……스승님.”

레먼은 가슴이 지끈거리는 듯한 슬픔에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이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오고, 소티스의 눈이 천천히 뜨이며 파르스름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스승님.

레먼은 비통한 기분이 되어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스승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규율’다운 삶을 사셨고, 혼돈을 위해 망설임 없이 목숨을 내어 놓으셨지요. 세상을 망치는 존재가 태어나면 기어이 그것을 고쳐 낼 존재 또한 태어나기 마련이라, 그 지고한 숙명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요.

그래서 모든 규율은 명예로운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였다고도 하셨지요.

하지만.

스승님. 저는 이 여인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위하는 만큼 자신을 위해서도 힘껏 살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겨우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이, 고결한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고 평범한 미소를 선물받았으면 좋겠어요.

“레먼.”

소티스는 레먼을 가만히 불렀다.

그녀는 그의 슬픔을 이해했다. 그의 사연을 다 알지 못하는데도, 미처 끊어지지 않은 연결을 타고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소티스는 자신의 숙명을, 그리고 그 숙명을 짊어진 이들을 잃었던 레먼의 슬픔을 이해했다.

그녀는 마법사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불안해하는 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한참 동안.

“있잖아요. 제가 태어났을 때, 공작 저의 하녀들이 입을 모아 제게 그렇게 말했답니다.”

“…….”

“이 아가씨가 메리골드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메리골드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를 리가 있을까. 레먼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한숨을 삼켰다.

메리골드는 그의 마탑 주변에도 많이 피는 꽃이었다. 날이 따스해지거든 양지바른 풀밭에 모여 수십 개의 금빛 꽃잎을 살랑거리는 그 꽃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소티스 메리골드가 메리골드답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레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랬기에 혼돈이니 규율이니 하는 것들이 소티스를 망치지 않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온갖 핑계를 대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옳은 사람이야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고, 자신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며, 제게 주어진 숙명을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래서 아름다운 것들은 찰나에 불과하구나.

그래서 소티스가 빛나고, 그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면서도 이따금 레먼은 소티스의 광채가 원망스러웠다.

“괜찮아요.”

소티스가 그를 힘주어 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걱정하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

“이번에도 혼돈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빼앗길 건가요?”

소티스의 작은 손이 레먼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대로 소티스가 이마를 콩 맞대자, 그는 그녀의 마력이 전신을 천천히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아주 천천히, 그러나 온화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꽃 피는 계절의 한낮에만 볼 수 있는 따스하고 찬란한 볕과 같은 마력이었다.

그 힘이 레먼을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한없이 다정하게 위로했다.

“저는 여기 있어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요. 당신이 제게 손을 내밀었으므로.

“그러니까, 혼돈이 나타난다고 해도…….”

이마를 맞댄 채 소티스가 웃었다.

“제가 사라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레먼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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