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41)화 (42/121)

제41화. 소티스의 선택 (1)

상인은 기본적으로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렉투스는 그런 면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을 만큼 철저한 사람이었고, 그 계산적인 면모가 지금의 렉투스 상단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티스가 제안한 것은 그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올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옳은 일이었지만, 효과적인 일은 아니다. 명예로운 일이나 가난해지는 길이기도 했다.

그런데 렉투스는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저…….”

소티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다른 이유를 듣지 않으셔도 괜찮으신가요? 정말 이걸로 충분하세요?”

렉투스는 무뚝뚝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죠. 염두에 두신 방향이 있으십니까.”

없을 수 없다. 상대는 렉투스 상단이었다.

소티스는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이고, 레먼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소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리자, 레먼은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빈민가의 사람들에게 가난이 끝없이 계속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은 척박하고, 심을 씨앗은커녕 먹을 것도 마땅치 않지요. 그러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고 수익의 일부를 상단이 취하는 방식은 어떠실까요.”

“수익의 일부?”

“네. 사람들이 일군 농작물을 상단이 싸게 사고, 그걸 다른 지역에 팔거나 수도에 납품하는 식으로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이나 인력, 사냥한 물건 같은 것도요.”

“물건과 돈이 돌고 도는 것은 상단에 큰 이점입니다. 그러나 그러기까지 초기 자금이 상당히 듭니다. 그리고, 먹을 것조차 없는 이들에게 감자를 준다면 그것을 심겠습니까? 먹어 치우겠지요.”

“압니다. 그러니 첫 수확이 올 때까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가 지원하고자 해요.”

소티스는 긴장을 꿀꺽 삼켜 내고는 말했다.

“제게 돈을 빌려주세요, 상단주님. 수도에 돌아가 갚을 방법을 마련하겠습니다. 황실 회의에도 안건을 올릴 것이고, 제 이름이나 지위를 이용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후궁에 있는 가구를 팔아서라도 그 돈은 모두 갚을 테니까…….”

“적지 않은 빚을 당신 앞으로 달아 두되, 물건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거군요.”

“네, 맞아요.”

“얼마나?”

“…….”

얼마나, 라고 해도 뾰족한 답은 없었다. 그녀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금화 한 닢으로 무엇을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바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이었다.

소티스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애써 의연하게 말했다.

“상단주께서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을 부탁드립니다. 동전 한 닢이라도 많이요.”

“흠.”

렉투스의 잿빛 눈이 가늘어졌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욕심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라고 했다. 황후 시절에도 언제나 그랬다. 보석 왕관 대신 화관을 썼고, 철마다 드레스를 새로 짓지도 않았다. 연회를 열거나 귀족들에게 선물을 받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이 황후의 생일조차 모르겠는가.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욕심을 냈다. 줄 수만 있다면 한 푼이라도 아낌없이 내어 달라 간청하고 있었다.

그건 소티스를 위한 일조차도 아니었다. 그녀가 믿는 것을 위하여. 그녀가 그리는 미래를 위하여.

어떤 보답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일인데도.

“계산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렉투스는 긍정했다.

상단에 몸을 담은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욕심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소티스가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상단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공녀께서 그렇게 재차 물어보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빈민 구제 사업은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한, 일종의 도박이지요. 그러나 상인은 누구보다도 미래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리하게 바뀔 수 있고, 누구도 책임질 수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인으로서 자리를 잡은 이후, 최대한 불확실하고 위험한 것을 배제하는 식으로 이 상단을 지켜 왔습니다.”

렉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공녀께서 보여 주는 미래라면 괜찮겠군요.”

렉투스는 자신의 아내, 셰릴 메리골드를 떠올렸다.

아내는 하나뿐인 언니 소티스를 미워했다. 그녀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언니가 황제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교계에서의 입지도 우스워졌다.

이래도 저래도 곤란해질 입장이었다면 그 지위라도 있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이름뿐인 지위는 소티스의 몫이었다.

셰릴은 소티스를 오래도록 원망했다. 부모님의 차별도,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모두 소티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에게서 소티스 님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소티스가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를 많이 미워하던가요? 저는 약하고 비겁한 데다 소심하기까지 해서, 셰릴이 많이 고생했어요.”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인정하더군요. 공녀께서 황후 자리에 더 어울리는 분이셨다는 것을요.”

렉투스가 이어 말했다.

“저는 비록 실리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라지만, 옳은 일이 무엇이고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소티스 님께 감사하기도 하고요.”

“…….”

“당신이 아니었다면 제 아내는 황후가 되었을 것이고, 저와의 결혼 또한 없던 일이 되었겠지요.”

경제력에 대한 메리골드 공작의 야심이 가져온 혼담이었다. 특히 셰릴은 차라리 지방 귀족과 결혼하는 게 더 낫겠다며 불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렉투스는 셰릴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듣기로는 첫눈에 반했다고도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끼지 않았고, 귀한 이에게 걸맞은 이가 되고 싶어 상단을 더욱 치열하게 키워 나갔다.

“그러니 요구하셔도 좋습니다. 의도하시지는 않았겠으나, 당신의 선택 덕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일종의 보은이라고 보셔도 되겠습니다.”

소티스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떠올랐다.

황후가 되기로 했던 선택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얼음장 같던 에드먼드의 얼굴이나 셰릴의 악담, 다른 귀족들의 냉대 속에서 지쳐 갈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로 인해 행복해졌다는, 적어도 어떤 기회를 얻었다며 고마워하는 이가 나타났다. 셰릴 또한 시간이 흘러 자상하고 똑똑한 렉투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 선택이 틀린 것만은 아니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답답함이 한결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기회다. 그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 요구 사항은요…….”

***

렉투스는 소티스에게 내심 놀랐다.

몸도 마음도 약해서, 서운한 것 하나 솔직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여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소티스는 마차 지원을 거절했다. 말과 마차가 결국 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타고 갈 말조차도 마다하더니, 그 돈으로 수레를 하나라도 더 달라고 했다.

마차와 달리 수레는 쓰임새가 좋았다. 작물이나 짐, 하다못해 병자들을 옮길 때조차도 요긴했으니 최대한 많이 확보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줄 계획이라고 했다.

“보급품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게 좋겠습니다. 빵보다는 밀가루, 우유보다는 치즈, 생고기보다는 육포로요. 농기구와 숫돌, 식물 모종과 비료도 빠지면 안 돼요.”

“너무 많은 것을 받아 가시다 체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소티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굶어 죽는 것보다 체증으로 가슴을 치는 게 백 배는 낫답니다. 사람들은 너무 오래도록 부족하기만 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은 정말, 여러모로 황후답지 않군요.”

“나쁘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어떤 도덕적인 의무처럼 받아들이시는 분은 흔치 않으니까요.”

그녀가 쑥스러운 듯 뺨을 붉혔다.

“저를 보고 새삼스러워하시지 않을 만큼,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좋겠네요.”

“말씀하신 모든 조건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렉투스는 그녀의 요구 사항을 종이에 꼼꼼히 적고, 그 아래 서명한 뒤 상단에서만 사용하는 인장을 찍어 봉납했다.

“상단주의 권한으로 보증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공녀께서 폐황후라는 사실을 밝히시는 게 좋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먼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외지에서 일어나는 협상이니만큼 한 걸음 떨어져 있기로 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자신도 동의했던 것이다.

상단과 협의하여 물건을 공급하는 일은 그저 빵을 며칠 나눠 주는 것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수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렉투스 상단을 움직이는 일이다. 일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이름이, 그리고 직위가 수면 위로 올라올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지원은 메리골드 성을 짓기 위해 차출된 빈민들이나 평민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그녀가 내민 도움의 손길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간 공작의 처사가 비정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렉투스가 메리골드 공작을 곤경에 빠뜨린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층 더 높은 권위를 손에 쥐었던 적 있는 소티스의 이름이 필요했다.

“좋아요.”

그녀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주님의 말씀대로, 제가 황후였으며 나라를 돌보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을 겁니다.”

“…….”

이로써 메리골드 공작이 반대하더라도 면피할 수 있게 되었다.

렉투스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소티스가 상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제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부탁드려요.”

“…….”

렉투스는 소티스에 대한 평가를 다시금 고쳐야 했다.

세상 착해 빠진 여자인 줄 알았더니,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