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소티스의 선택 (2)
어디에든 내려앉는 따사로운 햇살 덕에, 세상에 봄이 완연해졌다.
레먼과 소티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보급품을 옮겼다. 음식과 농기구가 담긴 수레를 쉼 없이 끌면서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와 활기가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소티스는 도저히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지쳐서 초원에 드러누웠다. 아침부터 도랑에 빠진 바퀴를 끌어 올리겠다고 한참을 씨름한 탓에, 이제는 감자 한 자루 옮길 힘도 남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요, 레먼.”
그녀가 엉망이 된 옷을 털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요. 이렇게 많이 걸어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일 거예요.”
소티스의 옆에 걸터앉은 레먼이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기뻐 보입니다, 소티스 님.”
“기뻐요.”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그녀가 어느새 눈을 뜨고, 맑은 물빛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행복해요. 매일이 즐겁고 보람차요. 이 순간이 제게 얼마나 귀중하고 대단한지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요. 이 순간을 위해…….”
소티스의 뺨은 장밋빛으로 상기되었고, 사방으로 흩어진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이국의 꽃처럼 소담스레 반짝이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을 황성에서 버텨 낸 거라고 생각하면, 단 한 순간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요. 인내조차도 제가 이뤄 낸 작은 기적처럼 느껴진다면, 너무 이상한가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맑고 밝은 목소리가 바람을 따라 너울너울 날아다녔다.
이런 여인을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
레먼 페리윙클은 그렇게 생각했다. 남을 위해 가진 것을 다 내어 놓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밤낮으로 물건을 옮겨 대는 건 물론이고, 더없이 누추한 곳에서 웅크린 채 잠을 청해야 하는데도 자신은 그 일이 좋다고 한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온 힘을 다해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이 그녀를 망치진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의 사랑이, 족쇄가 아니라 날개가 될 거라는 어떤 가능성을.
“삶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어요.”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레먼에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볼 때면, 레먼은 가슴 한쪽이 기분 좋게 시큰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당신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겠죠?”
“…….”
“고마워요, 마법사님. 저를 만나러 와 줘서. 그리고 이렇게 함께 있어 주신 것도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레먼이 무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힘든 시간을 견뎌 내신 것도, 그래서 결국 어떤 게 행복해지는 길인지 고민하고 이루어 내신 것도 모두 소티스 님의 힘이었어요.”
“누구나 매 순간 내재한 힘을 전부 끌어내며 살 수는 없답니다.”
소티스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제게 길을 보여 주셨지요.”
“…….”
“당신이 있어서 좋아요.”
따사로운 봄볕인 줄 알았더니, 마음을 다 태우는 불길이었을 줄은.
레먼은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불편할 만큼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저도요.
저도요, 소티스 님. 저도 당신이 있어서 좋아요. 아니,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이 웃으면 어떤 추위도 무색하여 제 마음은 언제나 봄의 한중간에 선 듯하고, 당신이 눈물지을 때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속절없이 미워지기만 해요.
사랑이 당신의 삶을 얼마나 슬프게 했는지 알아서 차마 이 마음을 건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는 세상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참 신기하죠. 시간은 언제나 똑같은 속도로 흘러가는데, 행복한 순간은 찰나 같고 불행한 순간은 영원처럼 느껴지니까요.”
잠시간 봄을 만끽하던 그녀가 영차, 하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니까요. 이제 가요.”
“벌써요? 조금 더 쉬었다 가셔도…….”
소티스가 씩씩하게 외쳤다.
“이걸 다 나눠 주고 나서 쉬어도 늦지 않아요!”
***
황성 밖에서의 생활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선인만큼 악인도 많았다. 의심이나 불신을 넘어 기만, 증오, 배신으로 사람을 실망하게 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네?”
소티스의 손바닥에 약을 발라 주던 레먼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 그녀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사기꾼인 걸 모르고 비싼 값에도 거래하겠다고 한 제가 어수룩했죠. 그래도 비닐 온실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 막대가 꼭 필요했으니까, 따지러 간 거지만…….”
“…….”
레먼이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티스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그의 손등을 가볍게 문질렀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는 꼭 당신과 함께 갈게요. 약속해요.”
“……정말이시죠?”
“그럼요.”
소티스는 이제 괜찮다며 손을 살짝 빼고, 그가 만들어 둔 샌드위치를 꺼내 크게 베어 물었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법을 조금쯤 배우게 됐어요. 그러니까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게다가 마법사님도 바쁘셨잖아요.”
레먼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사기꾼을 찾아가 썩은 막대의 소재를 따져 묻는 사이, 레먼은 근방의 길 잃은 영혼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나비들이 레먼의 손짓에 따라 본래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길을 오래 잃은 영혼은 자신의 본질을 잊게 되고, 그렇게 오래 고여 악령이 된다고 했다. 그러니 레먼이 영혼을 보듬어 주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고, 소티스는 그런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영혼들이 조금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갔는데, 그 이후로 몇 번인가 반복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듯합니다.”
소티스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뭐라고 하던가요?”
“어떤 거대한 힘이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있다고요.”
“거대한 힘…….”
“사람들이 변하고, 주변에 소홀해지며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레먼은 영혼들이 남겼던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었다.
“혼돈.”
“…….”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르더군요.”
소티스는 잠시간 레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분 탓이었을까?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해진 것 같았다. 아니, 심각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법사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본질적인 공포, 그리고 거부감과 두려움에 가까웠다.
“저, 황후 폐하.”
그들이 이야기를 더 나누기도 전에, 누군가 다가와 소티스를 불렀다. 비좁은 방에 나란히 앉아 있던 레먼과 소티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함께 오신 분이 마법사……라고 하셨지요?”
“네, 맞아요.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렉투스 상단주의 요청 덕에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사람들에게 드러냈다. 이미 빈민가의 사람들을 한 번 구제했던 덕에 사람들은 큰 거부감 없이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그 덕에 베아툼의 마법사, 레먼 페리윙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도 편해졌다. 사람들은 이국에서 온 마법사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선한 심성에 금세 매료되었다.
게다가 영혼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멘데즈의 사람들은 레먼의 능력이 어떤 존재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저…….”
이번에도 그런 식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레먼을 힐끔거렸다.
“언덕 아래에 사는 붉은 지붕 집의 막내 아이 말입니다. 최근 약을 좀 얻게 되어서 몸이 많이 나아졌는데요, 며칠 전쯤 별안간 쓰러진 뒤로는 내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요…….”
소티스는 주민들의 말에서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의사를 불러 보았나요?”
그러자 한 노인이 나서서 대답했다.
“의사라고 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이 근방에서 삼십 년쯤 약초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이 아이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 약을 지으려면 비싼 약초가 많이 필요했지요. 그러다 최근 황후님이 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신 덕에, 그 집 식구들이 약초를 좀 사 갔습니다.”
“그러니까, 최근에는 약을 잘 챙겼다는 거지요?”
“예, 예. 그렇고말고요. 혈색도 훨씬 좋아지고, 이대로라면 건강하게 살지는 못할지언정 약만 꾸준히 먹으면 위험할 일 없이 잘 지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약제사의 뒤에 숨어 있던 아이의 어머니가 눈물을 터뜨렸다. 낡은 천을 꿰매 입은 그녀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소티스와 레먼에게 사정했다.
“귀하신 분께 이런 부탁을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저희 아이를 가엾게 여기시고 한 번만 살펴 주십시오. 평생 제 먹을 것을 팔아 약을 짓는 데 쓰더라도 저는 조금도 아깝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다만 이 문제가, 아이의 몸이 아닌 영혼에 있는 거라면…… 황후님, 그리고 마법사님. 제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소티스는 문득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또한 그랬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지만, 그것 때문에 쓰러진 건 아니었다. 그저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었을 뿐이다.
레먼은 분명 그게 흔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레먼.”
소티스가 그를 조용히 부르자, 레먼이 그녀를 바라보며 선선히 웃어 보였다.
“함께 가서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그의 얼굴에는 싫은 내색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그의 고국에 관련된 일도 아니거니와,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소티스는 그에게 수십 번을 고마워해도 모자란 기분이 들고 만다. 그는 언제나 소티스에게 그런 사랑이 있냐며 그녀의 선의를 추켜세웠지만, 소티스가 보기에 정말 대단한 건 국적마저 초월한 마법사의 선의였다.
“언제나 고마워요.”
레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또한 저의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