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안식과 희망(3)
소티스는 밝아졌다.
황성 밖에서의 시간은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중 제대로 된 숙소에서 잠을 청한 건 채 닷새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삶에 두 번은 없을 고초에 가까웠다.
그러나 소티스의 표정은 나날이 환해졌다. 에드먼드가 정부를 황비로 들이겠다는 발언을 한 뒤 쓰러졌던 시기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정체 모를 여인의 선의를 받아들였다. 숱한 진통이 있었으나 그녀의 의지가 그 모든 고통을 이겨 낸 셈이었다.
소티스의 의중을 의심하던 노인도, 그녀의 빵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던 청년도, 그녀의 아버지가 공작일지 백작일지 내기하던 꼬마들도 어느새 그녀의 미소에 서툰 미소를 돌려주게 되었다.
그녀의 호의는 단순했다. 그저 힘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었다. 어떤 확인도 하지 않았고, 거래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하고픈 대로 호의를 베푼 뒤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가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사랑이 있을까.
의심이 습관이 되었던 사람들조차 소티스의 등을 눈으로 좇았다. 말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아귀에 들어온 빵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은 바라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동화책 속에서나 튀어나올 것 같은 선인이 존재하기를. 그리하여 그 태양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주기를.
“이건 장례식이라기보다는…….”
“꼭 축제에나 올릴 것 같은 음식인데?”
광장에 몰려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평생 살면서 몇 번 볼까 말까 한 화려한 음식이 탁자 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마다 눈이 튀어나오고 턱이 빠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정작 그 모든 판을 만든 소티스와 레먼은 태연히 양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돈이 더 필요해요.”
바람에 따라 느릿하게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던 소티스가 말했다.
“이 장례식을 위해 가진 보석을 전부 다 팔았어요. 일단 황성 밖으로 나온 목적은 달성했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제 도움은 흔적도 없이 녹아서 사라지겠지요. 사람들은 다시 빈곤해질 거고, 아이들은 굶을 거예요.”
“그럼 무엇을 하시려고요?”
레먼은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마법서를 펼치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금색 분필, 반짝이는 시약 몇 개, 나비가 든 주머니가 그의 앞에 가지런히 놓였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줘야 해요.”
소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해요.”
“보석 몇 개로는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소티스 님.”
“알아요.”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이 사람들의 삶을 완벽히 책임질 수는 없다. 황후에게도 힘든 일인데, 이혼한 그녀는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소티스에게는 그럴 의무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척박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몰랐던 아버지의 악행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녀가 책임지고 싶었다. 메리골드 공작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 바로 황후 소티스 메리골드였으니까.
그러니까, 땅만 다지는 거다.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생길 수 있도록, 가장 기본적인 것만이라도.
“렉투스 상단으로 갈 거예요.”
소티스의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답지 않은 치기마저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렉투스 상단주가 제 동생 셰릴의 남편이에요. 수도의 경제권을 꽉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과연 우리를 도와줄까요?”
“쉽지는 않을 거예요. 상단주께서는 손익 계산에 무척 능숙하시거든요. 하지만 저는 아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요?”
모든 준비가 끝난 레먼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마법진의 중앙에 선 그가 주머니를 양손에 쥐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부드러운 호박색 빛이 그에게서 천천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티스는 뒷짐을 지고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며 웃었다.
“수도의 상인들 중 렉투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이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척 보아도 값진 물건들을 사면서 의심하거나, 제 신분을 확인하려고 들지 않았죠.”
“소티스 님이 누군지 알고 계시거나, 혹은 누구든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거군요.”
“맞아요.”
이 또한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미련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티스는 한 번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 보고 싶었다. 말뿐인 명성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길 잃은 영혼들을 온전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이 일이 그녀가 갈구하는 진짜 ‘업적’의 바탕이 되어 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 가자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때, 모여든 인파 중 아이 하나가 속삭였다.
“저것 봐…….”
침묵 속에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떠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처럼 보이나, 실은 남겨진 이를 위로하기 위한 행사였다.
촛불 앞에 앉은 레먼은 주머니를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벌어진 틈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그의 마법과 융화되어 무지개처럼 긴, 무형의 길을 만들어 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기이하다 못해 어떤 경외마저 불러오는 모습에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이 순간만큼은, 영혼이 허황하다 못해 삿된 것이라 주장하던 이들마저도 기적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 없었다.
“죽은 이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어.”
“다들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저기에 내 딸도 있었으면 좋겠구나…….”
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늘로 솟는 듯한 빛줄기와 총천연색으로 반짝이는 레먼의 눈동자, 그리고 따스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가난한 이들의 장례식을 축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티스는 보았다. 빛을 따라 유영하듯이 여린 날개를 흔들며 움직이는 나비의 그림자를. 아주 희미한 윤곽에 불과했으나, 한 쌍의 가지런한 날개는 분명히 야산에서 보았던 나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안식을 찾아가는 영혼들을 보던 소티스가 중얼거렸다.
“……나비 떼가 흘러가네요.”
소티스의 중얼거림에 레먼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영혼이 보이신다고요?”
그는 정말로 놀란 듯, 어정쩡하게 일어난 상태로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저는 영혼 실체화 마법을 펼치지 않아서, 영안이 없다면 나비를 보실 수 없었을 텐데요?”
그 말에 덩달아 놀란 소티스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법은 신기루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저 티 없이 맑은 하늘만이 푸르게 반짝이고, 사람들이 저마다 떠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나눠 먹고 있을 뿐이었다.
소티스는 가슴께에 손을 얹어 보았다. 벅찰 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착각이었을까?
무언가 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어떤 변화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자신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그는 변화의 원인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매일같이 찾아오는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애꿎은 곳에 화풀이를 해 대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은 알고 있다. 해결책을 찾지는 못해도 계기를 찾는 것이야 쉬운 일이었다.
소티스 메리골드가 그의 시야 밖으로 완전히 걸어 나간 이후로, 에드먼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작은 여자였다. 똑똑하긴 하지만 그만큼 미련했다. 밀어내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 여겼고, 그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혼이 정해졌으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폐하를 좋아했거든요.”
그 말이 가시처럼 박혀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순히 소티스가 에드먼드를 좋아해서만은 아니다. 에드먼드는 황제였고, 그의 권력과 미모에 관심을 보이는 여인을 수도 없이 보았다. 소티스는 그중에서도 에드먼드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다만 그 모든 모욕을 견딘 이유가, 황후 자리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그 알량한 감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더없이 찜찜했다.
살며 아쉬운 소리 한번 못 할 것처럼 굴더니,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실컷 따지더니 황성을 잘도 벗어났다. 그의 허락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일을 그만둔 지금, 그녀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새와 같았다. 마치 그에 대한 마음이 족쇄라도 됐다는 듯한 태도다.
“폐하.”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에드먼드는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대꾸했다.
“들어와라.”
“수소문하셨던 일 말입니다.”
“폐황후의 행방 말이냐.”
시종장은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렉투스 상단 쪽에 심어 둔 정보책이 보고를 올렸습니다. 최근, 고위 귀족들에게만 납품하는 세공업자의 작품들이 다소 들어왔답니다. 값은 모두 현금으로만 받아 갔다고요. 그것도 모두 수도 동부 지점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빈민가 쪽에 가까워서 가장 수완이 나쁜 곳이었는데, 이례적인 일이지요.”
“그런데?”
폐황후의 행방을 말한다더니 뜬금없이 한다는 말이 보석 이야기라니. 에드먼드는 지루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으며 재촉했다.
“시중에 나온 물건 중 하나가…… ‘여신의 사과나무’랍니다.”
“뭐?”
소티스가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체면치레를 위해 에드먼드가 주었던 루비 귀걸이였다. 그가 소티스에게 처음으로 했던 선물이기도 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시의 에드먼드는 의무가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 귀걸이에는 약한 축복 마법마저 걸려 있었다.
장차 황후가 될 소티스가 그의 약점을 잡고 행패─물론 그녀와 썩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라도 부리면 안 되니까, 나름의 회유책으로 준비한 물건이었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이제는 어떤 의미가 없다는 듯 팔아 버린 것이다.
“……하아.”
생각만 해도 속이 꼬인다.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한숨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알겠다. 나가 보도록.”
“폐, 폐하. 상단 쪽의 연락책과 이야기는 더 나누시지 않을 겁니까?”
“내가 선물했던 물건이 어디서 어떻게 팔렸는지도 꼬치꼬치 캐물어야 하나?”
“그게 아니라…….”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골치 아픈 일을 완전히 털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시종장의 대답을 잘랐다.
“황비에게 갈 것이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내일까지 찾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