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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38)화 (39/121)

제38화. 안식과 희망(2)

소티스 메리골드는 마법사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와 같은 아름다운 호박색 빛이 전신을 부드럽게 감쌌다가 사방으로 둥글게 퍼져 나갔다. 거대하면서도 따뜻하고 온화한 빛이 넘실거리며 영혼을 감쌌다.

이윽고 새카만 연기 같았던 영혼이 작아지다가, 작아지다가, 나풀거리는 나비가 되어 레먼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비의 수가 늘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악령이 되었을 거예요.”

레먼이 그 나비들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다가, 이내 작은 주머니 안으로 인도했다.

나비들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기 전, 레먼에게 자신의 이름이나 남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수다스럽게 건넸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소티스의 쪽을 바라보았다.

“소티스 님 덕분에 소멸 마법을 쓰지 않아도 되겠네요.”

쓰러진 묘지기를 받아 바닥에 반듯하게 누이던 그녀가 레먼을 바라보았다.

“……제 덕분이라고요?”

“그럼요.”

악령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있었지만, 다행히도 완전히 변질하기 전에 기세가 누그러졌다. 문제가 한결 단순해진 셈이었다. 옳은 방식으로 그들을 처리하고, 뒤늦게나마 장례를 치러 영혼들을 인도할 수만 있다면 굳이 영혼을 소멸시킬 필요가 없었다.

영혼 소멸 마법은 시전자의 영혼에도 타격을 준다. 심적으로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최후의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레먼은 기뻤다.

소티스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 잘 모르지만, 그건 의외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제 시신들을 잘 묻어 주고, 장례만 치르면 되겠어요.”

“이번엔 이걸 팔아야겠네요.”

소티스가 살짝 웃으며 주머니에서 진주 브로치를 꺼냈다. 동부 해안에서만 난다던 새카만 흑진주는 아버지가 작년 생일 선물로 주었던 물건이었다.

메리골드 공작의 이기심으로 인해 죽은 이들이 절반도 넘는다고 했다. 그들을 위해서 이 물건을 파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다.

브로치뿐일까.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황후가 되었을 때. 귀족들에게 받았던 형식적인 선물들을 아낌없이 팔아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입을 것을 사들이고 싶었다. 시장 거리의 사람들은 장사가 잘되어 기쁘고, 궁핍한 사람들은 당장의 시름을 덜어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잘 쓰지도 않는 물건들로 만들어 낸 작은 기적에 소티스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으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나비들은 다 그 안으로 들어간 건가요?”

소티스가 마법 물품인 듯한 주머니를 눈짓하자 레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니까, 이제 다음 일을 해야겠습니다. 소티스 님께서 도와주실 일이 있어요.”

“뭔가요?”

그의 심각한 음성에 소티스가 주먹을 꼭 쥐고 물었다.

“그건 바로…….”

“…….”

“……삽을 찾아 주세요, 소티스 님.”

레먼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땅을 파야 하거든요.”

***

레먼 페리윙클은 땅을 팠다.

애석하게도 어떤 마법이나 기적이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삽을 들고 땅을 열심히 파고 또 팠다. 때마침 내리는 비 덕에 겉흙이 촉촉해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 쏟아 내고 있는 구슬땀으로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소티스는 낡은 산장의 처마 아래에 서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 레먼이 시체를 옮길 때면 얼른 다가가서 뭐라도 도우려 했다.

“저…….”

레먼이 곤혹스럽게 웃었다. 그는 소티스가 가까이 오자 몸을 움츠리며 살짝 물러났다.

“제 꼴이 너무 엉망입니다, 소티스 님. 쉬고 계시면 제가 잘 마무리할게요.”

“괜찮아요.”

흙과 먼지, 땀, 비 따위로 엉망이 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 무릇 마음에 둔 이의 앞에서는 근사한 모습만 보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소매를 들어 그의 이마에 묻은 땀과 흙을 문질러 냈다. 저보다 한참 큰 그에게 닿기 위해 발돋움을 한 그녀가 옷자락으로 이마와 뺨, 목덜미를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상상도 못 한 일이긴 합니다.”

레먼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티스는 그 모습을 빤히 보았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가 허리를 굽히고 온순하게 구는 모습이 의외로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누가 알았겠어요? 멘데즈에 와서 한 일이 삽으로 야산을 밤새도록 파내는 일이라는 것을요.”

“대마법사에게 맡기기에는 송구스럽긴 했어요.”

“저는 대마법사가…….”

“아직 아니시라고요?”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가 가만히 휘어졌다.

영혼과 소통할 수 있고, 그들을 인도하거나 때로는 제압할 수도 있으며 미약하게나마 영혼 소멸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다.

활용하기에 따라 어마어마한 마법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 많은 베아툼이라지만, 이런 마탑주를 대마법사로 두지 않을 리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이 능력을 전부 알리지 않은 거겠지. 그는 이미 대마법사다. 그녀는 베아툼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마법사가 베아툼에서도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함부로 소문을 내지는 않을 테니까요.”

기분 탓이었을까? 제힘을 숨긴 사람인데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불안하게 쿵쿵 뛰던 심장도 잠잠해지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의 진짜 힘은 숨겨진 마법도, 아름다운 외모도 아니었다. 밤새도록 삽으로 땅을 파내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녀가 비는 맞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저 다정함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레먼. 이 일만 끝나면 수도 쪽으로 넘어가서 며칠만이라도 먹고 쉬는 게 좋겠어요.”

소티스의 작은 손이 레먼의 눈가를 조심스레 매만지자, 그가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제게 너무 잘해 주지 마세요, 소티스 님.”

“왜요?”

“그야…….”

그녀는 손에 묻은 흙을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맑고 선한 시선에 레먼은 눈썹 끝을 내리며 웃어 보였다.

그야 당연히,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당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친절에 불과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을 좋아하는 제게는 모든 것이 너무도 큰 의미로 다가와 버려서요.

그렇게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게 하물며 제 진심이라 하더라도, 소티스에게 짐이 될 만한 것이라면 모두 감춰 두고 싶었다.

레먼은 침묵 속에서 가만히 웃었다. 그는 삽을 내려놓고 양손을 붙여 소티스의 머리 위쪽에 댔다. 한 방울이라도 비를 덜 맞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러나 어찌 두 손으로 비를 막을 수 있을까. 결국 둘은 속절없이 젖어 버렸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당신에게 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흙을 바르게 덮고 난 뒤, 소티스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마법사님께서 이렇게 제게 다정하시니, 제가 모질 수가 없는걸요.”

레먼의 만류에도 소티스는 결국 그의 일을 도왔다. 그가 죽은 이들을 구덩이 안에 차례로 누이면, 그녀는 그 위에 널빤지를 덮고 흙을 뿌렸다.

새하얀 원피스가 제 색을 잃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팔다리는 흙투성이였고, 어찌나 열심히 움직였는지 뺨은 발갛게 물들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도 기뻤다. 이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의 얼굴을 보면 그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히 미소가 나왔다.

소티스가 손바닥의 흙을 옷자락에 얼른 문지르고는 내밀었다.

“그 삽은 이리 주세요. 제가 산장 옆에 가져다 둘게요. 함께 내려가요.”

레먼은 고개를 천천히 젓고, 삽 대신 자신의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이걸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소티스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후련한 듯 지어지는 맑은 미소에서는 어떤 슬픔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확인하시지 않으셔도, 저는 이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레먼은 대답 대신 마주 웃었다.

영혼 마법은 다른 마법보다 훨씬 익히기 어려웠다. 단순히 영안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고, 기본적인 주문 하나도 제대로 외지 못해 똑같은 마법진을 천 번씩은 고쳐 그려야 했다.

그 과정이 너무도 고된 나머지 홧김에, 정말이지 홧김에 자신의 운명을 의심한 적도 있었다.

영혼 마법사로 사는 일이 정말로 행복한 일일까? 마탑주로서의 삶이 숱한 영혼을 구해 내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제 삶을 위한 일이기도 할까?

시간이 지나며 레먼 페리윙클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얼추 내렸다. 그는 생각보다 마법을 사랑했고, 타인을 돕는 일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내린 답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 작은, 그러나 중요한 빈 공간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허전함은 커지지도 않았지만 작아지지도 않았다. 여전히 선명한 존재감으로 그를 조용히 꾸짖을 뿐이었다.

이 운명이 내게 무엇이 줄 수 있을까? 하고많은 마법 중에 왜 하필 영혼을 다루게 됐을까?

“소티스 님.”

그리고 그의 삶에, 소티스 메리골드가 들어왔다.

새벽녘의 머리카락과, 맑은 하늘의 눈동자와 그리고 태양 같은 마음을 가진 여인이.

그녀를 보았을 때 레먼은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운명을 믿으세요?”

이 여인을 구하는 일이 자신의 삶을 크게, 아주 크게 바꿀 것이라고.

어쩌면 그게 레먼이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믿어요.”

그의 호박색 눈동자에 열정이, 애정이, 그리고 확신이 담겼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또렷하고 찬란한 감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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