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인도하는 빛 (1)
기적.
그 단어 외의 어떤 말로도 지금의 소티스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내가 네게…….”
소티스는 아이에게 간절하게 속삭였다.
“힘이 되어 주고 싶어.”
누군가의 온기가, 바로 그 따뜻함이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슬픔을 되돌릴 수 있다.
소티스는 그렇게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녀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이는 없었다.
물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일렁이던 나비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마치 삶의 의지를 새로이 다지려는 것처럼.
“나와 함께 가자.”
소티스의 속삭임에 나비가 고개를 끄덕이듯 날개를 약하게 흔들었다. 그러더니 그녀에게 이끌리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 나비가 소티스에게 안겼을 때, 레먼은 주문을 외워 길을 불러냈다. 조그만 빛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오르며 나비가 돌아가야 할 길을 안내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아이가 조금 뒤척이는 것을 확인한 레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영혼이 자리를 잡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테지만, 오늘 안에는 눈을 뜰 겁니다. 그러니…….”
그가 살짝 웃으며 문가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말했다.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오래 기다리셨겠군요.”
문 틈새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이의 부모가 넋이 조금 나간 얼굴로 들어왔다.
황후와 아이의 대화는 듣지 못했다. 부모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속마음이라면, 때로는 그저 모른 채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금해도 꾹 참으려고 했다.
그랬는데.
“황후 폐하…….”
부부가 충격으로 말을 조금 더듬었다.
얼떨떨한 정신이 돌아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정도로 당황스럽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부부는 문 틈새로 새어 나오던 어떤 빛을 보았다. 그건 그리 눈부시지는 못했으나,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저도 모르게 이끌려 지켜보게 될 만큼.
그게 마법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러니 더욱 이상했다. 멘데즈 황국의 마법사 혈통은 끊긴 지 오래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폐하께서…… 아니, 소티스 님께서 마법사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소티스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평범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너무나도 낯선 감각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오히려 더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랬던 모양이에요. 물론 별로 대단한 건 아니지만요.”
“대단합니다.”
곁에서 잠자코 있던 레먼이 나서며 소티스의 말을 반박했다.
“충분히 대단한 일입니다. 소티스 님께서는 방금 한 아이의 운명을 바꾸셨어요.”
레먼 페리윙클은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잘 안다.
소멸을 앞둔 영혼을 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회생의 길을 벗어난 악령을 소멸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힘이 약해진 영혼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 설령 그 안에서 길을 끄집어내 인도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영혼 자체가 망가지는 일이 더 흔했다.
레먼조차도 그 아이는 포기하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영혼이 희미해져 버린 터라, 그가 아니라 그의 스승이 오더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영혼이 오래도록 고통받지 않도록 달래서 보내는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소티스는 기적을 해냈다. 소멸을 앞둔 영혼을 다시 나비로 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길을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건넨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힘을 발휘한 게 아니다. 그 기운이 오로지 상대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제힘을 선물한 것이다.
“신이여…….”
며칠 동안 쓰러져 있던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맡으로 부리나케 달려간 부인이 아이의 이마와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기며 탄식했다.
“이게 신의 축복이 아니면 무어란 말입니까. 기적이군요. 기적이 나타났어요……. 멘데즈에 사람을 구하는 마법사가 나타나다니. 모든 게 신기해서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레먼도 빙그레 웃으며 소티스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새로운 영혼 마법사님을 뵙습니다. 동료를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마법이라고.
영혼 마법사.
소티스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부모를, 여전히 저를 보며 벅찬 미소를 짓는 레먼을 보았다.
처음으로 찾아낸 자신의 재능이었다.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아내로 대단해진 게 아니라 오롯이 그녀 스스로 해낸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능력으로 방금 사람을 구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게 전해졌다. 지금껏 느껴 본 것과는 전혀 다른 활력이 전신을 내달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입이 닳도록 감사 인사를 건네는 부부에게 소티스가 말했다.
“아뇨, 이건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에요.”
이 순간이 그녀의 인생을 어떻게 뒤바꾸어 놓았는지 그들은 알까. 천금을 주고도 감히 바꾸지 않을 만큼 귀한 일이었다. 그녀야말로 부부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둘러싼 네 사람이 벅찬 가슴을 겨우겨우 달랠 때였다.
“소티스 님.”
아이의 조그맣고 마른 손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소티스의 치맛자락을 쥐었다.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황후님이 저를 불러 주셨을 때, 제 안의 새카만 게 녹아서 사라지고 따뜻하고 포근한 것으로만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어요.”
“다행이구나.”
“정말 저를 하녀로 받아 주실 거예요?”
“나를 따라가도 괜찮겠니?”
“그럼요. 제 평생의 영광일 거예요. 글도 열심히 배울 테니까, 조수도 시켜 주시면 안 돼요? 원래 위대한 마법사님들은 항상 제자와 조수를 거느린다고 했어요. 저, 뭐든지 할게요!”
그녀는 아이의 손등을 가만가만 쓸어 주며 웃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애나, 애나예요.”
“그래. 함께 가자, 애나.”
“다행이에요. 마녀를 따라가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요!”
아이의 외침에 레먼의 낯이 일순 굳어졌다.
“……마녀?”
평소의 레먼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긴장감은 물론이고 미묘한 분노와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어조에 소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이상한가요?”
그는 아이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애나.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니? 아주 중요한 문제거든. 마녀의 생김새라든가, 마녀가 한 말이라든가. 그런 것들 말이야.”
“음…….”
아이는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다. 잠시 후, 기억을 되짚어가며 대답했다.
“며칠 전쯤, 약효가 떨어졌을 때였어요. 저는 자다 깨서 울고 있었는데, 누군가 제게 속삭였어요. 이런 아픔 같은 건 영원히 잊을 기회를 주겠다고요.”
레먼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애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낯빛은 창백해지다 못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생긴 건…… 뱀 같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였어요. 빨간 머리가 수세미처럼 엉켜 있었고요. 제가 누구냐고 물어보자, 할머니는 자기가 마녀라고 했어요.”
소티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니?”
“했어요. 하지만 마녀가 저를 톡톡 치는 시늉을 하자 신기하게도 아픈 게 싹 나았어요.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아픈 건 지긋지긋한걸요.”
아이는 마녀가 제게 했던 말을 소티스와 레먼에게 전해 주었다.
“아이야, 이리 온. 이리 온. 너는 세상을 집어삼킬 거대한 힘이 될 수 있단다.”
애나가 마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사이,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고 현실이 점점 더 나쁘게만 느껴졌다고 했다. 어느새 두렵고 불안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도록 커져서, 결국에는 다 망쳐 버리거나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제외한 어떤 것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고.
영혼을 심연으로 끌어들이고 나쁜 길로 유혹하는 목소리.
붉은 머리, 그리고 마녀.
‘혼돈’.
오래도록 잊었던, 기억 한편에 애써 묻어 두었던 존재가 상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레먼은 주먹을 꽉 쥐고 생각에 잠겼다. 그저 멘데즈의 문제를 좀 도와주는 정도로만, 소티스에게 힘을 보태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
그렇게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온기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소티스였다. 그녀는 불안해 보이는 레먼의 손 위에 제 것을 가만히 겹치고, 그가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아무래도 애나가 해 준 이야기가 심각한 문제인 거겠죠?”
레먼은 곤란한 기색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혼돈.”
레먼이 소티스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가, 팔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베아툼에서는 그것을 ‘혼돈’이라 부릅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혼돈은 인간을 병들게 하죠. 절망과 비탄을 삼킬수록 강해지는 존재거든요.”
무언가 더 말하려던 그는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어색하게 웃었다.
“대책을 세워 보겠습니다. 어쨌든, 애나가 합류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혼돈에 삼켜지지 않도록 제가 곁에서 살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창가를 눈짓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이에게도 회복할 시간이 조금 필요할 거고요. 괜찮으시다면, 오늘 이곳에서 신세를 져도 될까요?”
“그럼요! 되고말고요! 저희의 은인 되는 분들 아니십니까.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습니다!”
레먼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던 부부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더니, 집을 좀 치우고 음식을 마련해야겠다면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는 소티스에게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고 말한 뒤 문을 나섰다.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나서려던 소티스는 우뚝 멈추어 선 채 레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이었을까?
……그가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