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인도하는 빛 (2)
‘혼돈’의 존재를 전해 들은 이후, 레먼 페리윙클의 상태가 미묘했다.
사람의 영혼을 나쁜 길로 유혹해서 망가뜨린다던, 붉은 머리 마녀와 사실 아는 사이이기라도 한 걸까? 소티스는 내심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붉은 머리. 그녀는 문득 그 단어에 피니에 로즈우드를 떠올렸다. 석양을 가닥가닥 빚어낸 듯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던 그 머리카락.
“……아니야.”
소티스는 고개를 얼른 털어 상념을 날려 보냈다.
아무리 제 자리를 빼앗으려던 사람이라지만, 마녀에 빗대 생각한다는 건 미안할 일이었다. 적어도 핀은 안주할 수 있을 자신의 자리가 생기면, 그곳에서 조용히 살아갈 사람이니까.
“소티스 님.”
정원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조그만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애나였다. 며칠이 지나 몸이 한결 나아진 애나는 오늘 처음으로 산책 삼아 아랫마을에 다녀오기로 했었다. 신나 보이는 아이를 위해 레먼이 용돈을 조금 쥐여 주었다.
“선물이에요.”
애나가 내민 건 몇 송이의 새하얀 장미였다. 투박한 솜씨로 다듬은 듯 줄기의 길이가 들쑥날쑥했으나, 꽃송이만큼은 싱싱했다.
“내게 주는 거니? 고마워.”
소티스는 솔직하게 기뻐하며 장미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싱그러우면서도 달콤한 향이 코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마법사님이, 아, 이제는 두 분 다 마법사님이시죠! 어쨌든요, 레먼 님이 주신 용돈으로 뭘 할까 고민했거든요. 그런데 어쩐지 레먼 님이시라면, 소티스 님을 위한 물건을 사실 것 같았어요.”
소티스는 문득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에 꽃으로 뺨을 살짝 가렸다.
“그…… 그러니?”
“그럼요. 레먼 님이 소티스 님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시는데요.”
소티스도 이미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없이 맑은 목소리로 듣고 있자니, 왜 그리도 새삼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레먼 님이 좀 기운 없어 보이시던데요. 혹시 두 분 다투셨어요?”
“응? 아니. 안 싸웠어.”
“아까도 장작더미 사이에 한참 멍하니 계시던걸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어요.”
“음…….”
레먼이 그토록 오래 가라앉아 있는 건 소티스에게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뭐라도 도울 방법을 찾고 싶지만,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이제 막 각성해서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는 마법과 렉투스 상단과의 연줄이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소티스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생각해 보면 레먼은 언제나 자신을 도와주었는데, 정작 저는 제대로 된 보답조차 못 해 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소티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애나가 말했다.
“기분 전환에는 맛있는 음식이 최고예요. 소티스 님, 레먼 님을 위해 요리해 보시는 건 어때요?”
“……요리?”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면 기분이 한결 좋아질지도 모르죠. 마침 부모님이 저녁에 스튜용 닭을 잡아 오신다고 했거든요.”
그녀의 얼굴이 반짝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졌다.
“난 직접 요리해 본 적이 없어.”
생각해 보니 그랬다. 메리골드 저택에서도, 황성에서도 소티스는 언제나 남이 해 온 양질의 음식만 입에 넣었다. 황성 밖에서도 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레먼이 직접 요리했다.
“하긴, 그렇네요. 공녀님이셨고, 황후 폐하셨으니까…….”
그 말에 소티스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무능해도 좋다는 뜻은 아닌데.
“가르쳐 줄래?”
소티스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걸 도울게. 부모님께 나도 거들고 싶다고 좀 전해 주겠니?”
그러자 문가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부부가 빙그레 웃었다.
“얼마든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스튜는 그렇게 어렵지 않거든요. 금세 하실 수 있을 겁니다.”
***
레먼은 그날도 하루의 대부분을 생각에 잠긴 채 흘려보냈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안다. 혼돈이 나타났으니 더욱 부지런히 멘데즈의 각 지역, 그리고 필요하다면 베아툼마저도 살펴보며 단서를 손에 넣어야 했다.
아는데. 너무 잘 아는데.
그런데도 그의 시간은 자꾸만 거꾸로 돌아갔다. 그를 가장 외롭고 슬프게 했던 바로 그 시간으로. 혼돈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고, 끝내 망쳐 버렸던 그 시절로.
“이것도 운명일까요, 스승님. 제가 어디서든 그 혼돈을 만나는 일이요.”
레먼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며, 하늘이 마녀의 머리카락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혼돈은 제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빼앗으러 올까.
그럴 수 없다. 이제는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어떤 승산도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마법사님.”
애나가 기웃거리며 레먼을 불렀다.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온 아이의 뺨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정원에서 소꿉놀이라도 한 걸까?
호박색 눈동자가 저를 가만히 응시하자, 애나가 씩 웃었다.
“저녁 드실 시간이에요. 오늘은 소티스 님의 특제 요리랍니다.”
“……네?”
레먼은 제 귀를 의심하며 벌떡 일어났다.
직접 요리했다고?
……소티스가?
***
“오셨어요?”
정말이었다.
소티스는 빵 굽는 일을 돕겠다며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아 장작을 부지런히 던져 넣고 있었다. 애나가 레먼을 데려오자 그녀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앞치마를 맨 그녀는 불을 오래 쬔 탓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몇 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생기 넘치는 미소를 그녀를 누구보다도 맑고 발랄해 보이게 만들었다.
“닭고기 스튜를 끓여 봤어요. 저요, 요리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어요. 이게 그나마도 쉬운 편이라니…… 전 아직 멀었나 봐요.”
소티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그래도 재밌었어요. 앞으로 이것저것 더 배우고 싶을 만큼요.”
“…….”
“맛있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드셔 주실래요?”
탁자가 너무 작아서 레먼과 소티스는 정원 쪽에서 따로 먹게 되었다. 레먼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빵 하나를 손에 든 채, 스튜가 담긴 그릇을 건네는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소티스의 손이 상처투성이였다. 익숙지 않은 일에 다친 듯 베이고 덴 손의 곳곳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소티스가 손을 얼른 앞치마 안쪽으로 숨겼다.
“칼질이나 불질에는 서툴러서요. 대단치 않은 상처이니 너무 염려 마세요. 아, 배고프다. 우리 얼른 먹을까요?”
“고마워요.”
따뜻한 스튜에서는 뽀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 만든 것치고는 무척 먹음직스러운 생김새였다.
“기분 전환이 될 만큼은 맛있었으면 좋겠네요.”
막 한입 떠먹으려던 찰나였다. 레먼이 멈칫하며 물었다.
“……기분 전환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라고 애나가 그랬어요. 아이에게 혼돈이 다녀갔던 이후로 줄곧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소티스가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제게는 레먼 님이 중요하고 소중한 분이시니, 걱정됐어요. 도와드리고 싶었고요.”
그는 한참을 말없이 음식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떤 대답도 없이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따뜻했다. 형용할 수 없는 온기가 그를 채우는 것 같았다. 가장 힘든 시간으로 자꾸만 이끌리던 마음이, 그 온기를 따라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스튜는 그렇게까지 맛있지 않았다. 특히 간을 잘못 맞추었는지 소금이 과하게 들어가서 조금 짰다. 제 몫을 먹은 소티스도 그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처음 만든 음식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입맛에 맞지 않으면 남겨도 좋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레먼은 음식을 말끔하게 먹었다. 그는 스튜를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태어나서 먹었던 스튜 중에서 가장 맛있었어요.”
“…….”
“고맙습니다. 소티스 님 덕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정말요?”
빙그레 웃던 그가 손을 뻗어 소티스의 손을 쥐었다.
탁자 위에서 맞잡은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도 작고 부드러웠다. 곳곳에 상처를 입어 쓰라렸을 텐데도, 그저 환히 웃기만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설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당신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에요.”
그저 자신답게 살았을 뿐인데, 그 존재만으로 누군가를 매료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레먼은 그 빛을 소티스에게서 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반짝이고 있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레먼이 소티스의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댔다. 의미는 단순했다.
당신에게 존경과 헌신을.
“혼돈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멘데즈에 큰 위협이 될 수 있거든요.”
“좋아요. 붉은 머리의 마녀라고 했었죠.”
“네.”
손등에 입술을 댄 채로 소티스를 바라보던 레먼이 말했다.
“제 옛 스승님과 선배 마법사들, 그리고 모든 가족을 죽인 존재입니다.”
“…….”
“그대로 두면 멘데즈의 미래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한 명이라도 많은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베아툼에서 타국을 지원하는 일은 전례가 거의 없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소티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그에게 맡기지 않은 다른 손으로 레먼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 했다.
시름에 잠겼던 호박색 눈동자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런 슬픔이었구나.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었던 이의 아픔이었구나.
“제가 도울게요.”
“…….”
“저도 마법사잖아요, 레먼 님. 어쩌면 이건…… 어떤 운명일지도 몰라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제가 일으킨 작은 기적이 마법이라고 했을 때 제 기분이 어땠는지 아시잖아요.”
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삶에 내리쬐는 그 태양 같은 빛을 레먼도 본 적이 있었다.
“이건 제가 해야 하는 일이에요. 혼돈이 세상을 망치려 한다면, 제가 온 힘을 다해서 그걸 막을 거예요. 제 지위가 아닌 능력으로 해내고 싶어요.”
레먼은 소티스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그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앞으로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소티스 님께서 마법사로서 어떻게 훈련할지 계획도 짜야 하고요.”
소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더없이 진지하고 단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