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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43)화 (44/121)

제43화. 소티스의 선택 (3)

아이는 너무나도 작고 말라서, 그저 그 모습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가난이 얼마나 지독하고 오래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채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아이였다. 눈 밑은 푹 꺼져 있었고 광대가 드러날 정도였다. 얇은 이불 한 장을 겨우 덮은 채 잠든 아이는, 빈민가에서 보았던 아이들만큼이나 궁핍하고 어려운 나날을 보낸 듯했다.

“어떤가요?”

그녀의 물음에 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영혼에 관련된 문제였다. 아이의 몸은 무척 약했으나 이렇게 의식을 되찾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혈색은 좋은 게, 회복기에 들어선 듯했다.

레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근처에 아이의 영혼이 있을 텐데, 희미한 기척만 느껴질 뿐 찾을 수가 없었다.

“숨은 것 같아요.”

마법사가 말하자 소티스가 곤란한 듯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아이와 대화를 해 볼 수는 없을까요?”

“아마 듣고는 있을 겁니다.”

“……얘야, 돌아와야 해.”

소티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나중에는 돌아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돼. 여기 마법사님이 널 도와주실 거야. 응?”

침묵이 흘렀다. 마치 그런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며 내치는 듯했다.

“이 상태로는 길을 열 수 없어요.”

레먼이 작게 속삭였다.

아이의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데, 영혼이 이상할 만큼 약해져 있었다. 아무리 삶을 비관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가 지나쳤다.

소티스의 영혼은 육신을 한 달이나 떠나 있었는데, 이 아이보다도 상황이 훨씬 나았다. 아이는 마치 외부의 누군가 영향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상태가 나빴다.

“집중하지 않으면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혼이 약해져 있습니다. 소멸하기 직전의 영혼에서 길을 끌어내면, 오히려 더 빠르게 사라질 수도 있어요.”

“한마디라도 좋아!”

소티스가 간절하게 외쳤다.

“누구든 네 슬픔을 이해할 기회를 줘.”

그러자 어딘가에서 아이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저는 없는 게 나아요.]

레먼이 그 말을 전해 주자, 소티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도 저렇게 누워 있었다. 레먼이 다가와 불안하고 슬픈 얼굴로 사연을 물었을 때, 그때의 그녀가 딱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나 같은 건 없는 게 나아.

“그렇지 않아. 네 부모님께서는 이렇게 마법사님께 부탁까지 하실 정도로 널 간절히 기다리고 계셔.”

소티스와 레먼의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의 부모는 이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레먼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옷장 쪽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

아이는 입을 다물었고, 작은 침실에 모인 사람들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기만 했다.

레먼은 부모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던 이들은 결국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평생 저 아이가 병상을 털고 일어날 날만을 기다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전 황후라는 사람이 집집마다 먹을 것을 돌리고 삽과 곡괭이를 주었을 때는 답지 않게 낙관하기까지 했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아이를 굶기고 싶겠는가. 맛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고 싶었고, 가장 예쁜 것만 입혀 귀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저 도둑질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주린 배를 어찌할 도리도 없을 만큼 가난했고, 배운 것이 없어 이 삶을 감히 바꾸지도 못했을 뿐이었다.

“부탁드립니다, 황후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아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무릎을 꿇을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소티스는 그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저희가 아이와 잘 이야기해 볼게요. 울지 마세요. 두 분이 기운을 내셔야 아이도 잘 돌보시지요.”

“예…….”

부부가 아쉬운 기색으로 발을 끌며 나가자, 소티스는 레먼의 옆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걸었다.

“네 얘기를 해 줄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소티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러니 물러날 수 없었다. 그녀는 황성을 나오면서, 그저 무력하게 앉아서 방관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애써 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가난한 이들을 살피고, 그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움직이면서 그 각오를 다시금 다지고 또 다졌다.

쉽게 보듬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녀도 그만큼 진심을 쏟아야 했다.

“그럼 내 얘기부터 해 줄게. 난 이 나라의 황후였단다.”

레먼이 한 걸음 물러나서 꼿꼿하게 선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날 사랑하지 않으셨지. 그런데도 나는 그 자리에 머물렀단다. 그렇게라도 폐하 곁에 있으면, 언젠가 한 번이라도 나를 좋아해 주실 것 같았거든.”

그때는 필사적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지금은 왜 이리 미련하게만 느껴지는지.

소티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 기억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최선을 다한 사랑이었기에 때가 되었을 때 보내 줄 수도 있다고 믿었다.

“모두들 믿어 주는 황후라면 적어도 하루라도 더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사람들을 도왔지.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면서, 정작 내가 한 행동은 그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나를 위해 하는 행동들뿐이었단다. 어쩌면, 타인의 어려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빴을지도 몰라.”

“소티스 님.”

“그러다가 그조차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날이 오자, 나는 너처럼 쓰러졌단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사람이니까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았어. 나만 사라지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것 같았고…….”

소티스는 핀과 행복하게 웃던 에드먼드를 떠올렸다.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해 ‘현명한 황후’에 매달렸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 모습이 새삼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건 에드먼드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했다는 것뿐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노력했던 결과가 고작 반쪽짜리 현명함, 반쪽짜리 황후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번만이라도, 이렇게 최선을 다했다면…… 적어도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었을까?

“그랬는데 돌아왔어.”

지나간 일을 바꿀 수 없는데도,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 비정한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진짜로 무언가 해내고 싶었거든. 내 힘으로.”

소티스는 아이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단호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살다 보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 많이 생긴단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좋은 일도 분명히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만두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으니까. 이런 말도 위선적으로 들릴까……? 하지만.”

그녀가 주먹을 꼭 잡으며 맹세하듯이 말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왔어. 널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이게 내 선택이란다.”

너를 돕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진심을 다해 네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좋겠어.”

그녀는 간절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쿵쿵거렸다.

그리고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저는 몸이 약해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숨조차도 쉬지 못한 채, 가늘게 이어지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는 병에 걸렸고, 다 나으려면 아주 오래도록 약을 먹어야 해요.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우리에게 약초는 비싸기만 해요. 부모님은 매일 죽도록 일하셨고, 언니 오빠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도둑질과 구걸을 해요. 끝나지 않는 가난 때문에 온 가족이 싸워요.]

“…….”

[황후님이 밀가루와 감자를 나눠 주셨지만, 이건 잠깐일 뿐이에요. 감자를 심어서 다음 감자를 캐내기까지 저희는 또다시 굶어야 해요. 하지만 제가 사라지면… 적어도 아낀 약값만큼은 먹고 살 수 있을 거예요. 고민할 필요도, 싸울 필요도 없이요.]

“……나랑 가자.”

소티스가 말했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럼 나와 함께 황성에 가자, 아이야. 네가 다 나을 때까지 내 심부름을 도맡아 준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줄게. 다른 하녀들과 똑같은 돈을 줄 테니, 그걸 고향에 보낼 수도 있어.”

[전 황후님의 심부름을 하기엔 너무 어리고, 배운 것도 없어요. 저는 글자도 쓸 줄 몰라요.]

“내가 알려 줄게.”

[황후님은 가엾은 아이들을 모두 하녀로 삼으실 건가요?]

“나는 영웅이 아니야. 그러니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어. 나도 그건 알아.”

소티스가 반대편 손을 뻗었다. 이내 그녀는 팔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그런데 적어도 너를 지나치지 않을 만큼은 여유롭단다. 내 부유함은 내 대단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니, 너와 나누어도 억울하지 않단다. 아니지, 너와 나누기 위해 부유한 거란다. 영원히 있을 필요가 없어. 네가 원하는 만큼만 내 곁에 있어 주겠니?”

[……정말 저를 받아 주실 거예요?]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나와 약속해 준다면.”

[제가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는 걸까요?]

“내가 네 목소리를 들었잖니.”

소티스가 잠든 아이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웃었다. 정말로 행복한 듯 눈을 접고,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마법사가 된 것처럼, 네 영혼과 직접 이야기했단다. 내게 이것보다 행운인 일이 있을까?”

[…….]

그때, 내내 침묵을 지키며 소티스를 살피던 레먼이 깜짝 놀라 소티스에게 손을 뻗었다.

“소티스 님. 소티스 님의 몸이…….”

그녀의 몸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봄철 햇살처럼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의 마력이 소티스의 전신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티스가 영혼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을 의심할 만큼 충격적이었는데, 그로도 모자라서 마법사로 각성까지 하게 되었다. 레먼은 너무 놀라서 자신의 뺨을 얼른 꼬집어 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소티스 님, 손을 뻗으세요!”

레먼의 말에 소티스는 홀린 듯 팔을 곧게 펼쳤다.

그녀의 손바닥으로 마력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좋아요.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흐름을 찾아보세요. 마음으로 기척을 읽는 거예요. 눈을 감고, 천천히. 아주 연약한 것을 다루듯이요.”

“……네.”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서 흘러넘치는 것 같은 그 힘을, 흐름을 따라 흘려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솜털이 갓 돋아난 병아리 같은 색의 빛무리들이 그녀의 손바닥에서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둥실둥실 떠올라 낡은 옷장을 향해 흘러가, 이내 그 안에 숨어 웅크린 아이의 영혼으로 스며들어 자신의 생기를 전해 주었다.

아이의 몸은 거의 그 윤곽을 볼 수도 없을 만큼 투명해져 있었다. 황금빛 마력이 날아가 그 투명한 존재를 부드럽게 받쳐 안았다.

이내 아이의 몸은 점점 작아지다가, 작아지다가,

한 마리의 작은 나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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