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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40)화 (41/121)

제40화. 안식과 희망(4)

소티스는 수도 중앙에 있는 렉투스 상단의 본부로 향했다.

다행히도 황국 이곳저곳을 쏘다니던 상단주가 며칠 전 본부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큰돈을 빌려야 하는 만큼, 렉투스를 직접 만날 필요가 있었다.

“제가 먼저 들어갔다 올게요.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상단 건물 바깥에서 레먼을 기다리던 소티스는, 렉투스를 만나기도 전에 의외의 인물을 만나고 말았다.

“소티스!”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이었다. 불쑥 나타난 이가 소티스의 팔을 쥐고 골목길로 끌어당겼다. 우악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

“대체 뭘 하며 쏘다니는 거냐!”

메리골드 공작이 목소리를 낮추어 다그쳤다.

“하다 하다 이제는 렉투스 상단에까지 얼굴을 비쳐? 황제의 허락도 없이 황성을 나가서 온갖 패물을 팔아 치우고 돈을 모은다는 소문이 수도에 파다하다! 아비 얼굴에 똥칠이라도 해 댈 심산인 게야!”

“저는 정당하게 나왔어요, 아버지.”

“정당하다고!”

메리골드 공작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돋았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한 차례 심호흡하더니 따져 들었다.

“너 때문에 황성이 근거 없는 소문으로 범벅이 되었다. 네가 써먹은 외출 허가서가 그 망할 황비 몫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네가 얌전히 물러나 주는 대가로 핀의 서류와 보석을 갈취한 게 아니냐는 말까지 돌고 있다고!”

“그건 제 몫이었어요!”

소티스가 항변하듯이 외쳤다.

“아벨 대공작께서 저 대신 변론해 주시지 않던가요?”

“했지, 했고말고! 너무 잘해서 문제였지! 대공과 황제의 사이가 아주 원수만도 못하게 되었더구나. 얌전히 지내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 대체 그 돈들은 어디에다가 쓰고 또 상단 앞을 얼쩡거리는 게냐?”

그녀가 입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예전에는 무엇보다 두려웠던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렇게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니.

“돈이 많이 필요해요.”

“대체 네가 쓸 곳이 어디에 있다고!”

“……사람들이 죽어 나갈 만큼 성을 급하게 짓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곳에 쓸게요.”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메리골드 공작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빈민가에 얼쩡거리며 소문을 주워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려지더니, 이제 아비 등에 칼이라도 꽂으려고?”

“그럴 리가요.”

소티스가 자조적인 미소를 띤 채로 말했다.

“저는 그간 아버지께 무엇이든 해 드렸어요. 착한 딸이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해 주시지 않으셨나요?”

“그래. 네가 아기도 갖지 못하고 이혼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걸요.”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아버지 딸이라는 이유로, 에드먼드 폐하께서는 저를 미워하셨어요. 메리골드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제가 가려진 셈이었지요.”

“말장난을 하는구나. 그 이름이 아니었다면 너는 황후가 되지도 못했을 텐데!”

사랑 때문에 저질렀던 어리석은 선택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소티스는 이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그럴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따지고 싶었다. 차라리 황후가 되지 않는 게 나았다고. 평생을 에드먼드의 뒷모습만 보며 기약 없는 짝사랑을 하는 일이, 억지로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그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라고.

그렇다면 적어도 황후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기세등등해진 공작이 수도 근방의 땅을 사들여 성을 지을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여자를 끌어들이는 에드먼드가 그렇게까지 오기를 부릴 필요도 없었으리라. 어쩌면 적당히 마음에 드는 여자를 황후 자리에 앉히고 나라를 함께 꾸려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메리골드 공작님.”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게 지금은 아니다.

공작과 대립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그럴 능력도, 인망도 부족했다.

“제가 황비라도 되려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요.”

공작은 눈썹을 치켜떴다. 어디 더 떠들어 보라는 태도였다.

소티스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폐하의 마음을 살 수 없으니, 가만히 있다면 이대로 쫓겨나겠죠. 황비가 아니라 정부조차도 될 수 없을 거예요. 그럼 메리골드 공작가의 위치는 어떻게 되겠어요? 사교계에서도 이미 웃음거리인데, 정치적인 중심조차도 사라지는 셈이잖아요.”

“음.”

“공적이 필요해요. 제가 멘데즈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 말이에요.”

그저 사람들을 위한 일이지만, 눈 딱 감고 포장하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었다.

자신의 진심이 정치적인 전략으로 둔갑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별다른 도리가 없다. 소티스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에드먼드 폐하께서 저를 부덕한 황후라며 내쫓을 수 없었던 것처럼, 황가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요하다고요. 아버지가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죽어 가는 빈민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어요. 아무리 비천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뭉치면 무서운 법이죠. 아버지가 성을 짓기 위해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도까지 퍼진다면, 폐하께서 그 사실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어요?”

공작도 이를 예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성이 완공될 때쯤 소티스가 아이를 한 명쯤은 낳을 거라 예상했다. 한 명뿐인 황후였고, 적자 출생이 황위를 잇는 것은 당연한 전통이었으니까.

“크흠. 흠.”

공작이 불편한 표정으로 소티스에게 눈총을 보냈다.

“채찍이 아니라 당근이 필요할 때입니다. 제가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돕고 문제를 해결할 테니, 부디 이번만이라도 지원해 주세요. 렉투스 상단을 통하면 아버지의 명성도 자연히 올라갈 거예요.”

“한심한 것. 아이 하나를 못 가져서 이 지경이 되도록 길을 빙빙 돌아가다니. 쯧!”

“…….”

“네가 아니라 셰릴을 보냈더라면, 진작에…….”

그때, 낮은 목소리가 소티스의 등 뒤에서 울렸다.

“공녀님.”

낯익은 얼굴이었다.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적인 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상단의 주인이자, 셰릴 메리골드의 남편.

“렉투스 님.”

“모시는 것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행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성벽 자재 때문에 상단에 찾아왔던 메리골드 공작은 목을 가다듬으며 점잔을 떨었다.

“함께 들어가지. 어차피 딸아이 일이니 나도…….”

“아뇨, 공작 어른.”

렉투스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공녀님만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뭐라고?”

“거래 때문에 오신 거라면, 안에 담당자가 대기하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의외의 반응에 소티스가 놀라서 상단주를 보았다. 그러나 렉투스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가 버렸다.

상대는 수도를 꽉 쥐고 있는 상단의 주인이다. 아무리 장인어른인 공작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메리골드 공작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애꿎은 소티스를 노려본다고 해서 렉투스가 마음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 이내 혀를 끌끌 차며 먼저 들어가 버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소티스 님.”

무슨 생각인 걸까.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응접실로 발을 옮겼다. 공작이 따라와 참견하지 않으니 제게는 잘된 일이지만, 한 번도 사적으로 만나지 않은 이가 당연한 것처럼 제 편을 들자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응접실에는 이미 도착한 레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소티스는 얼른 그의 옆에 앉았다.

“왜 저를 도와주셨어요?”

렉투스는 그녀의 찻잔에 금빛의 차를 따르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요.”

“……필요?”

“상인은 수완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상대의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파악하는 것이 상업의 기본이지요.”

“제게서 가능성을 보셨나요?”

“공녀께서 하시기에 따라 다르겠지요.”

렉투스의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현재만 두고 보자면 공작 어른을 절대로 이기실 수는 없습니다. 공작께서는 자신이 가진 패를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셨거든요.”

“그렇다면…….”

“그러나 소티스 님께서는 황성 밖으로 나오셨고, 놀라운 행보를 보이셨습니다. 미래란 바뀌는 법이지요. 그러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소티스는 자신이 제안하려는 것에 비해 그의 평가가 후하다고 느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겸연쩍게 웃었다.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엄청난 계획 같은 걸 가지고 있지도 않고요. 그냥 사람들의 문제를…… 그러니까,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들을 찾아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들이 무력하게 굶지 않았으면 해서 돈을 빌리러 왔어요. 그것도 보석 몇 개를 팔아서는 해결할 수 없는, 꽤 큰돈을요.”

머뭇거리던 소티스가 레먼을 살짝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던 레먼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빈민 구제 사업을 할까 합니다. 척박한 땅을 개량하고 간단한 작물을 심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비바람을 막을 비닐과 철대, 감자 모종이 필요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메리골드 공작성을 짓는 데 차출된 사람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제대로 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난에 쉽게 좀먹히지 않고 삶을 꾸릴 수 있게 되니까요. 고아와 병자를 돌볼 수 있는 인력이 배치되는 것도 좋겠어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

소티스와 레먼의 뜻을 알아차린 렉투스가 조용히 말했다.

“돈이 필요한 일이죠.”

“상업적으로 큰 이윤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식으로 돈을 풀더라도, 이자는커녕 원금을 갚는 데도 시간이 상당히 필요하겠지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공녀께서는 더 이상 황후가 아니시니, 금전적인 손해가 발생할 경우 그걸 막을 수 있는 형편도 되지 않습니다.”

“알아요. 그러니 전부를 바라지 않아요. 하나만이라도,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희망을 줄 수만 있다면…….”

렉투스가 소티스의 말을 잘랐다.

“드리겠습니다.”

“……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단주를 바라보았다.

준다고?

……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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